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사라졌다.
제트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단 ‘샤를리즈’의 기억에는 없는 걸로 봐서는 ‘샤를리즈’와 관련이 없거나, 그녀가 잊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단 얘기가 되니까.
물론 의문이 없진 않았지만 그냥 넘겼다.
이미 제트는 내가 믿을 수 있는 호위 기사였으니까.
“……명을 받듭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복도를 갈랐다.
복도에는 제트 외에도 다른 호위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내 제안에 놀란 것으로 모자라, 제트가 수락하자 하나같이 경악한 눈으로 제트를 보았다.
“제트……! 너 미쳤,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명을 어길 셈이야?”
“제트!”
그러나 다른 호위 기사가 무어라 떠들건 우직한 눈은 오직 나를 향해 있었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무시하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은근한 마이웨이인 것 같단 말이지. 아니, 대놓고인가?’
제트가 대답이 없자, 다른 호위 기사들이 숫제 사나워지거나 얼굴에 분노를 띠었다.
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뱉었다.
“명령한 건 난데, 왜 제트에게 지적질이야.”
“아…… 공녀님, 그, 그것이 아니오라!”
놀란 호위 기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면 뭐. 내 명령이 우습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호위 기사를 보며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 항명할 용기도 없으면 그럼 꺼져.”
“……네?”
“돌아가라고.”
“하, 하지만 공녀님, 공작님께서는 반드시 최소 2인 1조로 공녀님의 호위를……!”
“너흰 그래서, 할아버지의 호위 기사다?”
웃고 있는 그대로 내 눈이 사나워졌다.
이제 이 몸에 남은 ‘샤를리즈’ 본능이 마음껏 활개 치게 두는 중이었는데, 이럴 때 써먹기 아주 좋았다.
“아니, 그렇지는 않습, 니…….”
“잘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당장.”
“……저희는 공녀님을 호위하는 기사들입니다.”
“그래, 현명한 답이야.”
나는 웃으며 대답한 호위 기사의 어깨를 부채로 톡 두드렸다.
“오늘 외출과 단독 호위는 잠시 기억에서 잊든가, 잊지 못한다면 입이라도 다물길 바라. 남은 살날이 어디까지 괴로울 수 있는지 경험하기 싫다면 말이야.”
“…….”
“충성스러운 내 호위 기사라고 하니, 어렵지 않게 들어주겠지?”
“……명을 따, 따르겠습니다.”
대장 격인 기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함께 있던 호위 기사들도 눈치를 보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내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얼른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봄바람에 흩날리는 솜털보다 주둥이가 가벼운 인간들이다.
이 정도면 그 노인네에게 쪼르르 가서 이르진 못하겠지.
“흥, 시간 낭비했네. 가자. 제트.”
나는 등을 돌렸다.
한참을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거의 소리 없는 걸음이 느껴졌다.
신기했다.
분명 뒤로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이렇게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니 말이다.
게다가 덩치도 엄청 큰데 말이지…….
나는 걷다 말고 흘끗 뒤를 응시했다.
제트와 시선을 마주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신기하리만치 소리가 없이 움직이네, 넌.”
제트의 얼굴로 묘한 표정이 스쳤다.
해석하자면 감격과 의문…… 그리고 미약한 기쁨이 느껴졌다.
“오랜 훈련을 거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검을 잘 모르지만 이런 움직임을 내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한 거 아닌가?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어느 것부터 물으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굳이 물을 필요는 없나?
막 흥미를 잃고 다시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공녀님.”
제트가 나를 불렀다. 거의 없던 일이라 호기심이 일었다.
왜? 눈짓으로 대답하자, 제트는 나를 보고도 망설이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감히, 청을 하나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부디 허락해 주시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인 극존칭에 나는 속으로 잠시 놀랐다.
샤를리즈의 직위가 직위다 보니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말을 높이는 자들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지만…… 어째 이 남자는 남을 높이면서도 본인도 격하시키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은 지극히 충성스럽되, 어딘가 돌아 버린 듯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기묘한 부조화였다.
……이 남자 뭐지?
가슴 속 물음표가 더 커지기 전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해 보라는 듯이.
“청컨대, 저들에게 잘해 주지 마십시오.”
저들? 나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뭘 말하는 거지?
잠시 고민한 뒤에야 말했다.
“누구 말이야, 설마 아까 걔들? 호위?”
“예.”
엥. ……내가 대체 언제 걔들한테 잘해 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었다. 표정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건만 침묵을 비슷하게 받아들였는지, 제트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감히 공녀님의 손짓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뒤에서는 언제나 공녀님을 욕하는 이들로 앞뒤가 다른 데다 이기적이고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함께 일하는 호위를 말하는 것치고는 신랄했다.
다만, 목석 같은 구석이 있는 얼굴 덕에 완화되는 느낌이라고 할지.
덕분에 나는 그간 로봇같이 보이던 존재가 사람이었구나 새삼 감탄하며 신기하게 보았다.
“나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이미 그들이 알츠베이트 공작의 명으로 나를 억지로 번쩍 들고 끌고 가던 때부터 그들을 향한 신뢰는 바닥에 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럴 법한 인간들이었구나 하는 감상밖에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지.”
내 명을 듣는 건 여기 제트밖에 없잖아?
죽기 전까지 움직여 줄 손발이 필요한데, 얼마나 중요하다고.
제트의 진한 암녹색 눈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찰나간 흔들린 것도 같았지만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간 탓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슨 중요한 말을 하나 싶었더니 새삼스러운 말에 시간이나 뺏겼잖아.”
나는 부채로 툭 제트의 어깨를 치고는 몸을 돌렸다.
돌리기 직전 제트는 내 부채가 지나간 자리를 매만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대로 걸었고, 머지않아 뒤로 소리를 잔뜩 죽인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어쩐지 조용히 따르는 저 그림자 같은 기척이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싶었다.
‘아리아가 기다리겠네, 어서 가야겠다.’
* * *
본래 ‘샤를리즈’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악녀답게 시간 약속을 지키는 일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약속 시간보다 무려 10분이나 일찍 레무트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차 앞에 내린 순간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을 마주했다.
아스킨 레무트였다.
무슨 장승처럼 서 있길래 순간 아스킨 본인이 아니라 동상이라도 가져다 뒀나 싶었다.
오늘은 이 남자의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고 말았다.
‘뭐야, 이 인간은 왜 여기 서 있는 거야?’
어제 매몰차게 동행을 거절했기에 함께 가려고 기다리던 건 절대 아닐 것이다.
아마 어디 나가려다가 우연히 내 마차와 마주친 모양이었다.
운이 나쁘게도 말이지.
“……이제 인사도 하지 않는 건가?”
나는 아스킨의 말에 놈의 가슴팍을 노려보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인사를 하던 사이였다고?”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웃겼다.
딱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 이 대사를 바꿔서 하던 처지였다.
내가 ‘인사도 안 해? 인사는 좀 해 주라, 기왕이면 더 친해져서 1년만 더 보면 좋구? 으응?’ 하고 매달리면 저쪽은 ‘우리가 언제부터 인사를 했었지?’ 하고 차갑게 내치던 사이.
생각해 봐야 부아가 치밀 뿐이라 짜증스럽게 시선을 흘렸다.
“너랑 싸울 생각 없어. 싸워 봐야 시간 낭비지.”
“…….”
“오늘은 그저 아리아를 데리러 왔을 뿐이야.”
나는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아리아는 어딨지?”
“그 애는…… 지금 나오지 못한다.”
눈썹을 홱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안 좋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뭐야, 설마 네가 막은 거야? 아리아랑 붙어 다니지 말라고? 네게 아리아의 자유를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어.”
“……내게 이런저런 짓을 했던 사람이 할 소린 아니군.”
“그건.”
내가 아니라 ‘샤를리즈’가 했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할 말은 넘쳤다.
“그건 곧 아리아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 의심하겠단 거네.”
“일단 전제부터 틀렸다. 정정부터 하지. 나는 아리아를 막지 않았다.”
“그럼 뭔데, 왜 아리아가…….”
“오늘 아침 아리아가 가벼운 발작을 일으켰다.”
무어라 말하려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리아가 아프다고? 내 얼굴은 삽시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쓰러진 거야? 몸은? 괜찮은 거고?”
“……일단은 괜찮고, 진정됐다. 문제는.”
“문제?”
“오늘 약속은 무조건 가겠다는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아프면 집에서 쉬어야지.
하지만 곧바로 입을 열지 못한 건, 약속을 하던 날 저녁 늦도록 재잘거리던 아리아가 이 약속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