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6/194)

115화

* * *

아스킨은 다소 당혹스러웠다.

차일드 가문에서 무상으로 돈을 빌려주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원금은 물론 무엇이든 더 바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영지는 물론 상권을 지키기 위해 토벌을 부탁하는 건 그에게 바라기엔 더없이 합리적인 부탁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두 번째 부탁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같은 제국 사람도 아닌데, 심지어 몬스터들에게 잡혀 있는 상태의 사람을 구출해 달라니.

물론 아스킨은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고 현장에서 몬스터에게 잡혀 있는 사람을 보았다면 군말 없이 그 사람의 안전을 지키며 구해 주었을 것이다.

이들이 아스킨의 이런 성정을 모르진 않을 터.

굳이 덧붙인 걸로 보아선 이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란 소리였다.

‘……거래에 사람을 올린다라.’

아스킨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그의 침묵은 곧 차일드 백작에게 상황 설명이든 사정이든 더 털어놓으라는 압박이었다.

그러나 차일드 백작은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역시, 괜히 황무지의 늑대로 불린 자가 아니로구나.’

제국 최강의 무장이다.

차일드 백작은 실로 견디기 힘든 압박 속에서 부들 떨리는 손을 숨기고자 애썼다.

“시한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저희 같은 상인들에게 시간은 곧 금이니 말입니다.”

“그럼 토벌대를 꾸리는 대로 출발하겠다.”

아스킨은 차일드에서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수없이 상상해 두었다.

큰돈을 선뜻 호의로 빌려주는 이는 없다.

속된 말로 호구이지 않은 이상 누가 그런 일을 하겠나?

아스킨은 애초에 이들이 자원봉사자가 아님을 알고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러니 말을 바꾸기 전에 제안을 모두 해결할 생각이었다.

‘가는 직전까지 아리아의 건강을 살펴보고 가야겠군.’

쓰러진 여동생의 걱정을 했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 분홍빛 머리카락의 표독스러운 인상을 가진 미인을 떠올리고는 움찔했다.

아니, 자연스럽게 떠올린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어젯밤부터 내내 단 1초도 빼놓지 않고 샤를리즈의 생각을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공작님.”

정중한 목소리에 아스킨의 시선이 차일드 백작을 향했다.

“준비는 이미 저희 쪽에서 다 해 놓았습니다. 공작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기사들과 마법사들로 구성해 놓았습니다.”

차일드 백작이 붙여 주는 자들.

이들은 실상 아스킨의 일행을 감시하는 감시자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 사흘 뒤에 떠나도록 하겠다.”

“……예? 사흘 말씀입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 쪽에서 해야지.”

보통 토벌대를 꾸리는 데에는 못해도 닷새는 걸렸다.

하지만 레무트 공작가는 옐로우 로드의 일등 공신답게 아스킨이 이끄는 공대가 항시 준비되어 있었다.

차일드 백작은 감탄을 숨기며 이어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황실에는 저희가 따로 연락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킨이 백작을 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백작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오히려 백작은 자연스레 품에 접어놓았던 계약서를 내밀었고, 아스킨은 받아 읽으며 맨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멈추었다.

“……토벌 후 얻게 되는 부산물은 레무튼 가문으로 귀속,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 모든 부채는 탕감한다고?”

“예, 공작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

애초에 아스킨 자신과 레무트 가문의 기사들은 토벌의 스페셜리스트들이었다.

자신들이 정복한 그 험한 황무지도 아닐진데,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건 일종의 보험이었다.

“공작님의 노고에 비하면 약소하니 부디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도 차일드 가문에서 손해를 보는.

“…….”

아스킨은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선 자리를 일어나서 문을 나왔다.

이곳에 들어설 때와 다르게 아스킨의 뒤로는 차일드 백작가 기사들이 금화가 가득 실린 상자를 들고 따랐다.

상자는 일반 나무 상자와 다를 바 없어서 이것을 들고 가는 기사들과 차일드 백작, 아스킨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을 듯했다.

이곳에 한 가문을 사다 못해 거대한 땅을 살 수 있는 돈이 실물로 있으니 말이다.

“저, 공작님.”

이안은 아스킨이 돌아가는 길을 배웅했는데, 아스킨이 말을 막 출발시키려고 할 때, 이안이 말 근처로 다가왔다.

“잠시 조심스럽게 한 말씀 드려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아스킨은 여전히 이안을 보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불쾌하다.

“송구하지만 공작님께 감히 청을 드릴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일단 들어 보지.”

“이번 토벌에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경험하고 싶습니다. 제국 최고의 기사님과의 토벌을 말입니다.”

아스킨의 살벌하리만큼 서늘한 분위기와 태도에도 이안은 봄볕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목숨이 아까운 사람도 있겠습니까?”

“그대의 부친이 허락하면 합류하는 것으로 하지.”

아스킨이 이렇게 말하자, 이안의 평온함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아스킨은 이에 잔인한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 낯설어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그것은 곤란한데.”

“그럼 없던 일로.”

“아뇨,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고 합류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님, 혹시 이대로 영주성으로 바로 가십니까?”

“그렇다. 묻는 이유는?”

아스킨은 눈썰미로 이안이 검을 아주 모르진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퍽 제대로 검을 배운 몸이다. 그 정도의 실력이면 덩치와 걸음걸이, 사소한 습관 정도로도 실력을 정확히 유추하는 것이 가능했다.

‘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가.’

하지만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실력이 좋은 것이 꼭 토벌에서 유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아스킨은 이안의 이 자신감이 분명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을 마주한 순간 자신과의 사투나 마찬가지인 고된 일정과 환경 사이에서 완전히 무너질 것임을 짐작했다.

그렇기에 아스킨은 방심했다.

“그럼 이제 샤를리즈 공녀님과는 정말 끝인 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내용이 갑자기 던져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거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내 개인사에 이렇게나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

전혀 미안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미안하고도 정중한 사람인 양 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눈앞의 이안은 그런 재주를 가진 인간이었다.

아스킨은 속으로 주체할 수 없는 으르렁거림을 입 안에서 굴렸다.

청순하고도 서늘하던 인상이 확 찡그려졌다.

할까, 뱉는 순간 고민했지만 해야겠다.

“언제부터 알츠베이트 공녀를 이름으로 불렀지? 상위 작위의 이를 함부로 부르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군.”

이렇게 말하며 아스킨은 속으로 너무나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을 이안 차일드에게 허락된 것인가 싶어 분노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우스운 꼴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혀와 입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공작님의 개인사가 아닌, 샤를리즈 공녀님에 대한 관심이지요. 동물원 이야기가 제국에 파다하니까요.”

이안이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안 스스로만큼은 자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실로 해괴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글쎄, 공녀님과 레무트 공작님께서 다시 만나시나 봐요! 동물원에서 데이트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래요!”

“공작님께서 공녀님을 위험에서 구해 주셨대요, 다시 사랑에 빠지신 걸까요? 낭만적이야……!”

하루, 고작 단 하루였다.

그 하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안은 초조해지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이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호칭은 공녀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고.”

“…….”

“직접.”

정확하게는 ‘대체 무슨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하는 질린 표정으로.

“네 멋대로 해라, 어차피 내 말은 씨알도 듣지 않을 거면서?”

하는 빈정거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뭐 어떤가. 지금 눈앞의 공작님께서는 진실을 알지 못할 텐데.

이안의 긴 눈매가 예쁘게 접혔다.

“말씀을 들어 보니, 공작님께서는 허락받지 못하셨나 봅니다?”

아스킨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렸지만, 지금 눈앞의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의 도발에 감정을 억누르기 힘든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용건이 끝났으면 물러나라. 더 이상 거기 있다간 말에 치여도 문제없는 것으로 알겠다.”

“감히 제가 공작님 길을 막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살펴 가십시오.”

이안은 샤를리즈마저도 ‘대체 이런 또라이가 어디서 나왔지?’ 혹은 ‘공포의 주둥아리 새끼.’ 하고 혀를 내두르며 욕하던 인간답게 아스킨 앞에서도 이 위명을 마음껏 써먹었다.

만약 여기서 아스킨이 검이라도 휘두른다면, 불쌍한 척 아픈 척, 아 물론 실제로 아프겠지만 샤를리즈에게 쪼르르 달려갈 생각이었다.

‘저는 많이 치사하답니다, 공작님.’

이안의 눈이 더욱 깊게 휘어졌다.

‘그리고 치사하게라도 차지하고 싶은 것이 우리 공녀님의 옆자리이죠. 당신은 너무 쉽게 차지한……. 그 가치조차 모르던 그 자리.’

아스킨은 이안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출발했다.

그러나 아스킨 자신만은 알 수 있었다.

움켜잡은 고삐가, 가죽끈이 형체를 잃어버릴 만큼 일그러졌다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느낀 질투란 감정은 결코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기저에 끓어오르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이고도 강압적인 감정이었다.

항상 내면만은 고요했던 아스킨의 속을 휘젓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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