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쌓인 게 많긴 했지. 어차피 망한 인생, 저놈이 X되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이런 곳에서 실현될 줄은 몰랐지만, 샤를리즈는 거기까지만 관심을 둔 뒤에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 나는 고양이 귀로 해 줘요. 아리아랑 다른 걸로 할래요.”
“앗, 언니는 분홍색이 어울릴 것 같았는데…….”
“토끼는 아리아를 보는 걸로 만족할 것 같네요.”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손에 들린 것 중 유일하게 다른 동물인 검은 고양이 귀를 가져와서 썼다.
아리아가 감탄했다.
“언니, 진짜 너무 예뻐요……. 언니는 정말 뭘 해도 다 어울리시는구나.”
샤를리즈는 그 말에 후후 웃으며 아리아에게 팔짱을 꼈다.
그렇게 이동하려는데, 흘끗 우연히 본 시야에 회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를 토끼 귀 머리띠를 손에 들고만 있는 아스킨의 모습이 보였다.
제아무리 아리아의 말이라고는 하나 차마 쓰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쓰라고 하면 쓰려나?’
오늘만큼은 발닦개라고 했으니까?
샤를리즈는 이렇게 생각하며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없지.
한편으로 토끼 귀가 영 안 어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저렇게 들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어울리겠구나 싶기는 했다.
참고로 순전히 외모에 대한 평가다.
저쪽은 냉정하고 융통성 없는 토끼겠지.
샤를리즈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윤지후인 자신은 책 속 ‘아스킨 레무트’를 많이 좋아하고 아꼈다.
왜 얘는 주인공의 어장에 끼워 주지 않느냐고 댓글창에서 울부짖는 독자들 사이에 자신도 끼어 있었다. 인정한다.
그렇기에 지난 시간을 보면 윤지후로서 아스킨에게 더욱 인정받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책 속 내용에서 참 가여운 사람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것을 여자 하나 때문에 잃는 사람이었다.
동정했고 애정했다.
지나고 보니 그게 생각보다 큰 애정이었음을 윤지후는 늦게서야 깨달은 것뿐.
‘목숨이 달렸던 것도 있었지만…….’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나는 활자 속에서 너를 많이 좋아했었다고. 샤를리즈는 이런 제 마음을 비웃었다.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람.
샤를리즈는 아리아와 함께 동물 머리띠를 두르고 동물원 곳곳을 구경했다.
지나가던 이들, 혹은 처음부터 샤를리즈를 구경하던 이들은 샤를리즈의 머리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다 두 미녀의 뒤를 따르는 아스킨의 모습과 그의 손에 들린 앙증맞은 토끼 귀 머리띠를 보고서 2차로 흠칫했다.
……도대체 이 동물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샤를리즈는 돌아다닐수록 날뛰던 제 사나운 심정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윤지후로서도 처음 보는 몬스터, 그것도 지구에서의 동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몬스터들의 모습에 신기했다.
샤를리즈의 몸으로 눈 뜬 뒤로 처음으로 목숨과 상관없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죽기 전에 지구에 없던 신기하고 희귀한 몬스터들도 보고 죽네. 좋네, 좋아.’
샤를리즈가 속으로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매우 즐거웠다.
아마도 옆에서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아리아 덕분이 클 것이다.
순진한 사람은 때로 세상 물정 모르고 현실감이 없다는 소릴 듣곤 하지만 반대로 샤를리즈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은 아리아 같은 사람이 반가웠다.
“헉, 언니 저기는 특이한 몬스터가 있대요.”
“그래요?”
두 사람은 웬만한 곳은 둘러보고서 다음 구역으로 향했다.
이번에 향한 곳은 고유 특성이 있는 몬스터들의 우리가 있는 곳으로, 입장 시 조금 더 주의를 해 달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샤를리즈는 귀족도 다니는 곳이니 어련히 안전장치를 마련해 뒀겠거니 생각하며 무심히 표지판을 흘려 읽었다.
하지만 이를 간과한 대가일까.
10분 뒤, 샤를리즈는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꺄아아악!”
“고개 숙여!”
샤를리즈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숙이면서 잡고 있던 아리아의 팔을 끌어당겨 함께 바닥으로 쪼그려 앉았다.
그 과정에서 아리아가 힘없이 자신 쪽으로 넘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옳은 행동이었다.
샤를리즈와 아리아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휙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박쥐?!’
박쥐처럼 생긴 생물이었다.
아니, 박쥐라기엔 크기가 꽤 컸고 귀는 고양이 귀처럼 세모꼴에다가 발톱은 보통의 박쥐보다 더욱 크고 단단했다.
얼굴은 퍽 귀엽게 생겼지만 내는 소리는 평범하지 않았다.
키에에엑,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에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제 귀를 꽉 막았다.
‘으윽, 몸이 안 움직여…….’
대체 저건 어떻게 우리를 깨고 빠져나온 걸까? 이 생각을 하는 동시에 몬스터가 샤를리즈를 노리고 날아왔다.
샤를리즈가 몬스터의 찢어지는 비명으로 인해 꼼짝없이 몬스터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순간 자신의 몸이 휙 기우뚱 움직였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샤를리즈는 단단한 것에 휩싸인 채 눈을 가늘게 좁혔다.
“불쾌하겠지만 움직이지 마라. ”
날아든 몬스터를 막은 건 아스킨이었다.
샤를리즈는 생경한 감정이 들었다. 응당 당연한 감정이었다.
어찌됐든 이 상황에서 이 남자는 아리아 하나만을 신경 쓸 것이었으니까.
샤를리즈가 죽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저건…… 독이 있어.”
“독?”
샤를리즈가 서둘러 품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꾹 눌렀다.
그 탓에 샤를리즈는 안긴 채로 천천히 시선만 들어 올렸다.
단단한 턱선, 신중하게 찌푸려진 얼굴이 보였다.
“언니, 언니 괜찮으세요?”
“아…… 난 괜찮아요.”
다행스럽게도 아리아는 어떤 부상도 없는지 샤를리즈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그 손이 달달 떨리고는 있었지만 제법 다부진 눈이었다.
그 얼굴에서 신기하게도 아스킨의 늘 진중하던 눈이 겹쳐 보였다.
샤를리즈는 눈만 굴려 앞을 응시했다.
몇 없는 귀족 손님들이 벌벌 떠는 모습이 보였다.
개중 한 사람의 손에 왜인지 막대기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자극하면 절대 안 된다고 표지판에 쓰여 있었건만, 저들이 저놈들이 싫어하는 소리를 낸 거다.”
빙글 돌아가던 샤를리즈의 눈이 제트를 발견했다.
몬스터는 총 두 마리, 제트는 다른 한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꽤 유능한 기사를 뒀군.”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그 목소리가 그대로 둥둥 울렸다.
“네가 말한 유능한 짐꾼이 저 남자인가? 네 기사?”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아리아, 듣고 있자니 혹시 발닦, 아니. 짐꾼이 필요한 것 같은데 맞아요?”
“마침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자가 딱 있어요.”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했던 말이 샤를리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쁜 사람은 일하라고 하죠. 뭐, 내가 사람이 없겠어요?”
분명 샤를리즈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트가 상대하는 몬스터는 집요하게 비명을 지르며 제트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저쪽 몬스터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인 듯했다.
반면에 아스킨이 상대하는 몬스터는 비교적 신중한 상태로 보였다.
처음을 제외하고는 찍, 찍찍 쥐와 같은 소리를 내며 탐색하기 바빴다.
“곧 이곳의 관리자들이 달려올 거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샤를리즈가 불쾌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이 상황이 당연히 유쾌할 리 없었다.
곧 달려올 이곳의 관리 인원들은 피해를 본 손님, 그것도 귀족들 사이에 알츠베이트 공녀가 있다면 심각하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테지만, 그것까진 샤를리즈가 알 바가 아니었다.
“기절시켜 놓는 것이 좋겠군.”
“너……, 저거 잘 알아?”
샤를리즈는 자신을 빠져나가는 손의 옷자락을 붙잡고서 아차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인간이 뒈져도 문제라고.’
아스킨과 사이를 돌리고 싶어서? 그건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고. 포기도 했고 체념도 했다.
그렇지만 아스킨이 여기서 죽기라도 한다면 아리아는 누가 책임져?
“독이 있다며.”
샤를리즈가 심각하게 말하자, 아스킨은 빤히 보더니 고개를 살짝 돌렸다.
착각이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본 표정에서 미소를 본 것도 같았다.
“이렇게 피한 거 보면 너도 대책이 없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내가 피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었다.”
아스킨은 이렇게 대답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샤를리즈의 손 위에 올렸다.
조심스럽게 올리는 것이 무엇인가 싶었더니 토끼 귀 머리띠였다.
“뭐야, 이걸 왜 날 줘?”
“네가 줬지 않은가. 그럼,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되겠지.”
샤를리즈가 황당하게 머리띠를 응시하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
‘샤를리즈’의 기억 속에는 아스킨에게 준 선물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도 수십 번이었다.
아니, 셀 수 없었다.
아스킨은 샤를리즈를 보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오늘은 ……라며.”
“뭐?”
“네 맘대로 나를 쓰라고 했다.”
아스킨이 제 입술을 가리며 말했다. 아주 조그맣게 겨우 들릴 듯한 소리로 함께.
“……발닦개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