102화
때로 비언어는 언어보다도 강력하다. 단호하고도 무심한 말이 표정으로 새어나갔다.
아스킨이 절로 멈칫할 만큼.
“아리아, 듣고 있자니 혹시 발닦, 아니. 짐꾼이 필요한 것 같은데 맞아요?”
“네? 어, 음 네!”
아리아가 서둘러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물원에 가면 수많은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아리아는 어떻게든 그곳에서 샤를리즈에게 뭔가 선물하고 싶었다.
“마침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남자가 딱 있어요.”
샤를리즈 주변에 아무리 정상인이 없다지만 이럴 때 써먹을 인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로 충성스러운 제트가 있었고, 제트가 아니어도…… 노아도 있었다.
노아의 경우 약간 의문스러움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주변에선 그나마 정상 축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물론 무려 황제의 보좌관이지만 알 바인가?
그 폭군 오빠에게 적절한 사유를 대면 빌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샤를리즈는 노아 본인이 들었다면 당황했을 불도저 같은 생각을 해치우며 슬쩍 미소 지었다.
이 세계의 동물원이라니, 게다가 아리아와의 유람이라니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꽤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굳이 노아까지 갈 필요 없이 제트나 데려가야지.’
빙긋 웃는 샤를리즈를 보던 아스킨의 잘생긴 눈썹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움직임이었지만, 그로서는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왜? 왜 저리 웃는 건가, 게다가 다른 남자?
아스킨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여우처럼 웃는 상의 미남이 자리했다.
이안 차일드였다.
……허, 자신이 함께 가지 않는 자리에 그 남자를 대신 끼우겠다?
그 남자는 아스킨의 대리 자리를 탐탁해할 것 같은……, 여기까지 생각한 아스킨은 생각을 멈췄다.
이안 차일드라면 좋다고 달려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놈이 좋다고 달려 나오든 맨발로 달려 나오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스킨은 순간이지만 이안의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은 거친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작인 자신에게 깐죽거렸다고 감정이 쌓이기라도 했나?
예의를 중시 여기는 자신이지만 이안이 그렇다고 선을 크게 넘은 적은 없었다.
아스킨은 답답함에 찡그렸다. 왜, 대체 왜 초조해진단 말인가.
“엇 언니,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글쎄, 그건 그날 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사이 아리아와 샤를리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를리즈는 우아한 목소리로 뚝 자르는 듯한 말씨를 구사했다.
그 순간 샤를리즈의 석류알처럼 붉은 눈동자가 아스킨을 향했다. 그는 왜인지 멈칫하고 말았다.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바쁜 사람은 일하라고 하죠? 뭐, 내가 사람이 없겠어요?”
그 짤막한 관심이 마치 신기루였다는 양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양.
흥미고 관심도 잃은 듯한 목소리에 아스킨은 절로 고개를 돌려 샤를리즈의 시선을 쫓았다.
이미 샤를리즈의 시선은 떠나갔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머물렀다.
가지런하고 둥근 이마와 반듯한 콧날, 상앗빛 뺨과 사슴처럼 우아한 목덜미가 보였다.
자신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아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샤를리즈의 모습이 낯설었다.
“와, 신나요. 언니, 저희 언제 갈까요? 오늘? 내일? 모레?”
“음, 언제든 상관없긴 하지만 오늘은 늦었으니 한 3일 뒤는 어때요?”
3일 뒤, 아스킨이 모든 정무를 해결하고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정이었다.
아스킨은 퍼뜩 자신이 왜 이런 걸 계산하고 있는 건지 부아가 치밀었다.
여동생과 저 여자가 함께 동물원에 가는 것이 뭐라고?
“언니는 괜찮아요?”
“네. 그 정도면 난 괜찮아요.”
샤를리즈가 들고 있던 부채로 입술을 살포시 가리며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불편하게 잘 알지도 못하는 부관들이랑 가느니 오붓하게 셋이서만 가는 쪽이 훨씬 낫죠.”
셋, 샤를리즈로서는 제트를 염두에 둔 말이었지만 아스킨에게는 이안 차일드를 함께 데려간다는 말로 들렸다.
아니, 확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스킨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성큼성큼 인사도 없이 돌아나가는 남자를 보며 샤를리즈는 아주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래?’
싸늘하기가 얼음장 같은 인간이어서 그렇지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건만, 아리아가 샤를리즈와 함께 움직이자고 해서 불쾌하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샤를리즈는 픽 웃었다. 불쾌한 게 누구인데?
아니, 잊자. 화를 내 봐야 뭐 하겠어.
샤를리즈의 시선이 다시 아리아에게로 돌아가며 반달로 휘어졌다.
평소 제국의 악독한 악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순한 미소였다.
샤를리즈는 문을 열기 전 아스킨이 그 미소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금욕적인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주먹이 꾸욱 쥐어졌다는 것도.
* * *
그렇게 아스킨 그놈이 멋대로 나가 버린 뒤로 나는 한참이나 아리아와 수다를 떨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알츠베이트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고 피곤하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역시 스트레스엔 수다가 도움이 된다니까. 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역시나 그놈에겐 별 수확이 없었지. 괜히 물어봤어. 아니, 물어보지 않아도 정해진 답이었나?’
나는 소파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봤다.
궁금해서 물으러 간 것이었지만 허탈함만이 남았다.
그래, 사람인지라 살고 싶은 욕망은 죽기 전까지 들 것이다.
하지만 인정한다. 그놈과는 영원히 끝난 관계고 난 뒈질 것이다.
‘이제 확실해졌어. 앞으로는…… 막사는 것 외엔 없다!’
오히려 할 일은 명확해졌다.
이제 자신을 싸고도는 척 이용해 먹기 바쁜 할아버지란 영감탱에게 복수하는 길뿐이다.
그사이에 록시디언 폭군 오빠도 조금만 엿을 먹어 주면 좋을 것 같다.
또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복세편살 스타일로 멋대로 사는 것도 좋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 내 사랑 코인 돌려받기도 뒈지게 그른 판국에 내가 언제 이런 부자로 살아 보겠냐.’
아쉬운 일이긴 했다.
이대로 1년 쭉 살아남아서, 등장까지 얼마 남지 않은 원작 여주님 얼굴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미 텄지, 뭐.’
샤를리즈는 이미 다른 생각 중이었다.
‘조만간 알츠베이트 공작이 파혼서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올 건데. 그전까지 그 영감탱과 이 가문을 어떻게 조져 놓는담…….’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들이 내가 생각해도 믿기질 않아서 뺨을 꼬집어 보았다.
이상하지.
무수한 생각 사이에서 아스킨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이 이제 뭘 해도 홀가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을 것 같다니.
“공녀님, 목욕물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지금 바로 갈게.”
고개를 조아린 하녀가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그리고 공녀님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하녀는 이렇게 말하며 내게 소포를 전달했다.
아주 조그만 크기였는데, 나는 이 자리에서 바로 풀었다.
‘허어?’
소포를 보낸 사람은 또라, 아니 이안 차일드였다.
「친애하는 샤를리즈 공녀님께」
공문서에서나 볼 법한 유려한 글씨였다.
아스킨이 본인 얼굴만큼 정갈하고 단정한 필체라면 이쪽은 유료로 팔아도 되겠다 싶을 만큼 화려한 느낌의 필체였다.
각설하고 이런저런 잡소리가 많았지만, 핵심은 이거였다.
「……하여, 제 눈에서, 제 머리에서, 기억에서 공녀님의 연약한 손에서 피가 흐르던 상처가 잊히질 않습니다. 」
여기까지 읽은 나는 빙긋 예쁘게 웃었다. 절로 감상이 튀어나왔다.
“지랄.”
잊히긴 뭘 안 잊혀. 이 바람둥이 같은 인간이 염병이었다.
이건 모로 보나 남녀 관계에 좀 잘 안다 싶은 수작 가득한 필적이었다.
난 쯧 혀를 찼다.
“괜히 외교 일하던 건 아니다. 이건가.”
그럼에도 시선을 잡아끄는 문체였으니, 이 또한 재능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부디 제 선물이 공녀님께 작은 도움이 되길……(중략)…… 그리고 한동안 저는 이웃 제국에……」
소포의 내용물은 내 손가락 상처를 위한 특제 마법 연고였다.
제발 이거 좀 발라 달라. 안 발라 주면 또 바닥에 드러누울 것이다. -여기서 미친놈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쾌차하길 바라며 본인은 이웃 제국에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까지.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내 흥미를 끌진 못했다.
‘허어, 지가 한동안 수도를 비운다는 사실은 왜 이리도 구구절절 적어 둔 거람.’
나는 혀를 찼다.
“이 원숭이 같은 놈이 왜 보고를 하고 난리인지.”
내 단순한 감상에 하녀가 화들짝 놀랐다.
“예,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쉬고 쉬어야겠다. 오늘 오랜만에 입을 너무 많이 놀렸어.”
내 중얼거림에 하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곧 나는 욕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일찍 자리에 누웠다.
또 여러 생각이 드려나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잠이 잘 왔다.
오, 이래서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있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깊이 잔 것 같다.
시간은 흘러 3일이 지났고, 드디어 오늘 아리아와 함께하는 나들이 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벼운 기대감을 품고 있던 마음이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큰 기대로 진화했다.
과연 그 동물원이란 게 어떤 형태를 하고 있으려나? 내가 아는 그 동물원인가?
게다가 아리아와 함께하는 거라니, 오늘 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