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8/194)

117화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아스킨은 아리아를 모욕한 말을 듣고도 태연할 수는 없었다.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비아냥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라 핏발이 선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피눈물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을 그대로 감는 것으로 숨기고 억눌렀다.

자신이 화를 표출하는 순간 저 독사 같은 알츠베이트는 또 한 번 덫을 놓을 것이다.

저런 모욕 또한 저 작자의 계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제국의 희귀 약재들을 모두 사재기한 후로 값을 올렸나? 내게 빌려준 그 돈이 결국 네 주머니로 들어간 것을 모를 줄 아는가.”

그랬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아리아의 병을 악화시키기 위해서 직접 폭력을 쓰는 것 외에 모든 짓을 서슴지 않았다.

“허어, 난 원래 장사꾼일세. 장사꾼이 물건을 얼마에 파는지는 주인 마음 아니겠나? 뭐 잘못된 게 있는지 난 모르겠군. 무례한 놈 같으니.”

알츠베이트 공작이 쯧쯧 혀를 찼다.

“됐다.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군. ……영지전이라도 하지 않는 한 말이지.”

“…….”

알츠베이트 공작은 단 한순간이나마 움츠러들인 자신의 모습에 분노를 느끼며 이죽거렸다.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오게. 그대에게 남은 거라곤 고작 그 몸뚱어리뿐 아닌가? 그때처럼 후한 값어치는 못 쳐 줘도 아직은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겠지. 껄껄껄!”

아스킨은 독사의 웃음소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문을 걷어차고는 그대로 복도로 걸어 나갔다.

‘돈을 갚은 일로 배알이 꼴리다 못해 분노하고 있겠지.’

이렇게 되었어도,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그 누구보다 분노했음을 느꼈다.

호시탐탐 주제넘게도 감히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듯한 능구렁이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그저 지지 않기 위해 평소와 다르게 삼류 도발이나 일삼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아스킨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끝인가.’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힌 돈으로 아리아의 약을 구하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모습부터.

그의 금지옥엽 손녀와 억지로 약혼한 탓에, 황실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 같은 자신을 예비 사위로 만들어 꼼짝 못 하게 하려는 갖은 술수를 참은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모욕을 참는 것은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천성 나기를 보통 사람 이상으로 고고하고 고귀한 이상과 신념을 품고 태어난 아스킨에게는 지옥불에 지져지듯 고행을 자처하는 길이었다.

아스킨의 눈은 이미 충혈될 대로 된 터라,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서늘한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나가며 보이는 알츠베이트의 시종인들과 기사들 등.

그의 살벌한 얼굴에 제압당한 이들은 아스킨이 분노로 저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 설마하니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상태란 걸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조용했던 복도를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에 아스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돌아본 곳에,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오만하게.

이제는 체념 어린 표정을 지은 샤를리즈가 심드렁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이제야 아스킨을 발견한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스킨은 다시 한번 갈증을 느꼈다.

“뭐야, 왜 허공을 바라보면서 걷니? 천장에 거미줄이라도 있어?”

샤를리즈의 말이 들렸음에도 아스킨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샤를리즈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쑥 들리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허, 이제 내 목소리는 듣기도 싫다는….”

“아니다.”

“뭐가 아니란 건데?”

“천장에 거미줄 같은 건 없었다.”

샤를리즈는 이번엔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생각지 못했던 답변이란 표정이었다.

“뭘 또 그런 걸 대답하고 그러니? 여기 온 걸 보니, 오늘은 돈 갚으러 온 모양이네.”

레무트 가문과 알츠베이트 사이의 부채와 상환.

샤를리즈는 아스킨이 직접 중간 상환이라도 하러 온 거겠거니 했다.

아니면 알츠베이트 공작이 아스킨 레무트의 속을 북북 긁으려고 일부러 빚을 핑계로 여기까지 불렀거나.

“방금 다…… 갚았다.”

그러나 묵직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모두 갚았다. 채무는 사라졌다.

그 말이 주는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샤를리즈는 손을 꽉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아스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뒤로 숨겼다.

그러고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아스킨을 노려보다가, 곧 날숨을 내쉬었다.

샤를리즈의 아름다운 낯에 체념이 어렸다.

그녀는 곧 무심한 시선으로 다시 그를 향했다.

“잘됐네. 그런데 끝까지 내 말은 개무시하는구나. 그런 말은 나한테 먼저 말해 달라고 했는데.”

“…….”

“이제 이 지긋지긋한 관계도 끝이구나. 끝. 잘 가라.”

샤를리즈가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스킨이 빚을 다 갚았다.

이제 남은 수순은 무엇이겠는가. 파혼이다.

이 두 가문 간의 파혼은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 거지?

‘샤를리즈’ 머릿속에 있는 지식 덕분에 파혼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다.

한데, 이 약혼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비정상적인 형태였기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샤를리즈는 가만히 서서 아스킨을 눈에 담았다.

지난번 파혼이 언급되었을 때처럼 심장에 통증이라도 올까 불안한 감정이 몰려오는 것을 빼면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었다.

‘바로 죽는 줄 알았는데, 바로 죽지는 않네.’

다행이었다. 여기서 그대로 죽었다간 지금 계획하고 있는 알츠베이트 공작에게 엿 먹이기 프로젝트가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아직도 무슨 절차가 남은 건가.’

이렇게 채무가 끝난 걸 알게 된 이상,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죽기 전에, 내 반드시 그 영감 XX의 발목은 잡고 간다.

이판사판. 원래 가장 무서운 게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막 살기로 결심한 샤를리즈의 원한은 깊고도 깊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미친 듯이 아등바등 매달렸던 남자를 앞두고, 한편으로는 한때나마 진심으로 동정하고 안타까이 여겼던 감정을 떠올린 샤를리즈는 복잡미묘해졌다.

당연하지만 분노가 더욱 컸다.

‘일단 바로 죽지 않는 건 알겠어.’

이전에 아스킨이 ‘파혼’을 입에 담았을 때 심장이 아팠던 걸 떠올렸다.

심장이 아픈 조건은 그 단어를 말하는 걸까?

그것만 피하면 아프진 않는 건가.

‘파혼 의지가 강력하기만 하면 다른 말을 할 때도 아팠던 것 같은데, 설마하니 지금 저 인간이 파혼 의지가 없는 건 아니겠고.’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으로 저 나쁜 남자 앞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저…… 샤를리즈.”

샤를리즈가 멈칫했다.

이름?

“우와. 내 이름, 알고 있었어?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샤를리즈의 입이 절로 벌어지면서 나온 말은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 남자가 이름이라니, 어디 부른 적 있던가.

‘샤를리즈’의 기억 속에도 없었다.

“미안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잠깐 시간 가능하겠나?”

시간이라. 샤를리즈는 생각하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그건 샤를리즈가 유일하게 줄 수 없는 한가지였다.

바로 그와 알츠베이트 공작의 합작 덕분에 그녀에게서 사라진 재화이니까.

“없는데.”

“……그렇다면 한마디라도.”

“너는, 내가 한마디라도 들어 달라고 애타게 외칠 때 들어 줬니?”

“…….”

“없지? 그런 적.”

샤를리즈의 얼굴로 우아하리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가시를 품은 흑장미처럼 표독스럽기도 하였다.

“네가 그날. 황성에서 단 한마디라도 내 진심을 들어 줬다면 지금 내가 할 대답은 달라겠지.”

아니,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아닌가. 그때 진심을 토로했어도 저 남자는 듣지 않았으려나.

‘그렇겠지.’

그래도 속이라도 시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체념하다 못해 막살고 깽판을 치겠다 외치는 악만 남은 인간은 안 됐지.

“됐어. 넌 신중한 사람이잖아. 그러니, 나와의 파혼도 얼마나 신중하게 결정했겠어.”

“…….”

“그러니 그냥 가.”

샤를리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역설적이게도 이 표정을 미소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다신 보지 말자.”

어차피 내가 죽으면 넌 날 볼 일이 없겠지만 말이야.

샤를리즈가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진 못하더라도 자신이 품은 사정을 어떻게든 신이 정한 규칙을 피해서 전한다면, 그런다면 새삼 달라질 건 없더라도 저 남자가 쌀알 만큼이나마 동정하지 않을까 했다.

‘네 업보가 지나쳐 그런 형벌이나 받았구나, 고소해하면서도 성정상 동정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남자에게는 동정의 여지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오기였다.

샤를리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겨 세 걸음 정도 옮겼을 때였다.

샤를리즈는 자신의 앞으로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

아스킨이 제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도 자신에게 닿을 듯이 손을 뻗은 채로.

샤를리즈가 놀라 흠칫하자, 그 손이 되레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하지만 커다란 손의 잔상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내 말이 듣고 싶지 않을 수 있겠지. 이해한다.”

샤를리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부에 있어서 만큼은 대쪽 같고, 차가울 정도로 냉정한 사람 아니었던가.

자신에게는.

“그저 이 말만은 꼭, 오늘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순간에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말이,”

“그럼 삼켜.”

“……뭐?”

강렬한 시선이 아스킨을 향했다.

“왜, 나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으면서 난 네게 기회를 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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