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 *
아스킨이 내가 가져온 좋은 마차를 타고 갔기에, 남은 선택지는 아스킨이 타고 온 레무트 저택의 마차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아스킨의 마차를 탈 수도 있었지만 더 기다려 알츠베이트 저택에서 새로운 마차를 탔다.
마차를 타기 전 마차에서는 누군가가 내렸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알츠베이트 가문과 계약한 치료 마법사였으니까.
“공녀님을 뵙습니다.”
“지시 사항은 들었지?”
“예.”
나는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어디론가 향했다.
이윽고 마차가 도착한 건 알츠베이트 저택이 아닌 레무트 성문 앞이었다.
이제는 내게 익숙해진 문지기들이었기에 나는 아무런 제지 없이 치료 마법사를 대동한 채로 저택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낯익은 집사가 나를 반기더니, 곧 놀란 얼굴의 아스킨이 달려왔다.
“너…….”
나는 아스킨에게 인사하는 대신 곁에 있던 치료 마법사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아리아에게 안내해. 유능한 치료 마법사니까.”
이것만이 내 용건이 끝이었다는 듯 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손목이 붙잡히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아스킨이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그가 빨랐다.
“……아리아는 방금 잠들었다.”
“그래? 다행이네. 저 치료 마법사는 실력만은 최고니까 금방 편하게 해 줄 거야. 그럼.”
“잠시만.”
뭐야? 내가 여기 온건 순전히 아리아 때문이었다.
이 이상 용건이 있을 리 없었다.
탁. 아스킨의 손이 거칠게 떨어졌다.
씨근덕거리던 것도 잠시, 나는 놀라 손을 놓게 만든 사람을 보았다.
“…….”
아스킨의 손을 놓게 만든 제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허락받지 않은 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 또한 호위 기사의 업무입니다.”
“아니, 됐어. 마침 떨어졌으면 했어.”
나는 손목을 탁탁 털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손에 묻은 열기가 이렇게 공기 털 듯 털어질 리가 없었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아스킨은 제 손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엉뚱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됐어. 치료 마법사도 데려왔으니, 여기 있는 제트랑 갈게.”
나는 아스킨이 내 손을 잡았던 것이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굴었지만 내 얼굴로는 숨기지 못한 편린이 드러났을 게 분명했다.
“나보다 저 기사가 더 편하다는 것인가?”
“그럼 내가 너를 편하게 생각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오늘만큼은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군. 미안하다.”
정말, 이 남자가 분명 무언가를 잘못 먹은 게 틀림없었다.
불쾌함과 싸늘함. 의문과 미묘한 감정, 꿈틀거리는 희망 회로까지. 수많은 것이 마구 교차했다.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어떻게 내 앞에서 편하다는 말을 하냐. 그리고 미안하다고?’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내가 알아서 가겠다는 표시 겸 너는 빨리 치료 마법사나 데려가라는 의미에서 손을 휙휙 내저었다.
“……?”
그런데 웬일인지, 아스킨이 갑자기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게 아닌가.
뭐야. 뭔데? 당황한 나는 더욱 빠르게 손을 홰홰 저었고, 이제는 아스킨의 숨결이 얼핏 느껴질 것 같은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제트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건 성급한 나의 짜증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네가 오라고 손짓한 거 아닌가?”
“뭐? 이건 가라고, 꺼지라고 하는 손짓인 거 몰라?”
아스킨의 눈으로 당황이 스쳤다.
“……전장에선 손의 방향으로 전진과 후진을 결정하는데. 내가 또 착각을 했나 보군.”
아스킨이 재빠르게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뭐 하는 거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밤이 늦었다. 당장 마차가 없다면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건 어떤가.”
“아니, 됐어. 타고 온 마차를 타고 갈 거야.”
“치료 마법사는 어떡하고?”
“설마 레무트 공작이 마차 하나 내주지 않겠어. 귀하디귀한 인재를 데려다주었는데.”
“…….”
“나 간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필 이토록 달이 밝은 밤일 게 뭐람.’
조금 전 아스킨이 잘못 이해해 훌쩍 다가온 순간, 다가온 아스킨의 얼굴과 그 뒤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을 한꺼번에 보았다.
사람들이 괜히 달의 현신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까만 밤에 더욱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문제는 저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최근에 꾼 남사스러운 꿈이 기억나 버렸다는 거다.
“네가 바라는 게 이건가?”
꿈속에서 나를 응시하던 시선, 그리고 현실에서와 다른 얼굴, 다른 표정.
무엇보다도 손에 들린 코인이 매력적이었지. 아마?
“……이것도 가지고, 나도 가지는 건?”
옷을 풀어헤친 방만한 모습. 거기다 잘못했다고 비는 듯한 물기 어린 시선.
모두 나쁘지 않았지만…….
그 꿈, 내가 저놈을 걷어차면서 끝났지?
‘참 통쾌했는데.’
그랬다.
나는 저 인간의 얼굴에 감탄한 게 아니라, 아니 감탄은 했지만 저 다리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컸기에 문제였다.
……꿈속에서처럼 거하게 걷어찰 뻔했단 말이지.
“호위하는 것도 안 되나? 밤이 깊었다. 호위 하나로는 어려울 거다.”
“그냥 좀 꺼지라고.”
“마차를 함께 타고 가는 것이 싫다면, 뒤에서 네가 탄 마차를 따라가겠다.”
당장이라도 정말 걷어찰 것 같은 충동이 떠나질 않아 빨리 이 자릴 뜨고 싶건만.
“너 오늘 진짜 왜 이래?”
“…….”
나는 평소와 같이 야생 동물인 양 차갑게 으르릉대는 모습이 아니라, 쩔쩔매는 듯한 이 모습이 낯설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리아를 도와줬다고 고마움에 회까닥 돌아 버렸나?
게다가 방금까지도 혼자서 잘만 지껄이던 남자가 갑자기 침묵을 유지한 채 서 있기만 하였다.
나는 돌아서서 발을 옮기며 제트에게 지시했다.
“제트, 돌아간다.”
“네. 공녀님.”
내 뒤로 아스킨이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곧 마차에 올라타면서도 저쪽에서 호위 어쩌고 하기에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수했다.
“네 멋대로 하든가. 언젠 네 맘대로 안 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마차에 올라타서는 창문이나 보고 있는데, 곧 창문을 보다 말고 경악하고 말았다.
……저 인간, 마차를 따라서 뛰고 있었다!
‘진짜 돌아 버렸나?’
왜 제국 제일의 검사가 말도 두고 직접 뛰어서 쫓아오는 건데.
진짜 미쳐 버린 사람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내가 폭군 오빠가 미친 짓을 벌일 때나, 그 또라이 이안이 바당에 뒹구는 등의 요상한 짓을 저지를 때도 이만큼 경악하진 않은 것 같은데.
‘오, 신이시여. 제 주변엔 왜 하나같이 이딴 남자들밖에 없는 겁니까? 혹시 아리아랑 연애하라고 등 떠미는 겁니까? 그 사랑스러운 눈 토끼랑만 평생 지내라고 고사 지내는 거냐구요, 예?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양피지로만 등장했던 신을 욕했다.
처음엔 마차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던 아스킨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차와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아무리 괴물 같은 검사라지만 기본은 인간 아닌가.
지나온 길을 보면 꽤나 먼 거리였기에, 정말이지 제국 최고의 검사다운 체력은 과시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차와 비교할 건 아니었다.
이제는 거리가 멀어져 아스킨이 저 멀리 점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결국 마차를 세웠다.
“제트, 너는 마차에 타고 있어.”
“……예.”
마차에서 내려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한참을 기다리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아스킨이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땀방울을 흘리는데도 이상하거나 역하기는커녕 그마저도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야릇하게마저 보였지만, 나는 찡그린 채로 쳐다보았다.
“너 때문에 더럽게 불편하니까. 꺼져. 돌아가.”
“외진 곳이라 언제든 몬스터가 습격할 수 있다. 내가 호위하겠다.”
아니, XX. 저기요, 그놈의 호위가 말은 어디에다가 두고?
내 시선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아스킨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말을 타고는 호위가 쉽지 않다.”
“허어? 호위는 무슨.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도착해 놓고는, 몬스터가 나타났으면 벌써 잡아먹혔겠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느라 뒤처졌다. 이젠 뒤처지지 않겠다.”
“무슨 개소리야.”
뭔 마차를 발로 따라잡는다는 소리는 그 혀가 잘만 돌아가는 이안조차 하지 않을 소리 같았다.
“생각할 거 많으면 집에 가서 발 닦고 누워서 하기나 해. 빨리 꺼지라고.”
“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했다.”
내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참 웃기게도 땀을 이렇게 흘리는데 불쾌한 땀 냄새 하나 나지 않는 남자였다.
청량한 듯 흘러오는 향기는 오히려 내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너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남자였다. 그럼 뭐 하나? 나를 최악의 여자로 만들었는데.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이 평등하다.
그 저울로 날 밀어낸 건 너와 알츠베이트 공작이고, 그러니 내 분노는 정당하다.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넌,”
“내가 왜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던 아스킨이 처음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꾹 입술을 깨문 남자가 아주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뛰었기 때문일까.
아니,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눈처럼 희고 희던 눈 밑이 아주 조금 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사과를 한다면……. 넌 내 말을 조금 더 들어 줄 수 있나?”
맹세컨대 내가 숨을 멈춘 건 결코 저 말 같지도 않은 말 때문이 아니었다.
한순간 밤처럼 깊어진 눈 아래 언뜻 드러난 무언가가 마치…… 갈망 같아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