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194)

116화

* * *

알츠베이트 저택. 알츠베이트 공작은 보좌의 보고를 듣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입니다.”

보고를 마친 보좌는 공작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현재 공작 앞에 놓인 서류는 이 공작가에서 쓰이는 ‘품위 유지비’에 대한 품목이었다.

이 항목을 쓰는 건 오직 한 사람, 바로 공작의 금지옥엽 손녀인 샤를리즈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작은 이 품위 유지비에 대한 품목에 별난 것들이 추가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대체로 무어라 하지는 못할 것들인데……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장미꽃 모종 천 송이라거나 해바라기 씨앗 1톤이 그러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을 사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죄송합니다. 공녀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보좌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대체 알츠베이트 공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해바라기 씨앗 1톤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보석을 미친 듯이 사들였다면 아, 또 사치하는구나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차라리 음식을 1톤씩이나 사들였다면 아 심심해서 또 돈지랄을 시작했구나 이해라도 했을 것인데, 씨앗 1톤이라니.

새삼 농사라도 짓는 게,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농사를 짓는 게 아닌 한 의아하기만 한 품목이었다.

‘……이러니 최근 공녀님께서 미치신 게 아닌가 하는 소문도 도는 것인가.’

아스킨 레무트와의 파혼을 두고 샤를리즈의 대한 소문은 몹시도 많았다.

종류도 수십 개라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는데, 개중 가장 힘을 가진 것이 드디어 쫓아다니던 레무트 공작에게 기어이 차이고 미쳐 버렸단 소문이었다.

확실히 칩거했던 기한이 있다 보니, 이 소문이 가장 유력하다고 알려지긴 했다.

“일단은 괜히 심사가 뒤틀리지 않도록 모두 결제를 해 주도록 하여라.”

알츠베이트 공작 또한 안팎으로 흘러나오는 소문을 모르진 않는지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약한 것, 고작해야 남자 하나에 이리 목을 매서야.

‘레무트 그놈이 고분고분한 놈이었다면 일이 쉽게 풀렸을 것을. 감히 알츠베이트에게 망신을 줘?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쯧, 혀를 차고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샤를리즈의 동태는 어떻지? 차일드가 아들놈과는 그 이후로 만남이 없느냐.”

“차일드 경께서 어제 제국으로 돌아온 뒤 아직까지는 만남이 없다는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공작의 얼굴로 주름이 확 패였다.

이안이란 놈은 적당히 입 안의 혀처럼 굴 줄 아는 놈이기에, 얼른 샤를리즈와 성혼을 하였으면 했건만.

알츠베이트 공작은 샤를리즈의 성질머리를 너무나 잘 알았다.

수틀리면 찍어 누를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아직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쯧, 이렇게 더뎌서야. 지금 차일드 백작가가 신흥 로드를 개척하기 위해 군사들을 모은다는 정보가 파다하니. 계속 예의 주시하도록. 우리 알츠베이트도 언제든 참여할 수 있도록.”

곧 한 지붕 식구가 될 가문이었다.

설마하니 차일드 가문에서 이런 중요한 일을 귀띔하지 않을까 싶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은 신중을 가했다.

‘새로운 로드라.’

옐로우 로드를 황실에게 빼앗긴 것은 지금 생각해도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노공작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예, 알겠습니다. 공작님.”

알츠베이트 공작은 결재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고선, 보좌를 향해 나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차일드 가문이 더 크기 전에 샤를리즈를 보내서 알츠베이트 가문이 삼킬 수 있게 만든 뒤, 공작가를 더 크게 키워야 한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우리 가문의 영향력을 무시하진 못할 테니.’

그때였다.

문을 막 나서려던 보좌가 시종의 급한 소식을 전달받고는 다시금 알츠베이트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보좌는 당혹스럽고도 급한 표정이었다.

“저, 공작님. 현재 레무트 공작이…… 무수한 금화를 들고서 저택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찡그렸다.

“허.”

그러나 곧 공작의 얼굴에는 금화라는 단어 때문인지, 방금 전까지 탐욕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옅은 미소까지 띠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표정을 알아차린 보좌는 재빨리 나가서 아스킨을 안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아스킨이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그의 뒤로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를 짊어진 기사들이 금화를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남아서 모든 상자의 뚜껑을 직접 열었다.

꽤나 화려한 상자에 담긴 금화들은 영롱한 빛을 드러냈다.

처음 상자가 들어올 때만 해도 싱글벙글한 웃음을 숨기지 못했던 알츠베이트 공작의 표정은 상자가 늘어날수록 변했다.

기사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공개할수록 딱딱하게 굳어 갔던 것이다.

기어이 모든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 준 마지막 기사가 아스킨에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은 상황에서 아스킨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이걸로 빚은 없는 것이오.”

알츠베이트 공작은 충격을 감내하려 애썼다.

제깟 놈이 이 돈을 대체 어떻게 갚을 것이냐며 우월감을 가졌다.

‘대체 이 돈을 어떻게……!’

레무트에서 돈이 나올 구석은 없다.

아스킨의 여동생이 앓는 원인 모를 병은 알츠베이트 공작에게는 호재나 다름없는 일.

게다가 알츠베이트 공작은 돈을 빌려줄 법한 가문이나, 재력이 있는 곳을 모두 물색하여 단속했다.

‘한데 어찌!’

그러나 그는 노회한 공작답게 빠르게 충격을 숨기고는 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허어, 참. 거래의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세상 물정이 어두워서야.”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것이지?”

아스킨이 한쪽 눈썹을 미미하게 들어 올리자, 알츠베이트 공작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간신배나 지을 법한 얼굴을 한 알츠베이트 공작이 자신의 보좌를 호출했다.

귓속말을 나눈 알츠베이트 공작의 보좌는 곧이어 알츠베이트 가문의 기사들과 가신들을 데리고 다시 집무실로 들어왔다.

‘내 네놈을 쉽게 보내 줄 듯싶더냐!’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돈이란 것은 정확해야 하는 것이지. 직접 세어 볼 테니 기다리시오.”

알츠베이트 공작은 끝까지 망신을 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자신의 부관들을 시켜 아스킨의 앞에서 금화를 하나하나 세게 시켰다.

마치 구국의 영웅, 제국 최고의 무장 아스킨 레무트가 사기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째서인지 아스킨은 평소처럼 분노하는 대신 고요하고도 깊은 눈으로 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음에도 금화를 세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허어?’

알츠베이트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동안 아스킨은 처음 들어와서 서 있던 그 자세 그대로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서 있었다.

“공작님, 완료되었습니다…….”

곧 보좌가 금화의 총합을 합산해서 알츠베이트 공작 앞에 내밀었다.

숫자를 본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은 다시 한번 딱딱하게 굳었지만 이는 찰나였다.

“허어, 정확하군. 괜한 오해는 하지 말게. 힘든 형편인데 혹시라도 금화 하나라도 더 왔으면 돌려줄 생각이었으니까.”

대체 이놈이 어떻게 그 돈을 구했지?

아스킨 레무트란 제 손에 들어온 목줄 잡힌 짐승이었다.

한데 그 짐승이 밖으로 벗어나려 제 목줄을 물어뜯었으니, 불쾌한 것이 당연했다!

“이제 그 계약서를 돌려줄 차례일 텐데.”

아스킨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긴 채 움직였다.

“……가져오지.”

알츠베이트 공작은 느릿느릿 걸어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아스킨이 말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지긋지긋한 계약서.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계약서가 눈앞에 있음에도 아스킨은 그저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들어 올렸다.

찌이이익.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보는 앞에서 계약서가 가루가 되도록 갈기갈기 찢은 다음 바닥에 뿌려 버렸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는 척 분노를 감췄다.

그러고는 돌아가는 아스킨을 향해 비웃음을 띠었다.

“대체 어떻게 이 돈을 갚았는지 모르겠으나…… 세상이 다 네 맘대로 될 성싶으냐? 넌 아직 멀었다. 내 제안만 받아들였다면 서로 불편하지 않았을 것을……! 뭐, 이미 기회는 날아가 버린 후지만.”

끝까지 분노를 숨길 수는 없던 탓에 어미에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아스킨은 그제야 시선을 옮기더니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충고를 하고 싶은 거라면, 너 자신부터 돌아보도록.”

차가운 조소였다.

“이, 무례한……! 다 죽어 가던 반병신 동생을 살리겠다며 나에게 와서 구차하게 매달려 도와주었더니 은혜도 모르는 놈!”

구차하게 매달려?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아리아와 어떻게든 돈을 구하고자 떠나던 아스킨의 길목을 막고 샤를리즈를 내세워 혼인을 강요하던 것이 바로 저 공작이었다.

아스킨의 얼굴에 기어이 차가운 분노가 맺혔다.

이 순간 아주 잠시 멈칫한 것은, 눈앞으로 눈물을 뚝 흘리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는 샤를리즈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저 비열한 자와 샤를리즈는 다르다.

알츠베이트의 더러운 말을 듣고서야 최근의 샤를리즈 모습이 진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샤를리즈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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