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6/194)

105화

“언니, 꼭, 꼭, 꼭 가는 거예요!”

그래도 어쩌겠어, 건강이 먼저지.

“사실 주치의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니, 나가지 못할 상태는 아니라고 하더군.”

“그래? 그건 다행이네. 하지만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오후 1시까지만 상태를 지켜보고서 결정하기로 했다.”

1시, 나는 시계를 보았다. 현재 정오에 가까웠으니 1시간 반 정도 남은 셈이었다.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려나?’

어쩔 수 없이 집주인의 눈치를 보자, 아스킨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저런 표정이야? 나도 너 좋아서 쳐다본 거 아니거든?

다행히 나를 쫓아내려던 건 아니었는지 나는 저택 내부로 들어가 기다릴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

“아리아, 몸도 안 좋다면서 뛰어오면 어떡해요. 내가 가면 되는데.”

나는 벌떡 일어나 아리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손이 조금 차다. 이 아가씨, 나가도 되는 거야?

“언니, 들었죠? 오늘 나갈 수 있대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나는 이 반짝거리는 토끼한테 실망을 안겨 줄 자신이 없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에 깃든 걱정을 눈치챈 건지 아리아가 자신은 괜찮다면서 씩씩하게 말했지만 걱정은 걱정이었다.

“그래요. 그럼 갈까요?”

여차하면 제트 시켜다가 아리아를 바로 저택으로 옮기게 하자.

그렇게 조금 늦긴 했지만 동물원으로 출발하려 했을 때였다.

나는 레무트 성을 나서는 순간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일행에 나와 아리아 말고 달갑지 않은 인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쟨 왜 같이 나오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아리아를 기다리는 동안 무슨 속셈인지, 나와 같이 응접실에서 기다려서 속으로 기함하며 욕을 했던 차였다.

말도 걸기 싫어서 그저 신문을 보기 바빴는데, 다행스럽게도 저쪽에서 말을 걸지 않아 폭풍 전 고요도 고요라고, 아무런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뭐야, 내가 이런 말을 꺼내진 않으려 했는데…… 넌 어디 가는 거야?”

마침내 같은 마차 앞에 도착하기까지 하자,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목적지가 같다.”

“뭐?”

아스킨은 마차를 고갯짓했다.

고갯짓을 따라가자 내가 가져온 마차 뒤로 레무트 가문 인장이 새겨진 마차가 보였다.

“나도 동물원에 간다고 했다.”

“허?”

“주요한 업무가 그곳에 생겼을 뿐이다.”

이렇게 말한 아스킨은 나를 멀뚱히 응시했다.

뭐야, 왜 갑자기 동물원에 가는 업무가 생기는데? 그게 가능하긴 해?

‘……설마. 이 여동생 덕후가 여동생 걱정이 지나쳐서 억지로 업무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게 더 신빙성 있겠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사실대로 말할 것 같진 않은데.

그런데 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성격상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을 인간이지. ‘업무’가 있단 건 사실이란 소리군.

하필 오늘 그런 게 생기다니 마차에 올라 당장 목적지를 바꿀까 고민했다.

“……타지 않는 건가?”

“뭐? 마차? 탈 건데.”

뭐야, 손은 왜 내민 거야?

나는 뒤로 물러나 있던 제트에게 눈짓했다.

제트가 성큼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제트의 손을 잡고 올랐다.

내 뒤에 있던 아리아는 어째서인지 제 오빠를 빤히 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바보.’ 아스킨에게 이렇게 말하더니, 아스킨을 두고 제트의 에스코트를 받고서 의자에 올랐다.

나는 그제야 아스킨의 행동을 다시 되새겼다.

뭐야, 손을 내민 게 에스코트하려던 거였어? 대체 왜?

‘허, 뭐야. 여동생이 앞에 있다고 그런 건가.’

여동생 앞에서는 매정하기 싫다는 거야 뭐야.

더욱 기분이 나빠져서 나는 아스킨이 비치는 창문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아리아.”

“저, 언니……!”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외치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아리아, 먼저 얘기해요.”

“아, 아뇨 언니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에요.”

내가 차분하게 고개를 내젓자, 아리아는 잠시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오빠가 제 몸이 걱정되어서 따라오는 것 같아요…….”

아리아의 예상은 내가 예상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별로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처음엔 솔직히…… 빡치긴 했는데.”

“네?”

“아,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나라도 아리아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몸은 약한 여동생이 있다면 민폐가 될 각오하고 따라나설 것 같더라고요.”

물론 내게도 남매가 있고, 윤지훈이나 록시디언이 만약 아리아 같은 처지였다면…… 미안하지만 그랬더라도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여기, 머리로는 이해가 간단 소리예요. 여기로는 딱히 이해가 가지 않네요.”

나는 머리를 툭 두드리고는 다음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아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리아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중요한 건 내가 그 남자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마차가 동물원 입구에 멈춰 서고 문이 열리며 제트가 나와 아리아를 차례대로 에스코트했다.

‘호오, 여기가 동물원이라고?’

마차에서 내릴 즈음 나는 불쾌감은 잠시 잊고 새로운 공간에 관한 호기심을 가졌다.

내리자마자 드넓은 공간이 보였는데 곳곳에 유리 온실 같은 것이 잔뜩 있는 공간이었다.

* * *

평일임에도 동물원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샤를리즈가 등장하가 동물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흘끗흘끗 사람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샤를리즈의 독특한 외향 덕분에 신분을 막론하고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사람들은 그녀가 동행한 대단한 미소녀에게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주었다.

대체 저 엄청난 미모의 소녀는 누구지? 제국 귀족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쑥덕이던 사람들은 곧 새하얀 은색 머리카락에 집중했다.

은색, 이 제국에서 드문 색이었기에 후보는 금방 추려졌다.

“……레무트 공작가에 공녀님이 한 분 계시지 않으셨나요?”

“오,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소.”

“하지만 그분은 몹시도 병약한 분이실 텐데요…….”

그들의 논쟁은 곧 샤를리즈가 타고 온 알츠베이트 마차 뒤로 멈춰 선 마차를 보고서 중단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이 다름 아닌 레무트 공작이었으니까! 절세 미남의 등장에 뭇 영애들이 작게 꺄악, 하고 탄성을 질렀다.

동물원에 먼저 도착했던 모든 이들은 몇 주 전 이 제국을 강타했던 초대형 스캔들 속 두 주인공의 등장에 자신들의 유람도 잊고서 온 신경을 샤를리즈 쪽으로 집중했다.

두 사람은 설마 화해한 것인가? 파혼이 아닌 약혼을 계속 이어 가는 거라고?

그런데 그렇다면 왜…… 마차를 따로 타고 온 것인가!

언제나 이 수도에 새로운 스캔들과 소문을 몰고 다니던 샤를리즈였다.

그녀의 새로운 행보에 사람들은 도파민에 중독된 사람들인 양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서로를 노려보는 것 같죠……?”

“글쎄요. 제 생각에는, 으음.”

사람들이 쑥덕이며 의견을 공유했다.

“레무트 공작님께서는 노려보는 것 같지 않으신데요?”

“나도 같은 의견이오. 오래전 서부 소탕에서 저분을 만나 뵌 적 있지만, 싫어하는 이에겐 가차 없는 분이었거든.”

“아, 맞아요. 저도 예전에 저 두 분을 공식 석상에서 뵌 적 있는데, 그땐 공녀님을 저렇게 쳐다보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윤지후가 빙의하기 전, ‘샤를리즈’가 단 한 번 아스킨을 공식 석상에 억지로 끌고 간 적 있었다.

한 영애는 그때 아스킨이 ‘샤를리즈’를 싸늘하게 쳐다보던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도 제멋대로인 저 악녀 공녀님을 그렇게 쳐다볼 수 있는 남자는 레무트 공작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제 일이 아님에도 이렇게 선명한데, 생생하던 그때를 돌이켜 보면 지금의 아스킨 시선은 거의 나른한 고양이라 할 수 있었다. 확신했다.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한 영애는 자신 있게 외쳤다가 함께 나온 모친에게 입을 가로막혔다.

“얘는, 알츠베이트 공녀님에게 들리면 어떡하려고!”

‘아아, 들린다. 들려…….’

샤를리즈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씹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 그래?

물론 거리가 있어 자세한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더라도 시선이 몰린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실컷 떠드쇼. 떠들고 건드리지나 맙시다.’

건드리면 물어요. 이젠 이판사판 악녀라 뭅니다. 물어요.

샤를리즈는 잠시 우아함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문득 자신 옆에서 초롱초롱하게 동물원을 구경 중인 아리아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아리아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연신 동물원 외관을 살펴보기 바빴다.

아마 여기에 집중한 탓에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언니, 정말로 너무 감사해요.”

“음, 갑자기? 이유라도 말해 주고 인사를 해야죠.”

아리아가 양손을 기도하듯이 겹친 자세로 샤를리즈를 향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눈이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니 덕분에…… 제가 드디어 동물원에 왔어요. 여기에 엄청 귀엽고 희귀한 몬스터들도 있다던데, 저 너무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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