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뭐야, 혹하는데?
‘이 샤를리즈의 몸으로 눈을 떠 제일 편한 게 있다면, 내 발로 걷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점 아닐까?’
나는 어느새 이 몸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호화스러운 시중도 편리함에 속해 있었다.
“좋아. 넘어지면 알아서 해.”
폭군과의 대화로 꽤나 늦어진 시간만 아니었다면 안기진 않았을…… 오 편안하네.
안겼을 것 같다.
‘어째 사람을 안아 본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제트는 놀랍도록 익숙한 자세로 나를 안고서 움직였다.
“너 왜 이렇게 익숙해?”
“……노약자를 옮기는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허, 알츠베이트에서?”
“아니요.”
제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오기 전의 일입니다.”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제트가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샤를리즈’의 관심 밖이었단 소린데.
볼수록 샤를리즈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데다, 진심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조금 안타까워졌다.
‘너도 필요한 사람에게 버림받은 꼴이 나랑 다르지 않구나.’
나는 손을 뻗어 제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괴팍한 주인 아래 와서 고생이 많아.”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적은.”
“없을 리가 있나. 됐어. 내 성질머리 정도는 알아.”
“…….”
“고맙다고 말해 둘게.”
나는 씩 웃었다.
“그래도 넌 믿을 수 있는 것 같거든.”
제트가 아주 잠깐 걸음을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착각이라는 듯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와. 이거 완전 말 탄 거 같잖아? 진짜 빠르네.’
* * *
샤르리즈는 제트 덕분에 빠르게 아스킨이 기다리는 곳으로 올 수 있었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이 멀뚱히 서 있는 걸 보고 의외라고 여겼다.
자신이 등 떠밀고 얌전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정말 그 말을 지킬 줄은 몰랐던 탓이다.
‘록시디언한테 인사해야 한답시고 나타나더라도, 아이고 저 벽창호 새끼, 하고 말았을 텐데.’
그러나 조금 지친 탓에 샤를리즈의 눈은 무심하게 아스킨을 스쳤다.
아스킨은 제트의 품에 소중하게 안겨 온 샤를리즈의 모습을 보여 아주 잠시 동공이 떨렸다.
“공녀, 다친 건가?”
“아니,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런데 아리아는?”
어쩐 일인지 있으란 곳에 아스킨은 있는데 중요한 아리아가 없었다.
샤를리즈가 심각해지기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
“아.”
그런 거였군.
어쩐지 아리아라면 끔찍하게 아끼던 아스킨이 홀로 자리를 지키는 게 이상하기도 하던 참이었다. 샤를리즈가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돌아가셨나?”
샤를리즈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에 아무런 대답 없이 벤치에 철퍼덕 앉았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공녀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소설 속 최강 악녀에 빙의했으면 속이라도 시원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해 본 것도 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어이없었다.
이럴수록 더욱 깽판을 놔야겠다는 의지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아스킨을 쳐다보았는데, 그러다 말고 샤를리즈는 푸흑, 흐느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흡.”
“왜 웃지?”
“너 왜 그거 아직 손에 들고 있어?”
“…….”
검은 토끼 귀를 손에 덜렁 들고는 미아처럼 덩그러니 서 있는 꼴이라니.
“길 잃은 토끼냐?”
“…….”
물론 미아라니, 저 인간의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풍기는 분위기란 게 그러했다.
낯선 장소에 덩그러니 놓인 병정 인형처럼, 씁쓸하고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샤를리즈는 속으로 픽 조소했다.
‘씁쓸은 무슨. 옘병.’
제 처지가 쓸쓸하다 못해 복장 터지게 안됐지. 무슨 저 인간을 동정한단 말인가.
훠이훠이, 쓸데없는 생각이다.
“하아, 덥다, 더워.”
아스킨은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이봐.”
“이봐라니.”
“그럼 뭐라고 하리? 아, 공작님 따박따박 붙여 줘?”
“…….”
아스킨은 역시 샤를리즈의 이런 태도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제껏 샤를리즈의 태도는 한 가지였다.
“그렇게 뻣뻣하게 나와도 넌 내 거야. 내 약혼자라고. 알겠어?”
“널 돈 주고 내가 산 거야. 넌 동의한 거고.”
이기적이거나 악독스럽거나 때로는 표독스럽기까지 했어도, 저 붉은 눈동자는 집요하리만큼 그를 향한 집착을 드러냈다.
인정한다. 샤를리즈는 분명 여행을 다녀온 뒤로 변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를 향한 무언가를 바라는 시선만큼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말을 들어 달라고, 대화를 해 보자고.
전과 눈빛도 표정도 말투도 달라졌지만 원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가 자신을 보기 바라는 것.
……그렇기에 이토록 제게 시선조차 귀찮다는 듯, 아니 아깝다는 듯 구는 샤를리즈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스킨은 깨닫고 만 것이리라.
여행을 다녀온 뒤의 샤를리즈는 자신을 처음처럼 음습한 시선으로 본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갈망하고 온건하게 바라 왔다는 것을.
이제 그녀가 완전히 자신에게서 흥미를 잃은 시선을 하고 나서야 깨달아 버렸다.
“아, 그리고 파혼 언제 할 건데? 당사자니까 날짜 정도는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심드렁한 말투에 아스킨은 쿵 심장이 떨어지는 것같이,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을 맛보아야 했다.
이건 정말…… 익숙해질 수 없는, 아니 익숙해져서는 안 될 감각처럼 느껴졌다.
“……준비 중이다. 확정되면 알려 주지.”
아스킨은 이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이 아찔함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대한 파도는 이미 아스킨을 덮친 뒤였다.
* * *
“그래. 뭐. 안 알려 줘도 영감이 알려 주겠지. 허, 낮잠 자기 딱 좋은 날씨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체통 없이 중얼거렸다.
아스킨 저놈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건지 내 쪽을 보지도 않고서 사납게 어딘가를 노려보는 얼굴이었다.
얼굴도 보기 싫다는 건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샤를리즈가 얼굴만은 얼마나 예쁜데. 네 눈이 손해지. 이젠 뻔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예쁘다. 짱 예쁨. 내 얼굴은 아니지만 아무튼 제국 제일로 예쁨.
그러니 이런 예쁜 나를 걷어찬 님은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다.
아니, 그렇게 만들 테다.
흥, 속으로 콧방귀를 끼며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저, 내가…….”
그제야 아스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손을 휘적 내저었다.
“됐어. 뭘 구차하게 변명을 하니? 아니면 아닌 거지. 됐어, 네 거절은 지긋지긋해. 나도 너 이제 별로…… 아니, 생각할수록 너 별로더라고.”
나는 보지도 않고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아스킨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이젠 딱히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더더욱 듣고 싶지도 않았다.
멍하니 앞을 둘러보다가 곧 사색이 되어 나타난 아리아를 발견했다.
“어라, 아리아. 얼굴이 왜 그래요? 괜찮아요?”
벌떡 일어났다.
나뿐 아니라 아스킨 또한 놀라 아리아에게 달려갔다.
아리아는 아스킨이 손을 댄 순간 안심하기라도 한 듯 추욱 늘어졌다.
“언니……, 죄송해요. 제가,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죄송하다뇨. 그런 말 말고 얼른 돌아가요! 난 괜찮으니!”
아리아의 입술은 새파란색이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색에 나는 지레 겁을 먹고 하얗게 질렸지만, 아스킨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침착하다 못해 평온했다.
나는 진중하게 움직이는 이 남자의 움직임을 보면서 내가 이 남자에게 든든함을 느끼다니.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언니랑, 놀러까지 왔는데…… 아, 아니면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보면 괜찮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럴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어서 가요. 앞으로 자주 놀러 오면 되는 거지.”
나는 아리아의 손을 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아니, 무슨 손이 이렇게 차가워?
차갑기만 한 체온이 나를 더욱 겁먹게 하기 충분했지만 여태 나를 지탱하게 만든 포커페이스가 나를 살렸다.
아리아는 안타까울 만큼 덜덜 떠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새하얀 초롱꽃처럼 애처로웠다.
아스킨이 기다렸다는 듯 아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고, 나는 아리아의 옆을 졸졸 쫓아갔다.
그렇게 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스킨을 향해 눈짓했다.
아스킨은 마치 내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리아를 안아 들고는 레무트 가문의 마차로 이동하려 했다.
아니, 내가 붙잡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거 타고 가.”
“그건, 네 가문의 마차야.”
“맞아. 제대로 봤어. 말도 더욱 좋고 더 빠르고 더 안전하지.”
“…….”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아스킨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배려해 준 것 잊지 않겠다.”
“……어? 어. 뭐.”
뭐야. 왜 순순히 받아들여? 무슨 꿍꿍이냐고 물을 차례 아니야?
아리아가 걱정되어서 말하긴 했지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아리아를 위해 윽박질러야 하나 싶었는데…….
나는 마차에 오르는 아스킨의 뒷모습을 보다 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늘 저 남자는 참으로 이상했다.
오히려 내가 멱살을 쥐고 무슨 꿍꿍이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트,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