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7/194)

106화

아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식물이었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작고 귀여운 생물이었는데, 어린 시절 우연히 동물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때부터 아리아의 꿈은 동물원에 가는 것이 되었다.

“그런 거라면 나도 감사해야죠. 아리아 덕분에 나도 와 볼 수 있게 되었잖아요?”

물론 윤지후가 빙의하기 전 ‘샤를리즈’는 괴물 개 테리를 여기서 데려왔지만, 윤지후는 시치미를 뚝 뗐다.

뭐, 나는 처음 맞잖아?

샤를리즈와 아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동물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아스킨이 이들을 따라서 느릿하게 걸어갔다.

사람들은 대체 저게 무슨 상황인지 의아해했다.

분명 파혼한 걸로 소문이 난 샤를리즈와 아스킨이 한곳에 나타났는데, 함께 다니지는 않는다?

게다가 샤를리즈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아스킨의 눈은 샤를리즈를 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이 흥미로운 상황에 자신들의 일정조차 잊고 슬금슬금 두 사람을 쫓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편 아리아와 샤를리즈를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원숭이를 닮은 몬스터였다.

우리 안에서 신기하게도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는데, 샤를리즈는 이 몬스터를 빤히 보면서 지구에 있던 한 동물을 떠올렸다.

‘……얘 안경원숭이 닮았다.’

어째 참 묘한 장소에서 지구의 향수를 느낀다 생각하며 픽 웃는 동안, 열심히 먹이를 주고 있던 아리아가 활짝 웃었다.

“언니, 쟤 봐요! 다리 꼬고 앉아서 먹이를 주면 손뼉을 쳐 줘요.”

아리아가 먹이통에서 먹이를 꺼내 던져 주거나 손바닥에 올려 주는 것에 흥미를 가졌는지, 이제는 먹이를 샤를리즈에게 내밀었다.

“언니도 한번 해 보세요. 정말 신기해요!”

“아니, 나는 괜찮……!”

샤를리즈는 먹이 주는 것엔 흥미가 없을뿐더러 조금 끈적해 보이는 열매를 손에 잡기가 싫어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우리 안에 있던 원숭이 같은 몬스터가 휙 다가오더니 일그러진 표정을 한 샤를리즈에게 메롱을 하는 것이었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가 없어 속에서 뭔가가 왈칵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쭈, 이제 이런 원숭이까지 나를 무시하네? 죽을래?

“야, 너 이제 그만 살고 싶어? 니가 철창 안이 지겨웠나 보구나?”

샤를리즈가 씩씩거리며 팔을 걷어붙이고는 원숭이 몬스터와 무려 눈싸움을 시작하자, 지켜보던 아리아는 얼떨떨해하다 말고 곧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놀랍게도 샤를리즈의 눈빛에 제압당한 원숭이가 손을 모아 비비는 시늉을 하자, 아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꺄르르르르,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샤를리즈 또한 일련의 상황이 어이가 없어 큰 소리로 웃었다.

아리아는 웃다 말고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

‘어?’

샤를리즈, 아리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아스킨이 웃고 있었다.

아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찡그렸다가, 다시 크게 뜨기를 반복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아스킨과 아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리아는 뾰족한 시선을 하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오빠, 방금 웃은 거 맞지?’

‘아니다.’

아스킨이 입 모양으로 맞받아치자 아리아는 찡그리더니 아스킨에게 휙 다가갔다.

“웃은 거 맞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난 웃지 않았다.”

“아닌데, 그럼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날이 조금 더운 것 같군.”

아리아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도 샤를리즈에게로 돌아갔다.

샤를리즈는 그 짧은 시간에 정이 든 원숭이 몬스터를 보느라 아리아가 잠깐 자리를 비운 걸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그들 근처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제트만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

아리아가 돌아오자, 샤를리즈는 곧 원숭이 몬스터에게 흥미를 잃고 다음 동물을 향해 갔다.

아스킨은 샤를리즈를 지켜보면서 전과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아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이 이곳에 있는 줄 모르기라도 한 사람처럼 단 한 차례도 시선을 주지 않았으니까.

한참을 구경하던 샤를리즈와 아리아는 딱 봐도 귀족들을 위해 만든 듯한 멋들어진 휴게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에서 소리 없이 따르던 시종과 하녀들이 점심 준비를 위해 가져온 짐들을 일사불란하게 배열하기 시작했다.

“아리아, 배고프죠? 조금만 기다려요. 하녀들이 금방 준비해 줄 거예요.”

“언니, 그럼 안 돼요. 분명 음식 준비와 마차까지만 제공하기로 하셨으니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내 하녀들이 접시와 포크 하나도 놓지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은 오후에 힘내서 보려면 좀 쉬어야 해요.”

접시와 포크를 놓는 걸로 가볍게 실랑이를 벌인 두 사람은 이내 푸흐, 작게 웃어 버렸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예요. 언니 덕분에 이렇게 나올 수 있던 건데, 이것마저 못 하게 하시면 이제 안 올래요……. 너무 죄송한 걸요.”

“끙, 그럼…… 그런데 준비할 수 있어요?”

“당연하죠!”

이렇게 말했지만 샤를리즈는 걱정스러웠다.

아리아가 다른 것도 아닌 음식 세팅을 직접 한다고 하니, 병약하고 곱게 자란 공녀님이 과연 할 수 있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게로 커다란 고기를 짚는 아리아의 가는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들과 시종이 가엾을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샤를리즈가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해도 되겠나?”

누군가 아리아의 집개를 가져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스킨이었다. 샤를리즈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대단하신 레무트 공작님께서 여동생이 너무 걱정되어 그 싫어하는 여자, 그것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여자 뒤꽁무니를 군소리 없이 졸졸 쫓아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

게다가 자신에게 허락씩이나 구하는 남자를 보며 생소함을 느꼈으나, 이도 잠시였다.

그녀는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내 허락이 왜 중요하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할 거 아닌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샤를리즈는 이 또한 자신이 아스킨에게 들었던 말임을 떠올렸다.

우스웠다. 이렇게 반대로 말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스킨은 이런 비아냥을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허락으로 여긴 사람인 양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움직였다.

무려 직접 시중을 시작한 것이다.

‘……허? 아니, 공작이나 되어서 직접 음식 서빙을 하겠다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기세 당당하던 아리아는 막상 준비된 음식 앞에 다가가자 허둥대기 시작했고, 오히려 아스킨에게 부드럽게 밀려났다.

아스킨은 준비된 음식을 보기 좋게 접시 위로 옮겨 담고 있었다.

아리아는 울적해하지 않고 씩씩하게 접시 옮기기를 시도했는데, 음식을 운반하는 아리아가 불안했는지, 옮기는 거 정도는 하녀들이 도와주었다.

어찌 저찌 점심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세팅되었다.

무려 공작 각하께서 세팅한 식탁이었다.

샤를리즈는 어쩐 일인지 음식에 손을 대는 대신에 손수건으로 슬쩍 입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치열한 고민 중이었다.

배가 고프긴 한데, 저 죽음의 원인이 될 원수가 차린 음식을 먹을 것이냐 아니면 자존심 차리고 거절할 것이냐.

“언니?”

그래, 자존심이 밥 먹여 주던가.

이제 자신이 파혼을 심정으로 받아들인 이상 아스킨을 엿 먹일 방법은 넘쳐났고, 적어도 아리아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을 인내는 있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가 좋았지만, 그 감정이 있다고 아스킨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이제 들죠. 얼른 앉아요. 아리아.”

“네, 언니.”

샤를리즈는 아스킨에게는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넌 불청객이니 엿이나 먹든가 말든가 하는 마음이었다.

놀랍게도 아스킨은 남은 자리를 탐내기는커녕 뒤로 물러났다.

마치 시종이나 집사라도 된 듯 그 자리에 서는 모습이 얼떨떨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순간 ‘발닦개’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기분이 오묘해졌다.

샤를리즈 앞에 놓인 접시엔 커다란 샌드위치 하나와 각종 과일과 샐러드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담는 거 정도야 할 수 있지만, 저 인간 마지막 센스가 부족하네.’

“베스, 나이프 좀 줘.”

“언니? 나이프는 어디 쓰시려구요?”

“샌드위치가 너무 커서 조금 잘라 먹으려고요, 아리아도 줄까요?”

아리아는 뜻밖의 소릴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언니, 언니, 이거 봐요.”

아리아는 한 손에 쥔 포크로 샌드위치를 슬쩍 밀었다.

그러자 전혀 잘린 틈이 보이지 않던 샌드위치가 먹기 좋은 크기로 딱 잘려 있었다.

샤를리즈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뭐? 이게 잘렸던 거라고? 내용물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샤를리즈가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언제 잘랐대?”

“으음, 오빠가 아까 잘랐는데, 맘에 드세요?”

샤를리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 또한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샤를리즈는 속으로 황당한 기분과 함께 제국 최고의 검사라더니 칼은 좀 쓰는가 보다 하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제가 큰 음식을 못 먹어서 항상 오빠가 최대한 먹기 좋게 잘라 줬거든요.”

샤를리즈가 묻지는 않았지만, 마침 아주 미세하게는 궁금하던 참이라 아리아에게 적절한 대답이 나온 셈이었다.

“으음, 그리고 오빠가 프레보스트 후작님 아래에 있었을 때는 이런 시중도 다 들었다고 들었어요……. 저도 듣기만 했지만요.”

프레보스트 후작, 샤를리즈는 그 이름을 가만히 떠올렸다.

원작에서 황제에게 충성하는 엄청난 충신이자, 아스킨의 스승이었다.

다만 후에 아스킨이 ‘샤를리즈’를 죽일 때 아스킨의 편을 드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윤지후에게는 달가운 이름은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떨떠름함을 삼켰다.

“……누군지 알아요. 프레보스트 후작. 잔소리가 심한 꼰대였나.”

‘샤를리즈’의 기억 속에서는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겨 어른으로서 훈계를 일삼았던 사람으로, 이 탓에 알츠베이트 공작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손녀를 감히 훈계하는 것이 알츠베이트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샤를리즈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누군가 아리아와 샤를리즈 근처로 다가왔다.

놀랍게도 티팟을 손에 든 아스킨이었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얘가 뭘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프레보스트 후작을 떠올린 순간 ‘샤를리즈’의 본능도 함께 울렁거리며 기분이 좋진 않았던 윤지후는 눈썹을 있는 힘껏 찡그렸다.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

“시키지도 않은 짓을 다 하고. 왜, 내가 또 네 환심을 사겠답시고 여동생을 꼬시는 것 같아 걱정이 돼서 미치겠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아스킨의 대답은 샤를리즈의 비웃음만 커지게 만들었다.

화사하고도 표독스럽게 미소한 샤를리즈가 말했다.

“그러니? 너 그렇게 있으니까 딱 어울린다. 왜, 앞으로 내 발닦개라도 해 보려 그러니?”

지켜보던 이들은 이 말에야말로 아스킨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고고한 공작을 향해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나 무례한 말이었으니까.

아리아마저 긴장한 순간, 아스킨이 놀랍게도 분노 한 점 없이 샤를리즈를 향했다.

“……오늘만큼은.”

샤를리즈의 눈이 커졌다.

이는 잠시였을 뿐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찡그려졌다.

……뭐라는 거야. 이 XX가 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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