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4/194)

103화

‘끄으응.’

소풍 처음 가는 어린아이처럼 간밤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던지라 나는 약간 초췌한 표정으로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서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나 참. 소풍 가는 애도 아니고, 잠까지 설치고.”

침대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담 하녀인 수잔이 물이 담긴 쟁반과 함께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 헉 공녀님…….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어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아 글쎄. 아무래도 침대를 바꿔야 할 것 같아. 잠자리가 영 불편하네.”

난 혹시나 수잔이 내 상태를 알아차릴까 싶어 애꿎은 침대 탓으로 모든 걸 돌려 버리고는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 잠이 좀 깨네. 내가 말한 건 잘 준비되고 있겠지?”

수잔은 머리를 조아리며 모든 준비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3일 전, 아리아와 동물원을 가기로 약속한 날 마차와 점심 및 간식거리는 내 쪽에서 준비하기로 했다.

아리아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레무트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내가 준비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음식 맛도 까다롭기로는 이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샤를리즈’가 뽑아 둔 요리사들이 이 알츠베이트에 모여 있으니, 이 쪽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조금 더 노동을 시킨다 해서 나쁠 건 없겠지.

토끼처럼 울상을 짓는 아리아에게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물원에 가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고 돌아와 신이 나서 이것저것 주문했던 것이다.

“치즈 케이크는 특별히 신경 쓰라고 전달했지?”

“예. 공녀님께서 특별 지시를 내렸다는 것을 주방 최고 책임자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나는 아리아가 지난번 소풍에서 극찬을 서슴지 않았던 치즈 케이크를 또 한 번 대접하고 싶어 특별 부탁을 넣었던 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직접 가서 확인을 해야겠다.”

이대로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직접 주방으로 가 볼 요량으로 옷을 갈아입고, 수잔만 대동한 채로 내려갔다.

내가 주방에 도착한 순간 주방은 단언컨대 초토화가 됐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반죽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아, 이걸 고려 못 했네.’

아마 신입 요리사인 듯 젊은 청년이 반죽을 놓치고 새하얗게 질렸다.

개중 책임자인 최고 셰프가 내게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래도 총책임자라고 그나마 침착한 모습이었다.

“고, 공…… 공녀님을 뵙습니다.”

“왜 그리 놀라지? 뭐 귀신이라도 봤어?”

“아, 아닙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극도로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뭐. 이건 ‘샤를리즈’가 남기고 간 공포의 잔재이겠지.

나는 뺨을 긁고 싶은 머쓱함을 참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필요한 건 없고. 내가 말한 거 준비 잘 되고 있나 확인하러.”

“공녀님의 분부신데, 저희가 소홀히 할 리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만큼은 절대 실수하면 안 돼. 알겠어?”

단 한 번도 주방에 나타난 적 없는 샤를리즈가 이곳에 나타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주방 총책임자가 꽝꽝 얼어붙은 표정으로 최선을 다해 끄덕였다.

“예,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하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봐요, 윤지후 사원. 지방대 출신이면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거고, 잘하기까지 해야 하는 거라고.”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로…….”

왜 이 순간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직장 상사의 폭언이 머릿속에 떠오른 걸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툭, 최고 셰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맛있으니까 시키는 거야. 알겠어?”

“…….”

멍하니 입을 벌리던 총책임자가 핫, 하는 얼굴로 얼른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 제가 잘하고 있습니까……?”

내 얼굴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안 그럼 내가 왜 네 요리를 먹겠어? 잘랐지.”

어라, 입에서 나오는 본능대로 지껄여 버렸는데.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게 어째 역효과를 부른 모양이었다.

나는 끙,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애써 표정을 감추면서 주방을 빠져나왔다.

나와 보니 수잔 외에도 도착한 전담 하녀들이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라며 재촉하는 탓에 공작가 직계만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을 가로질러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건, 크나큰 실수였다.

“오, 샤를리즈. 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구나.”

가장 마주치기 싫은 노인네를 마주해야 했으니까.

낭패였다. 나는 불쾌감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가까스로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바꿨다.

“예, 뭐. 눈이 떠지더라고요.”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알츠베이트 공작은 하등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해석하자면 또 저러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오오, 그렇지. 상인의 아내로 살아가려면 아침잠이 많으면 곤란하겠지.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너 정도면 이 할애비 덕택에 굳이 부지런히 살 필요가 없을 테니.”

“……상인의 아내라뇨?”

“음? 그 되먹지 못한 레무트 놈과는 곧 파혼을 할 게 아니더냐. 아니, 이미 한 셈이지. 종이에 도장을 찍지 않았을 뿐.”

이것도 시간문제라며 공작이 킬킬 웃었다.

“이 할애비는 이안 경으로 마음을 굳혔다. 요즘 드문 아주 건실한 청년이야.”

……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왔지만 지금 저 노인네를 건드렸다간 또 기사들에게 끌려가서 방 안에 갇히게 될지도 몰랐다.

아직 저 노인네를 엿 먹일 정확한 방법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손까지 부들부들 떨어 가며 참아냈다.

‘영감 기다려라. 곧 그 이죽거리는 얼굴에 제대로 한방 날려줄 테니.’

공간이 공간이니만큼 공작은 식사 중이었다. 나는 표정 없이 식탁을 응시하곤 툭 뱉었다.

“식사 많이 하세요. 그래야 쌓아 놓으신 돈 다 쓰고 가죠.”

“저… 저… 말버릇하곤. 쯧, 이안 경 앞에서 그런 말버릇은 꺼내지도 말거라.”

“내가 언제 내 맘대로 못 하는 꼴 봤어요?”

나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와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헛숨이 터져 나왔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이안 차일드 앞에서 말조심하라고?

샤를리즈 기억 속을 뒤져 보니 저 노인네는 단 한 번도 아스킨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본데?

나는 쯧 혀를 찼다.

‘저 영감탱이나 그 또라이 인간이나 진짜 맘에 드는 인간이 하나도 없네.’

보통 이런 기분일 때 ‘샤를리즈’는 언제나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부쉈다.

그래서인지 하녀들은 나를 쫓아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다.

문을 열자, 어리둥절한 표정들이 보였다.

깨지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으니 이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날 기다리고 있는 이들 중 지위가 제일 높은 이를 불러, 오늘 내 출타 장소와 목적을 철저히 비밀리에 붙일 것을 명령했다.

“어기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는 걸 후회하게 해 준다고 해.”

“……예, 알겠습니다.”

물론 그 노인네의 귀에 들어간다고 해서 두려울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오늘 당장 저 공작이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해 두면 설사 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내가 동물원에 다녀온 뒤가 되겠지.

내 명령을 받은 하녀장은 관련 인물들에게 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분주히 달려갔고, 나는 하녀들의 치장을 받으며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저어, 공녀님. 공작님께서 공녀님께 시녀에 대한 의중을 여쭈셨습니다.”

“시녀?”

한창 치장을 하던 도중, 새로운 시종이 들어와 알츠베이트 공작의 전언을 전했다.

시녀 없이 오래도 지냈으니 이제 그만 생각해 보라고.

샤를리즈같이 고위 귀족이 놀이 친구 겸 따까리, 아니 귀족 신분의 따까리나 다름없는 시녀가 없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디 보자……. 여행 가기 전에는 있었던 것 같군. 제 손으로 내쫓은 뒤엔 받지 않았고.’.

그리고 ‘샤를리즈’의 시녀는 웬만한 성격으로는 버티기 힘든 자리라 다들 울며 뛰쳐나가기 바쁘거나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버티다 혼절한 불쌍한 이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시녀를 뽑으라고? 잘도 지원하겠다.

하지만 분명 권력에 눈먼 자들은 딸을 들이밀거나, 야망 넘치는 누군가는 자원하겠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살지도 못할 건데 시녀는 무슨 시녀.

나는 단칼에 그 전언을 물리치고는 시종마저 내쫓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서 나는 문밖을 나섰다. 대기하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 여기 있네.’

그들 중에 제트도 있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제트의 이름을 불렀다.

“제트.”

가장 덩치가 큰 제트가 미세하게 움찔 떨었다.

고개를 들라 하자, 유순한 듯 마치 잘 정제된 번견 같은 묵묵한 얼굴이 나를 응시했다.

‘역시 얼굴은 참 나쁘지 않단 말이지. 잘생기긴 했어.’

다른 기사들의 외양을 보자니, 평균치가 높은 것도 아닌데 유달리 제트는 덩치도 외양도 수준급이었다. 가끔은 까마귀들 사이에서 백로를 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호위 기사들 사이에 있을 때는 더욱더.

나는 웃는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제트, 네게 날 단독으로 호위할 권리를 줄게.”

제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손을 잡고 기다렸다는 듯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맞잡은 손이 미약하게 떨린 것도 같았다.

‘……뭐야. 지나치게 예법이 바른, 아니, 절도가 넘치는데?’

동시에 기사의 인사를 올리는 태가 조금 남다르다고 느꼈다.

지금까지는 왜 못 느꼈나 싶을 만큼 반듯한 자세였다.

마치 고위 기사에게서나 보던 자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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