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1/194)

110화

허?

샤를리즈는 머리띠와 아스킨을 번갈아 보더니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놀랍게도 아스킨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바닥에 닿기 전에 머리띠를 잡았다.

“설마하니, 너 정말로 아까 한 말을 지키려고 하기라도 하는 거니?”

“오늘만큼은 네 말을 듣기로 했으니…….”

샤를리즈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모습에서 숨기지 못한 날카로운 분노가 느껴졌다.

옆에 있던 아리아는 샤를리즈를 쫓아가는 대신 자신의 오빠를 빤히 쳐다봤다.

“오빠, 그런 식으로 굴면 평생 연애 못할 거야.”

“……뭐?”

아스킨이 황당한 얼굴을 하자, 아리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로맨스 소설에서 그랬어. 솔직하지 못한 남자는 책이 끝날 때까지 서브 남주였다고.”

아리아는 찡그리다가 한마디를 더 남겼다.

“오빠는 바보야. 자기 마음도 모르는.”

아리아는 그 말과 함께 한 발짝 늦게 샤를리즈를 쫓아갔다.

아스킨만이 멍한 얼굴로 제 여동생의 뒷모습과 손에 쥔 머리띠를 볼 뿐이었다.

한참을.

* * *

샤를리즈는 아리아와 마지막 구역을 돌면서 다시 한번 지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희귀한 몬스터들을 보느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구역의 중앙까지 갔을 무렵,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여 있는 이들은 시끄럽게 웅성거리기까지 했다.

‘뭐지? 신기한 몬스터가 저기 있나? 저기로 가 볼까?’

어차피 마지막 구역이겠다, 체력도 남았겠다, 꼼꼼히 돌아볼 생각이었다.

샤를리즈가 눈을 돌려 웅성거리는 곳을 자세히 보았을 때였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우뚝 솟은 깃발을 보고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어서 샤를리즈의 얼굴로 경악이 스쳤다.

그녀가 본 깃발은 다름 아닌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대체 황실이 여긴 왜?’

아니, 이런 동물원에 저 깃발이 웬 말이란 말인가.

그러나 꽤나 많은 기사들이 도열해서 걸어오고 있었고 곧 샤를리즈는 그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노아였다.

노아가 보이는 걸로 봐서는 당연히 폭군 오빠, 그놈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샤를리즈는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왜 여기서 저 깃발을 봐야 돼? 왜!’

충격은 잠시였다. 샤를리즈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첫 번째로 황실에서 특히나 황제가 여기까지 볼일이 있는 경우.

두 번째로…… 황실의 감시자가 알츠베이트 저택에 있다. 이건 이미 알고 있으니 그 밀고자가 그녀가 여기 온 걸 알린 경우.

어느 쪽이든 피곤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리아, 저기 뒤쪽에 벤치 보이죠?”

“네. 언니 피곤하세요?”

“아뇨.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음, 그러니까…… 잠시 저기 앉아 있을래요?”

샤를리즈는 뒤를 흘끗 보았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 뒤에 인상 쓴 토끼도 데리고요.”

떨떠름하게 덧붙인 그 말에 뒤에서 듣고 있던 아스킨은 살짝 당황했다.

인상 쓴 토끼? 설마 자신을 말한 것인가?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아리아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샤를리즈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샤를리즈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아스킨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피곤한 거라면 돌아가면 되지 않은가.”

“안 피곤하다고. 저기 깃발 안 보여? 황제가 왔잖아.”

샤를리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본 아스킨은 속으로 놀랐다.

정말 황실의 깃발이었다. 그것도 무려 황제가 직접 행차했을 때만 들어 올리는 깃발.

아니, 저 깃발을 어째서 지금에서야 발견한 건지, 놀라는 한편 그는 속으로 답을 알고 있었다.

줄곧 샤를리즈의 뒷모습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아스킨은 자신의 의복을 점검했다.

“너 뭐 하는 거야?”

“벤치로 갈 게 아니라, 가서 예를 올려야겠지.”

샤를리즈는 이 앞뒤 꽉 막힌 아스킨의 멱살을 콱 잡았다.

그대로 잡아당기자, 아스킨은 놀랍게도 순순히 딸려 왔다.

중간에 제 손을 불쾌하다고 쳐내거나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오히려 얼떨떨하고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뭐야, 이 표정은? 이 표정도 나름대로……. 아니, 감상할 때가 아니지!’

샤를리즈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예의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아리아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기 가서 꼼짝 말고 앉아 있어.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까.”

“대체 무슨 말…….”

“너, 몰라? 이 멍청아. 황제의 손바닥인 수도에서 날 걷어찬 건 너라고. 내 오빠가 널 그냥 둘 것 같아?”

“…….”

“네가 지극한 충신인 거 모르는 거 아냐. 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어.”

“……날 생각해 준 거라고?”

샤를리즈가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스킨은 샤를리즈에게서 넘어오는 연하고도 부드러운 향기에 덩달아 눈을 찡그렸다.

“그래. 나도 네가 예뻐서 이러는 거 아니야, 아리아가 충격받을까 봐 이러는 거니까 빨리 좀 꺼져 줄래?”

샤를리즈가 멱살을 놓았다.

저놈의 옷이 구겨지거나 말거나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남자의 등짝을 돌려세워서 밀어 버리고는 얼떨떨해하는 아리아도 아스킨 옆에 붙여 버렸다.

‘아, 진짜 저놈의 폭군 오빠는 도움이 안 돼, 도움이.’

모처럼 쉬는 날인데 이렇게 마주칠 건 무엇이란 말인가.

우연이어도 싫고 고의라면 머리털을 아주 쥐어뜯어 버릴 테다.

샤를리즈가 아스킨에게 한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연회에서 아스킨에게 술을 마셔 보라는 둥 시비를 걸어 대던 모습을 떠올리면 여기서 폭군이 아스킨을 보았다간 분명 또 시비를 걸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번엔 시비 수준이 아닐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리아가 옆에 있다.

샤를리즈는 제트와 하녀들을 이끌고 깃발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황제 일행 주변으로 사람이 몰려 있었지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샤를리즈를 먼저 알아본 사람들이 이크, 하며 홍해처럼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샤를리즈를 먼저 발견한 노아가 록시디언에게 그녀의 등장을 알렸다.

이에 한창 구경 중이던 록시디언이 고개를 돌리며 씩 시원하게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샤를리즈.”

“오라버니.”

샤를리즈는 화사하게 웃으며 응수했다.

그러고는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어서는 록시디언의 옷매를 털어 주는 척 눈을 더욱 깊이 휘었다.

“뭐야, 나 따라다니는 거야? 죽어 볼래?”

어딘가 단단히 어긋난 듯 사나운 목소리에 제 아무리 록시디언이지만 아주 잠시 움찔했다.

지금 마주한 여동생의 눈은 수틀리면 다 뒤집어엎어 버리겠다는, 패악 직전의 표정이었다.

“내가 널 왜 따라다니냐? 난 여기 자주 오는데.”

샤를리즈가 도끼눈을 뜨며 제 목에 언제나 걸려 있는 목걸이를 쓰다듬자, 록시디언이 서둘러 답변했다.

“오빠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말이 안 될 건 뭐냐?”

“허, 진짜든 아니든 오려면 좀 조용히 오든가. 기사들까지 다 대동해서 이렇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야 해?”

“저어, 공녀님 정말 실례합니다만, 이곳은 황실이 직접 관리하는 동물원…….”

“노아 경, 경은 좀 빠져 있어. 아니다. 노아?”

이름을 부르며 샤를리즈가 홱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나 여기 있다고 알렸지?”

샤를리즈가 ‘찾았다 범인!’ 하는 표정으로 음산하게 쳐다보자, 노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공녀님이 여기 계신 줄 추호도 몰랐습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여행 가기 전에 보았던 폭군보다 더 폭군 같던 악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샤를리즈가 노아의 멱살을 잡기 위해 다가가자 노아는 재빨리 자신의 주군 뒤로 숨었다.

그러나 샤를리즈의 분노 타깃이 되고 싶지 않은 록시디언은 잽싸게 자신의 충성스러운 보좌관을 제물로 바쳤다.

“야, 여기 있다. 얘 필요하지? 얘.”

“공녀님, 저는 진짜 억울합니다!”

“웃기지 마. 내가 여기 있는 줄 몰랐다고 해도 오빠랑 동물원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경이 말렸어야지!”

‘대체 제가 어떻게 말입니까!’

노아는 억울했지만, 차마 샤를리즈의 행동에 제지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멱살을 쥐고 흔드는 정도라니, 뺨이나 기사를 시켜 해코지라도 시키던 때에 비하면 거의 귀엽다고 할 수 있을 응징이었다.

노아는 샤를리즈에게서 느껴지는 연하고 부드러운 향기에 귀 끝이 빨개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아의 멱살을 잡고 한참을 흔들던 샤를리즈는 록시디언을 향했다.

여동생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낀 록시디언은 경고를 보냈다.

“야, 너 내 몸에 손대면, 황제시해죄로 바로 사형이야.”

“사형? 잘됐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죽을 마당에 좀 더 일찍 죽는 게 무슨 대수라고.

샤를리즈가 픽 웃으며 손을 뻗었다.

“야야, 쟤 막아. 빨리 막아!”

록시디언이 뒤로 물러나며 명령하자, 황실 기사들은 쭈뼛쭈뼛 나서기는 했지만, 샤를리즈의 악명을 아는지라 누구 하나 그녀를 쉬이 손대지 못했다.

샤를리즈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곳의 우리 속 몬스터들이 받아야 할 관심이 모두 자신과 폭군 오빠를 향한 것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쪽팔리니까 저기로 가서 얘기해.”

록시디언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한 건지, 아니면 이쪽이 더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한 건지 순순히 샤를리즈의 뒤를 따랐다.

짓궂게 싱글 웃고 있던 얼굴이 단 한 순간 얼음처럼 서늘해지며 한곳을 곁눈질했다.

자신의 여동생 몰래.

한편 샤를리즈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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