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샤를리즈는 잠시 제 귀가 잘못된 건 아닌가 의심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타당한 의심이었다.
지금 저 인간이 그런 말을 했다고 믿는 것보다야, 제 불쌍한 귀가 갑작스럽게 이상이 생겼다는 쪽이 훨씬 신빙성 있었으니까.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인간은 ‘아스킨 레무트’였다.
절대로 ‘샤를리즈’ 손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 말을 실천한 남자.
고고하기 짝이 없고 고결하며 충직한 남자. 올바르고 꺾이지 않는 인간.
그런 인간이 발닦개라는 소리에 ‘오늘만큼은’이라는 정신 나간 답변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샤를리즈는 그간 자신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이게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이젠 가는 귀가 먹었니.”
“……내 대답을 두고 한 말이라면 제대로 들었다.”
애써 외면했더니, 아스킨 레무트가 제 턱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물론 진짜로 잡아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저놈의 대답이 그 정도로 머리채를 붙잡을 답변이었단 소리다.
그리하여 샤를리즈는 정말이지 황당한 표정으로 이 남자를 보고야 말았다.
‘뭐지? 이번엔 신박한 방법으로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려는 건가?’
신빙성 있었다. 매우. 샤를리즈는 저 남자가 어디까지 자신을 꺼려하고 혐오하는지 톡톡히 경험했다.
비록 ‘샤를리즈’를 향한 분노와 혐오였지만 그걸 겪은 이는 샤를리즈의 몸에 빙의한 윤지후 자신이었지 않았나.
자신은 어떻게든 잘해 보려 최선을 다했다!
열정을 소진할 대로 소진해 꺼진 불꽃이 되어 버릴 만큼 말이다.
한편 아스킨이라고 마음이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매우 놀란 상태였다.
평소라면 지극히 화를 내야 마땅한데,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짧은 시간 내에 미친 것이거나 뇌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었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샤를리즈가 귀가 먹었나, 하는 소리를 할 때 정정할 기회가 있었으면서 끝내 그 기회마저 걷어찬 점이었다.
……정말 자신이 미친 건가?
아니면 수년간 성에만 머물던 아리아에게 자신은 해 줄 수 없던 여자아이들만의 세상을 보여 준 것이 이토록 고마웠단 말인가.
레무트 가문이 다른 가문에 비해 은혜를 갚는데 배 이상으로 진심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리라…….
라고 하기에는 역시나 아스킨 자신이 봐도 이상했지만, 슬쩍 외면했다.
“…….”
아스킨이 입을 다물자 테이블이 있는 자리에는 침묵만 돌았다.
샤를리즈는 아무래도 정말 저 인간이 자신을 새로운 방법으로 엿을 먹이는 게 아닐까 의심을 점점 굳혀 가고 있었다.
“더 필요한 건 없나?”
“없어. 너 진짜 발닦…… 아니, 아니 됐어. 필요 없어.”
샤를리즈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주는 건 다 필요 없어.”
기어이 포크를 놓고는 아스킨이 잘라 둔 샌드위치 접시를 스윽 밀어 버렸다.
아스킨은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졌다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샤를리즈는 재수 없게도 아스킨이 찰나 보인 시무룩함을 보고 말았다. 경악했다.
……쟤가 진짜 미쳤나?
샤를리즈는 접시 중에서 누가 봐도 서툴게 담은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서툰 솜씨는 당연히 아리아가 담은 것이었다.
그사이 아스킨은 차가 식은 것 같다며 새로운 차를 가져오겠다며 애써 자리를 피했다.
차를 가져와 따르겠다니 샤를리즈는 3차로 황당했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곧이어 정말로 차가 담긴 다기를 가져온 아스킨은 예법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우아하게 차를 따라 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아무것도, 는 무슨!’
샤를리즈는 모르는 척 아리아에게 음식을 권했다.
차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바빴던 아리아는 샤를리즈가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 정말 알츠베이트 가문은 명성만큼이나 요리사들도 대단한 것 같아요……!”
아리아의 감탄은 응당 나올 수 있는 당연한 감탄이었지만.
샤를리즈는 입술을 톡톡 닦으며 생각지 못한 답변을 던졌다.
“명성이라면 돈만 많다는 거 말하는 건가요?”
“네? 콜록, 언니.”
“에이,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어서 먹어요.”
샤를리즈는 아리아가 서툴게 담은 음식을 자신에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먹었다.
알츠베이트 가문이 까일 땐 돈밖에 없는 가문이라 욕을 먹는 것 잘 알고 있었다.
‘욕을 먹든 진짜 내 가문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샤를리즈는 오히려 더 시원하게 알츠베이트를 깔 자신도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를리즈는 일어나면서 접시를 보다 설마설마했지만, 아스킨이 그릇을 치우는 데 함께하자 또 한 번 경악했다.
……이쯤 되면 자신의 불쾌감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저런단 말이야?
설마, 진짜로 오늘 하루 발닦개라도 되겠단 거야. 뭐야.
음식을 먹은 테이블이 있는 장소 뒤편에는 동물원 관련 상품을 파는 조그마한 가게가 있었다.
마침 이런 경악을 환기할 것이 필요했던 샤를리즈는 얼른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 뒤, 샤를리즈는 무언가를 뒤로 감추며 돌아왔다.
“아리아, 이거 한번 써 봐요.”
그래, 지금 힘들어진 심신에는 귀엽고 예쁜 것이 필요했다.
아리아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샤를리즈가 내민 것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윤지후가 있던 세계에서는 놀이공원에나 있던 동물 귀가 달린 머리띠였다.
물론 모양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이전 세계에 있던 것과 비슷한 것도 있었다.
“이건…… 토끼 귀 아닌가요?”
“네. 저기서 이런 걸 팔더군요. 최근에 수도에 머리띠가 전체적으로 유행한다더니, 여기서는 이런 걸 만들었나 봐요. 원래 이런 곳에 오면 이런 거 하나쯤 써 줘야 하는 거라구요?”
샤를리즈가 뻔뻔하게 우기자 순진한 아리아는 그렇구나 열심히 끄덕이며 머리띠를 썼다.
‘……조상 중에 토끼 혈통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아리아의 순한 외모 때문인지,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물론 저건 귀족들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보통 놀이동산에서 파는 것과 다르게 레이스와 진짜 보석이 촘촘히 박히고 특히나 보석은 주렁주렁 달린 수준이었다.
몹시도 화려했고 그만큼 비쌌다.
샤를리즈는 정말이지,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비주얼이라 생각했다.
‘와, 드라마에서 재벌 남자주인공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쇼, 외치는 게 어떤 기분으로 말하는 건지 알 것 같네…….’
샤를리즈는 오늘에야말로 제 돈이 매우 가치 있는 곳에 쓰였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는 한 손을 척 턱 밑에 얹고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였다.
후, 아리아, 이런 건 백 개, 아니 천 개쯤 사 줄 수 있어……!
샤를리즈가 누가 바늘로 콕 찌르기라도 하면 마음속으로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시끄러운 생각을 할 때였다.
아리아가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채로 샤를리즈 근처를 기웃거렸다.
“언니, 이건 다 뭐예요? 우와, 다른 것도 있군요?”
아리아는 샤를리즈의 손에서 다른 머리띠들도 발견했다.
하나 빼고 전부 토끼 머리띠였는데, 색상이 각기 달랐다. 분홍색, 하늘색, 심지어 검은색도 있었다.
“언니는 제가 씌워 드려도 될까요?”
아리아의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했다.
샤를리즈는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이거요? 이건 내가 할 게 아니라…….”
“언니는 안 하시나요……?”
“…….”
“…….”
“……어느 걸로 할지 골라 줄래요?”
그래, 이런 걸 한다고 샤를리즈의 이미지가 쉽게 무너지겠냐만은, 사실 샤를리즈는 이제 ‘공녀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이미지가 위신을 잃고 위엄도 잃어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나락으로 가더라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오빠, 오빠도 하나 해!”
“……내가 그걸 왜?”
아리아는 기어이 희생양을 하나 늘렸다.
아리아가 골라 준 머리띠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샤를리즈는 당황 반, 어리둥절함이 반쯤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오빠는 아까 음, 으음…… 공녀님의 발닦개……가 되겠다고 스스로 선언했잖아?”
“그것이 이것과 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왜 관계가 없어? 공녀님께서 머리띠를 이런 개수로 사 오신 이유가 뭐겠어. 오빠 거도 있는 거잖아.”
공교롭게도 샤를리즈가 사 온 머리띠는 네 개였다.
샤를리즈로서는 아리아에게 여러 개를 씌워 볼 생각으로 사 온 것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렇다고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다.
오히려 아니라고 하면 아스킨 저놈의 편을 들어주는 격이니 말하기가 싫어졌다.
샤를리즈가 방관하는 사이 아리아가 머리띠를 하나 집어 들어 기어이 아스킨에게 내밀었다.
아리아를 위해 사 온 머리띠가 저쪽으로 넘어간 게 불쾌한 한편, 전에 없던 곤욕스러운 표정을 몇 번이고 본다는 것에 샤를리즈는 작은 쾌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