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나는 눈앞의 변화를 믿기지 않는 듯 바라보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 고집불통 남자가 대화를 하며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 모습이 통쾌하고 짜릿하면서도 내가 겪어 온 것들이 생각나 갑갑했다.
네가 더 괴로워했으면 좋겠다. 가학적인 감정마저 들었다.
붉어진 눈 밑을 보며 새삼스럽게 아리아를 떠올린 건, 이 남자 또한 희고도 청초한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내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웃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왜, 인제 와서 돈 갚으려니 잘 안 되니?”
아스킨의 눈이 커졌다.
“그런 게 아니야.”
내 눈이 가늘고도 우아하게 휘어졌다.
“혼자 무게 잡고 혼자 감정적인 척 그렇게 굴어서 내가 널 좀 애처롭게 생각할 줄 알았다면 그게 바로 착각인 거야. 아…… 그래, 그 착각을 심어 준 건 바로 나였지?”
“……공녀.”
“네 시선 한번 끌어 보려고 독한 짓 서슴지 않는 미친년, 그게 나니까?”
“…….”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 고고하신 이 속을 내가 어찌 알겠나? 하지만 대뜸 이러는 것이 기쁘거나 희망이 피어오르기는커녕 욱하고 분노와 설움이 먼저 치미는 걸 보면, 그간 내가 정말 힘들었구나.
스스로 깨닫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제 정말 그만 따라와. 불쾌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너 때문에 짜증이 나서 쉴 수가 없잖아.”
이렇게 던지고는 마차로 향했다.
제트는 두고 내리지 말 걸 그랬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소리를 듣기 전에 저 남자를 막아서게 하고는 들어가 버릴 수 있었을 것을.
내가 마차 문을 열자, 제트가 기다렸다는 듯 내려서는 나를 에스코트했고, 마차에 오르자마자 문을 닫아 주었다.
출발하는 마차 창문 너머로 아스킨은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 * *
그날 밤, 아스킨은 아리아의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사람에게는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익숙해진 것을 거부하는 건 뛰어난 영웅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아스킨에게 ‘샤를리즈’란 관성이었다.
거부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분노하고.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만도 취급하지 않았다.
치욕과 굴욕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 ‘샤를리즈’입에서 나오는 신랄한 말과 행동만은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특히나 ‘샤를리즈’의 혀가 아리아를 욕할 때 더욱 그러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아스킨 어깨에 얹힌 짐 덩어리로 치부했다.
지금, 저렇게 애틋하고도 다정하게 노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이런 것들이 고작 제국 밖으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스킨은 근 10년이 넘게 ‘샤를리즈’에게 시달린 사람이었다. 관성은 그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샤를리즈의 변화를 확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 그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왜, 인제 와서 돈 갚으려니 잘 안 되니?”
아스킨은 신랄하게 이죽거리는 샤를리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샤를리즈는 오늘 하루 꾸준히 아스킨에게 차가웠고 거부감을 보였지만, 얇은 가벽을 두고 전해지는 느낌이었다면.
샤를리즈가 저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을 가렸던 관성이란 벽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했다.
이제 샤를리즈 알츠베이트는 정말로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아스킨의 청초한 눈매가 흐트러졌다.
* * *
며칠 후, 아스킨은 물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부관과 함께 거대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저택 앞에서 그를 맞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안 차일드였다.
어제 막 타지에서의 업무에서 돌아온 이안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언제나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예법이었다.
“각하, 제 부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안은 아스킨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도 토를 달지 않고 안내를 시작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서 집무실로 이동하는 도중에 아스킨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어제까지 이웃 왕국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레무트 공작님의 명성이 대단함을 또 한 번 느꼈습니다. 옐로우 로드의 큰 수혜를 받는 곳답게 황무지의 영웅인 공작님을 숭상하고 있더군요. ”
“…….”
“놀랍게도 기념주화까지 봤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스킨이 대답이 없자, 이안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찰나 미소 없는 표정을 지었던 이안은 매끄러운 태도로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부족하여 결례를 범했다면사죄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아스킨의 차가운 눈이 이안을 향했다.
신분이 높은 자는 낮은 자의 말을 무시해도 결례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예법에 따라 아스킨은 끝까지 무시할 수 있다.
한편으로 편하게 받을 수도 있는 사담이었지만 이렇게 구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자신의 옆에 서서 걷고 있는 이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무트 가문에 호의를 건넨 이들이었다.
물론 이 세상에 공짜란 없기에 이들의 호의가 후에 어떤 조건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겠지만, 아스킨 역시 거기까지 고려한 후 받아들인 제의였다.
이들 가문에 가진 고마움과 별개로 아스킨은 이안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부드럽게 생긴, 아니 눈이 살짝 찢어진 저 여우 같은 얼굴에서 가끔 뱀과 같이 속내에 무언가를 숨긴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이안 차일드와 관련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가 불현듯 자각한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남자는 아무런 대화 없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잠시 뒤, 집무실로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백작이 들어왔다.
로한 차일드. 이안의 부친이자 차일드 가문의 주인이었다.
“레무트 공작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방문을 말씀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이안과 흡사하게 생겼으며 나이보다 젊은 외모를 가진 백작은 돈과 관련된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데다 처세를 보는 감각 또한 뛰어났다.
이안이 제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스킨 레무트란 공작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 됐다. 시간이 무슨 대수겠는가.”
“우선 차부터 한잔하실까요?”
백작은 하녀가 이미 내어온 찻잔을 들어 올리며 분위기를 살살 풀어냈다.
차일드 백작은 현재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공작의 분위기가 왜 이렇지?’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아스킨이 지금 무척이나 굶주린 야수처럼 보인 탓에 여기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천천히 풀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탓이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금액은 준비가 끝이 났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백작은 아스킨이 좋아할 것 같은 화두로 시작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스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금액 그대로 가져다줄 것이니 문제가 생기면 그쪽에서 연락이 오겠지. 책임은 피하지 않으리라 믿겠다.”
“허허허, 예. 절 믿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돈은, 최대한 빨리 갚도록 하겠다.”
“아닙니다. 천천히 갚으셔도 됩니다. 저희야말로 평소 흠모하며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신 공작님께 제 미천한 도움이나마 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지나친 언사다. 아스킨은 말없이 백작을 응시했다.
차일드 백작은 이런 식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음에도 지나친 저자세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품위가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가는 확실하게 처리하지. 이제 내게 바라는 것을 들을 수 있겠나?”
백작의 예상대로 아스킨은 평소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본 그대로 굶주린 야수와도 같은 상태, 야수에게 먹이를 던져 줬으니,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시니, 저도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부인 척 본론을 숨기던 백작은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음을 깨닫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은혜를 모른 척하진 않아. 신세는 꼭 갚을 것이다.”
“예,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큰돈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무엇이지?”
아스킨이 이렇게 나오자 백작의 얼굴로 미약한 안심이 스쳤다.
그는 그렇게 아스킨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인 줄도 모르고서.
“예, 첫 번째는 피스텐 지역의 몬스터를 처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옐로우 로드를 위해 황무지를 정리하신 것과 같은 일입니다.”
“남서쪽 초원이로군.”
“예, 저희 영지를 지나는 길입니다. 몬스터들 때문에 상단이 먼 길을 돌아가는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피스텐은 카잔 왕국과 분쟁 지역이라 황실의 승인이 필요할 것인데, 황실과는 협의가 끝난 것인가?”
“그게…… 폐하께 수차례 요청을 해 보았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차일드 백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폐하의 가신이다. 황실의 허락이 필요한 일에 허락 없이 할 순 없다.”
“아아, 그런 거라면 제가 묘안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바로 카잔 왕국의 용병으로 참여해 주시면 됩니다. 제국과의 협상을 끝내고 곧 양국이 토벌을 함께할 것인데, 그곳의 용병으로 참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 않습니까?”
백작의 은밀한 제안에 아스킨은 한동안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였다.
한참이 지난 후 눈을 뜬 아스킨은 말을 이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인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첫 번째와 연관된 일로, 몬스터들을 토벌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포로를 구해 주시면 됩니다.”
“포로……? 제국 사람인가?”
“아닙니다. 저희 가문과 중요한 거래를 하는 왕국의 포로인데, 몬스터들 때문에 잡혀 있는 곳을 지나갈 방법이 없어, 여태껏 구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백작은 씁쓸하고도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명료한 표정으로 말했다.
“‘플로리아’라는 이름의 여자입니다.”
* * *
한편 샤를리즈는 침대에 편안하게 엎드린 채 한 손에는 양피지와 다른 한 손에는 펜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이제 단 하나.
자신이 죽기 전에 어떻게든 죽게 만든 알츠베이트 그 망할 공작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사건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지.’
그녀가 아는 사건이란 무엇이겠는가. 결국은 원작에서 일어난 일.
근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다.
‘아마 지금도 사건의 기미들이 보일 거야.’
정리하기 위해 샤를리즈는 우선 원작의 주인공 이름부터 적었다.
“플로리아……. 한번 꼭 만나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