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10/194)

109화

샤를리즈는 더없이 황당함을 느꼈다. 미묘한 기분도 함께였다.

저 고결한 인간 입에서 ‘발닦개’라는 말이 직접 나오니 이런 기분이 들 수밖에.

정작 샤를리즈는 아스킨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착각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물든 귀를 본 것도 같아 더욱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이 수치스럽다면 왜 꺼내는 건데?

여기서 희망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이미 더없이 짧은 시간에 무수한 절망을 맛본 뒤였다. 더는 농락당하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놈.’

그저 찡그린 채 아스킨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손에 들린 검은 토끼 귀 머리띠를 손에 꽉 쥐지도 놓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잡은 채로.

상황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아스킨이 자신이 물러난 것은 샤를리즈와 아리아 보호 때문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는 듯 순식간에 기절시켜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제트 또한 날뛰던 몬스터를 기절시켰다.

잔뜩 흥분한 상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실력이었다.

아스킨은 이 탓에 제트를 눈여겨보았다.

본디 몬스터란 죽이는 것보다 생포 혹은 기절시키기가 더 어려운 법이었다.

저자는 신기하게도 몬스터에 익숙한 기사처럼 움직였다.

보통 저런 움직임은 토벌이 잦은 국경 기사단이거나 혹은 제국민을 위해 토벌 봉사를 자주 하는 성기사단에게서 볼 수 있었다.

아스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냉정한 시선으로 의문이 잠시 어렸다.

‘……어째서 공녀의 호위 기사가 성기사단 특유의 검술을 구사하는 것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녀님!”

동물원의 관리자는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나타났다.

일어난 일의 경중을 생각하면 늦은 편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있는 피해자 중 샤를리즈를 보고 그녀가 예상했듯 기절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본 순간, 자신의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상상을 하는 이도 있었고, 가족을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관리 인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샤를리즈는 심드렁한 얼굴로 관리자들을 응시했다.

사실 진짜 ‘샤를리즈’라면 감히 자신을 놀라게 만든 이곳을 향해 분노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 동물원을 뒤집어 놓을 일이었으나, 샤를리즈의 탈을 쓴 윤지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결국은 다치거나 위험하지는 않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였지만.

샤를리즈에겐 그 결과가 중요했다.

‘물론 내가 다쳤거나…… 나아가 아리아가 다쳤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테지만.’

전자는 알츠베이트 가문이 알아서 생난리를 칠 터였고, 후자는 샤를리즈 자신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샤를리즈’의 본성을 제대로 써먹을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아마 아리아의 오빠인 아스킨부터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두 공작가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을 결과를 피한 셈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샤를리즈가 곧 불같이 화를 내며 소문과 같은 표독스럽고 악독한 패악을 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만 한정해서는 정당한 분노이기도 했다.

“됐어.”

샤를리즈가 까딱 손을 흔들었다.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샤를리즈를 응시했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던 관리자들조차 고개를 들어 올릴 정도였다.

샤를리즈는 이렇게 시선들이 몰린 게 더 성가시다는 듯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됐다고, 꺼져.”

가장 선두에 있던 관리자가 뻐끔 입을 열려 했다. 그보다 샤를리즈가 더 빨랐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이번엔 책임을 묻길 바란다는 소리로 알아듣겠다.”

“아, 아닙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구경하던 이들이 상황도 잊고 술렁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 샤를리즈가 제게 해악을 끼친 존재를 살려 두다니?

심지어 그냥 두다니? 관리자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펴고 도망갈 준비를 했다.

‘이, 이래 놓고서 도망가던 중에 부를지도 몰라. 소문처럼 다리를 자를지도…….’

‘진짜로 손발을 자른 경우도 있다고 했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서도 관리자들이 얼른 일어나는 동안 샤를리즈는 딱히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였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양 행동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앞을 살짝 가로막았다.

“정말 이대로 저들을 보낼 건가?”

샤를리즈가 찌푸렸다. 얜 또 왜 이래?

“하마터면 네 신상에 해를 끼치게 만든 주범들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주범은 경고를 어기고 저 몬스터가 탈출할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낸 놈들 아닌가?”

그 말에 옆에서 죄인처럼 서 있던 남자들이 움찔했다.

몬스터를 탈출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관리가 소홀한 것도 징계받을 일이다.”

“그럼 그 징계, 네가 주든가. 난 상관없으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목숨이 위험할 뻔한 건 너였어.”

이 말에는 샤를리즈도 발끈하고 말았다.

목숨? 모옥수움? 지금 누구 때문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막살고 있는 건데!

“내 목숨이지 네 목숨이야? 성가시니까 좀 꺼져.”

“…….”

샤를리즈는 짜증을 내다 말고 아주 잠깐 멈칫했다.

‘뭐야, 왜 이런 표정인 건데?’

샤를리즈는 곧 제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리아를 보고 알았다.

아, 이거 자기 여동생을 위험하게 만든 자들인데 내가 그냥 보내서 자기가 나설 차례가 없어졌다 이건가?

생각해 보니 좀 이해가 됐다. 샤를리즈만 피해자가 아니었다.

샤를리즈가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아리아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지 않았던가.

……너무 별생각 없이 보낸 건가. 샤를리즈는 아주 살짝 반성했다.

1, 2, 3. 반성 끝.

“아리아, 괜찮아요?”

“네? 네. 네. 전 괜찮아요! 저야말로 아까……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아니에요.”

“아뇨, 정말로 멋지셨어요. 막 저를 붙잡고 이렇게……! 이렇게!”

“……아리아 그만둬요, 내가 언제 그렇게 굴렀어요?”

“제가 보는 소설 속 남자주인공 같았어요!”

남자주인공은 우리 오빠가 남자주인공이지. 그 망할 폭군 오빠 말이지.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과장된 자세에 어설픈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그녀를 만류했다.

아리아가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고, 샤를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아리아도 피해를 입었는데, 관리자들을 그냥 보내 버렸네요.”

이미 관리자들은 꽁지 빠지게 도망간 지 오래였다.

샤를리즈가 입맛을 다셨다.

“아니에요, 언니 말처럼 저 사람들 잘못도 아니고…… 저라도 그냥 보냈을 것 같아요.”

사람에게 모진 소리는 못하겠다며 배시시 웃는 아리아를 보고 있으려니 샤를리즈는 역시 한마디를 해야 했나. 다시 한번 반성했다.

이렇게 착하니, 주변에서 대신 뭐라고 해 줘야 할 것인데 아스킨이 나설 차례를 막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게다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명확하기까지. 옳지, 옳지 잘한다, 우리 눈 토끼.

샤를리즈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샤를리즈는 이 사태를 만든 주범까지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지만 우리 귀여운 아리아가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냥 두진 않기로 했다.

샤를리즈는 손을 까딱여 제트를 불렀다.

“제트.”

“예, 공녀님.”

샤를리즈는 그저 까딱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뿐인데, 다가온 제트가 몹시도 정중하게 샤를리즈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춤을 남겼다.

샤를리즈는 말하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엄마야, 얘 왜이래?

그러나 잘못된 행동은 아니었다.

기사가 보통 레이디에게 행하는 인사였고, 지금까지는 하지 않았을 뿐이다.

샤를리즈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정중하고도 단정하며 어찌 보면 고귀하게 보이는 제트의 자태를 다시 한번 신기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아스킨의 시선이 살짝 뾰족하고도 차가워지는 것을 모른 채로.

“……저기, 이번 사건의 주범들. 붙잡아 두든 묶어 두든. 알아서 처리해. 아니면 신상이라도 알아 놔.”

“예, 공녀님. 명을 따릅니다.”

샤를리즈가 허리를 숙여 한쪽 무릎을 꿇은 제트에게 귓속말했고, 제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제트가 곧 주범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뭐라고 했길래 사색이 돼서 제트를 쫓아가는 거지? 내 이름을 팔았나?’

샤를리즈는 신기해하면서도 다시 아리아를 향했다.

“으음, 아리아 이제 어떡할래요? 아직 한 구역이 남아 있긴 한데…… 돌아갈래요?”

두 사람은 대부분의 구역을 돌았고, 한 구역만 남긴 차에 이런 일이 발생한 참이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가 많이 놀랐을 테니 돌아가는 쪽을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리아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눈치를 보는 것이, 아직 여기 더 있고 싶은 듯했다.

“더 있을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안 될 거 뭐 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샤를리즈도 아쉬운 참이었다.

아무래도 다치지 않았다 보니 조금 전의 해프닝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말이다.

두 사람은 희희낙락하며 나머지 구역까지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막 이 우리 앞을 떠나려 하는데, 아스킨이 돌연 샤를리즈에게 다가왔다.

“……그거, 다시 줄 수 있나?”

그거? 샤를리즈의 눈이 자연스럽게 아스킨의 시선을 좇았다.

제 손이었다. 정확하게는 제 손에 들린 토끼 귀 머리띠.

‘이걸 다시 달라고?’

이걸 왜? 샤를리즈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 인간이 이상한 곳에 눈을 떴나.

“너한테 필요 없는 거잖아.”

“네가 줬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