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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2/194)

111화

* * *

‘후, 혹시나 아리아랑 아스킨 그놈을 봤으면 어쩌나 했는데, 못 본 거 같네.’

폭군 오빠 이놈을 여기서 만난 건 썩 달갑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을 막았다는 점에 안심이 되었다.

그냥 즐겁게 놀러 온 것뿐인데, 무슨 우여곡절이 이렇게 많은지.

나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춘 곳은 동물원 메인 광장 옆으로 난 오솔길 쪽이었다.

비교적 한산하고 한적했기에 더는 보는 눈도 없었다.

멈추는 동시에 록시디언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야, 언제까지 걸을 거냐.”

“더는 안 걸을 거야. 근데 오빠 진짜 여긴 왜 온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인간은 여기 올 이유가 없었다.

걸을수록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온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네가 여긴 웬일인데?”

“나야 뭐…… 집에 있는 테리가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친구 하나 구해 줄 겸 온 건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테리의 친구를 몬스터로 구해 줄 생각 대신 내가 더 자주 찾아갈 생각이라는 점이 조금 사실과 다를 뿐.

“허. 그런 거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냐?”

“오빠한테 말을 하면?”

“성격이 딱 너 같은 몬스터 한 마리 구해 줬을 건데!”

록시디언은 스스로의 농담에 감탄한 듯 낄낄 웃어젖혔다.

나는 그사이 노아 쪽을 보았다. 손을 내저었다.

눈치 빠른 노아는 주변에 있던 호위 기사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내 일행인 제트에게도 눈짓하자 제트가 내 하녀들을 데리고 노아가 했듯이 물러났다.

그렇게 이 길에는 나와 이 폭군 오빠만 남았다.

게다가 웃어젖히기 바쁜 이 인간은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가까이 다가온 나를 보고서야 흠칫 놀라며 웃음을 멈췄다.

“나는 이미 기회를 줬어. 오빠.”

내가 화사하게 웃자, 놈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야, 야, 너 손에 쥔 거 안 놔? 놔! 놓으라고.”

내가 목걸이를 손에 쥔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싫은데? 이제 좀 다정한 오빠한테 물어봐야겠어.”

“야!”

“엄마도 그걸 바라실 거야.”

자연스럽게 나온 ‘엄마’ 소리에 록시디언이 잠시 멈칫했다.

록시디언의 눈동자가 한순간이지만 실 끊어진 인형처럼 초점을 잃었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린 록시디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다정하게 웃었다.

나와 같은 붉은색이었던 록시디언의 눈은 짐승의 것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목걸이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다는 증거였다.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이 오빠에게 뭐가 그리 궁금했어?”

참으로 오랜만에 본 맛이 간 록시디언 버전이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결과임에도,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는 이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특히나 저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이.

“……저, 오빠?”

“응. 내 예쁜 여동생.”

“…….”

……솔직히 말하면 후회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사납고 거칠기 짝이 없는 얼굴에서 저런 다정한 미소라니, 두드러기가 일어날 것 같다!

‘안 되겠어. 용건을 빠르게 해치우자.’

“빨리 말해 줘. 여긴 왜 온 거야?”

“으음, 샤를리즈. 어떤 대답을 원한 건지 모르겠지만…… 오빠는 여기 진짜 자주 오는걸.”

폭군에게서 귀공자가 할 법한 말투가 나오니 정말 안 어울린다.

나는 이런 모습이 되어서도 거짓말을 하는 록시디언의 모습에 기가 찼다.

“허튼 소리하지 말고 사실을 말해.”

그러자 록시디언은 곤란한 듯 굵은 눈썹을 느슨하게 내리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렇게 하면 록시디언의 입에서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는 답이 나올 줄 알았다.

이를테면 정말 나를 쫓아왔다거나, 아스킨도 따라온 줄 알고 훼방을 놓으려고 했다거나…….

“어릴 때 너랑 꼭 여기 오고 싶었는데, 그 망할 영감 때문에 못 왔었거든. 나는, 그게 참 아쉬웠어. 샤를.”

“……뭐?”

나는 멈칫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으나, 곧 이해했다.

망할 영감이라면…… 설마, 알츠베이트 공작인가?

내가 뻐끔뻐끔 입을 달싹이는 사이, 록시디언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땐 그 영감이 너무 거대해 보여서, 너랑 동물원 가겠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나를 마주하는 눈은 붉디붉은색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시 봐도 똑같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붉은 눈동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록시디언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이놈이 원래 정신으로 돌아와서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이놈 말과 행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진지함이라곤 단 1퍼센트도 없는 인간, 내가 엿돼 보길 바라는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윤지훈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라 이거지.

나는 한편으로는 내가 기어이 금지어를 외치며 목걸이를 썼는데도 화조차 내지 않는 폭군 오빠를 보며 찝찝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얘 왜 이래?

내가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음에도 록시디언은 담담히 나를 보았다.

아니, 분명 록시디언이 맞건만 진지한 낯짝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록시디언은 그대로 내게 말을 전했다.

“이제 그만 황실로 들어와라. 그 영감 밑에 있어 봤자 너에게 득이 될 건 없어.”

한없이 진지한 표정에 나 또한 차차 찝찝하고 불편해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똑같이 굳힌 표정을 드러냈다.

“결국 그 얘길 하려고 그런 거야?”

“…….”

“그리고 황실에 가더라도 쉽게 갈 순 없어.”

알츠베이트 공작과 폭군 록시디언.

둘 중 누굴 더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알츠베이트 공작이다.

비교할 수가 없다. 나를 죽음으로 내몬 인간.

제 손녀를 애정하는 척 도구로 부리면서도 양심의 가책 하나 없는 인간이지.

싫어하다 못해 증오한다.

그러니 그 영감이 싫어하는 짓이라면 설사 저 폭군 오빠가 손에 넣은 황실이라도 뛰어들 거다.

황실이 뭐야, 죽는 게 결정된 마당에 불길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올 건데?”

나는 삐죽하게 웃었다.

거참, 대사 한번 남사스럽네. 그런 대사는 여주인공한테나 하시지.

“아니, 오빠가 할 건 없어. 그 망할 영감탱이가 좋아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찡그린 록시디언이 냉소적으로 뱉었다.

“돈.”

“그래. 그렇지?”

돈이라면 혈육이라도 파는 자다.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러니 그 망할 영감탱이가 진정으로 절망하는 건 그 돈을 모두 써 버리는 거야. 그 돈 내가 다 써 버리고, 거지되는 꼴을 꼭 봐야겠어.”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게 가능할까?

이런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왜냐, 사람은 미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폭군은 나를 보더니 성큼 걸어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흠칫 놀랐다.

아 씨 뭐야, 가뜩이나 큰 놈이 다가오니 위협적이었다.

갑자기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럼 가만 있지 않을 테다.

혹시라도 때리면 나는 반격을 하기 위해 목걸이를 잡고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런데 폭군 오빠는 왜인지 내 머리에 손을 얹더니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이 씨, 뭐 하는 거야? 머리 망가지잖아!”

“아니, 넌 어릴 때랑 참 변함이 없는 것 같아서.”

“허? 그럼 어디 가겠어?”

이건 좀 모욕인데. 내가 그 ‘샤를리즈’랑 똑같다고?

“넌 눈이 뒤집히면 끝장을 봐야 했지.”

……음, 지금 내 상태가 맞군.

“하지만 어째 지금은 그 독기가 더욱 강해진 것 같네? 이 오라버니는 참 마음에 드는구나.”

“오라버니고 나발이고 원숭이 쓰다듬듯이 만지지 마라? 일부러 헝클이는 거지?”

“이런, 들켰나.”

내가 손을 탁 쳐 내자, 폭군은 어이쿠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난 돌아갈 건데, 같이 갈 테냐?”

“됐어. 빨리 돌아가. 나는 내 볼일이 있다고.”

“볼일이라…….”

폭군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무슨 볼일? 어디…… 좋은 보물이라도 숨겨 놨냐?”

“…….”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내가 아스킨과 있다는 걸 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랬다면 당장 달려와 아스킨에게 시비를 걸고도 남았지.’

나와 같은 색을 가진 붉은 눈에는 해석하기 힘든 뭔가가 일렁거렸다.

“야, 동생아. 웬만하면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 너도 기왕이면 사람 가려 사귀어라?”

“허?”

“이 오라비는 생각보다 더 아량이 넓단다.”

그렇게 뜻 모를 미소를 짓더니, 이내 폭군 오빠는 노아와 호위 기사들을 이끌고 왔던 길을 향해서 돌아가 버렸다.

나는 폭군이 동물원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어후,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거야?’

흡사 내가 죽는 걸 눈치라도 챈 것같이 과도하게들 관심이 많다.

당연히 그건 아닐 거여서 조소가 나오기도 했다. 필요할 땐 관심도 없던 인간들이.

흥이다.

‘우리 아리아가 기다리겠는걸.’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는 생각보다 많이 걸어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게다가 높은 구두와 온종일 걸어 다닌 탓에 얼마 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서고는 목뒤로 흐르는 땀에 미간을 찡그렸다.

‘……와, 설마 나 저질 체력이기까지 한 건 아니지?’

믿고 싶지 않은데. 대체 ‘샤를리즈’는 쓰레기가 아닌 부분이 어딘가.

외모 빼곤 정말 쓰레기인가?

내 숨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내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제트.”

어느새 다가온 내 호위 기사를 보며 슬쩍 웃다가 후,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제트가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야?”

“공녀님,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안아 옮겨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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