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아스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켜서지도 않았다.
샤를리즈는 저 얼굴에 떠오른 초조함이 신기하기만 했다.
분노가 잠시 사라지고 의문과 호기심이 단 몇 초간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네가, 알츠베이트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이는 잠시뿐이었다.
“네가 변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첫 번째 말은 아마도, 샤를리즈의 탈을 쓴 윤지후의 생각일 뿐이지만…….
‘샤를리즈’가 들었다면 정말로 좋아했을 말이었다.
그녀는 제 외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기야 껍데기를 쓴 자신에게도 손녀를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인간임을 알아봤다.
예뻐하는 애정은 애완동물이나 혹은 정물인 금화를 두고 예뻐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수틀리면 버리거나 유용한 가치로 이용할 생각이 가득한 게 보였다.
‘샤를리즈’도 이를 알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두 번째는…….
“그래서, 할 말은 그게 끝?”
“아니다. 난,”
“여기서 더 얘기할 거라면 내게 증명해 봐.”
샤를리즈의 오만한 붉은 눈이 아스킨을 향했다.
“난 굳이 네 얘길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어떡하면 되지?”
“나로 하여금 네 얘길 듣고 싶게 해 봐.”
샤를리즈가 생각했다.
나는 항상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던 너의 뒤꽁무니를 지독히도 쫓았으니까.
“너, 여기서 무릎 꿇을 수 있어?”
너도 자존심을 버려 봐.
샤를리즈라고 정말로 무릎을 꿇길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말에 아스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래, 내가 어떤 상태인지 이제 깨달았다면, 그래서 이제는 나한테 협조할 생각은 있는 거니?
“…….”
그리고 샤를리즈는 몇 초간 기다렸다.
그의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서, 미련 없이 희망을 버렸다.
“내가 변했다는 건 인정해도, 네 자존심은 버리기 싫지? 내 이런 말에도 상한 거잖아. 네 자존심.”
“…….”
“내 멋대로 널 좋아한 거니, 널 쫓아다니며 구애하는 동안의 일은 언급하지 않겠어.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에 애원하던 만큼, 딱 그만큼은 네가 같잖은 자존심 버려야, 난 너랑 이야기를 할 기분이 들 것 같네.”
고작 인식을 바꾸는 정도는 필요 없다.
무려 1년이나 약혼을 유지해야,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이 끝난다.
그런데 이런 인정을 받아 봐야 뭐 하겠는가?
‘지가 잘못 판단한 게 뭐.’
저 남자의 자기 연민을 채워 주는 도구로는 절대 쓰이고 싶지 않았다.
샤를리즈는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봐야 저 남자의 얼굴을 보건대 분명 따라올 듯해서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 살짝 시선을 빗겨 바라본 아스킨은 복도 한복판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샤를리즈는 그대로 눈을 깔고는 들어가 버렸다.
* * *
아스킨은 샤를리즈가 자리를 피하고서야 마침내 자신의 진심이 드러난 표정을 지었다.
샤를리즈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어 증명해 보란 말을 한 순간, 움직이지 못했던 건 그날 우는 샤를리즈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자신을 불신하는 것, 경멸하는 것, 증오하는 것.
마지막으로 그저 차라리 지나가는 돌멩이를 보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로 싸늘하게 보는 것.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했던 행동이었기에.
그는 샤를리즈의 말처럼 같잖은 자존심이 상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자신이 한 짓에 참담함을 느꼈다.
왜? 그땐 분명 그녀를 미워했으면서…….
아스킨이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꾹 눌렀다.
왜냐.
‘지금은…… 다르니까. 널 생각하는 마음이.’
* * *
“오, 내 손녀 샤를리즈. 웬일로 내 집무실까지 왔느냐? 이 할애비가 보고 싶었던 거냐?”
공작은 서랍장을 서둘러 닫으며 나를 반겼다.
사자를 피하려다 곰을 만난 기분이 이럴까.
아니, 사자와 곰씩이나 되나.
똥이냐 된장이냐를 두고 피하다 보니, 똥을 만나게 된 내 심정은 착잡했다.
“풉, 무슨 소리?”
나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헛웃음을 터트리며, 존칭이 아닌 반말까지 사용했다.
“안 어울리시게 무슨 그런 곰살맞은 얼굴이세요?”
이런 내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보였다. 비죽이 웃음이 흘렀다.
“제국 최고의 공녀인 만큼, 밖에서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세상 사람들 이미 다 알던데요.”
“무엇을?”
“제가 미친개라는 거요?”
삐딱하게 대답하자, 공작이 자신이 앉은 의자 팔걸이를 꽉 잡는 것이 보였다.
‘뭐야, 이 영감…….’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성격이 참을 성격이 아닐 텐데? 이것까지 참는다니, 이거 또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내가 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이, 알츠베이트 공작은 숨을 내쉬더니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오 그래, 어차피 소문이야 돈 몇 푼이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걱정 말거라. 내 안 그래도 너를 부르려 했는데, 이리 오다니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느냐. 마침 잘됐구나!”
살집 있는 주름진 얼굴을 활짝 웃는 꼴이 가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저를요? 왜요?”
나는 공작과 대화하는 도중에 알츠베이트 공작 집무실에 놓여 있는 수많은 상자를 발견했다.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아스킨과 신경전을 하기도 했고, 생각에 빠져 있느라 못 봤는데…….
지금 보니 어찌 못 볼 수가 있나 싶은 비주얼이었다.
‘……대체 저거 얼마야?’
옆에선 신나게 나를 부르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상자 틈으로 삐져나온 금화에 눈을 고정한 채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내가 지금 차일드 가문으로 갈 예정인데, 너도 함께 가자꾸나.”
“제가 거길 왜 가죠? 전 조금 뒤에 할 일이 있어서 그만 돌아가 볼게요.”
처음부터 여기 올 생각도 없었다. 그 인간만 아니었다면.
내가 미련 없이 떠나려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집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보좌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처구니가 없어 보좌를 노려보았다.
“당장 비켜.”
“고, 공녀님 죄송합니다…….”
보좌는 표독스러운 내 시선에 진땀이 날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끝내 비켜나지 않았다.
“그래? 죄송한 일은 하면 안 되지.”
“으아악!”
보좌가 구두로 냅다 걷어차이고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막살기로 결심한 이상 평판 따위 개나 줘 버려라 싶은 상황인데 이런 거 하나 못할까?
나는 입술을 비죽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명을 내린 건 알츠베이트 공작이다.
내가 웃는 얼굴 그대로 노려보자, 공작은 천연덕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가엔 미소까지 띠는 듯했다.
“그래그래. 이 할애비가 부탁하마.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 들어줄 테니…….”
그 시선은 원하는 걸 들어준다기보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응징이 기다릴 거란, 차라리 훈련과 복종을 강요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이 영감탱이가 돌았나.
“오늘은 이 할애비와 함께 가자꾸나.”
뻔히 보이는 수였다. 화도 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 또한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머릿속을 굴렸다.
“할아버지, 정말 원하는 것 뭐든 들어주실 거예요?”
내 눈이 사르르 접혔다.
돌연 입 안의 혀처럼 굴자, 알츠베이트 공작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흡족하게 웃었다.
“네가 과연 나의 피를 잇긴 이었구나. 이 할애비를 상대로 협상이라. 좋아, 들어주마. 뭐가 필요한지 말해 보거라.”
나는 기다렸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좋아요. 제 부탁, 지금 말할게요. 레무트 공작에게서 빼앗은 영지 있죠? 그거 다 나 줘요.”
나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을 빤히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잠깐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공작은 곧 ‘하하하하하!’ 하고 큰소리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누가 봐도 태연한 척하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할애비가 죽고 나면 다 네 것이 될 것이거늘, 크흠……. 그걸 지금 받아 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더냐? 그리고, 영지 관리가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데, 네가 알긴 하는 것이냐?”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당황한 꼴이 참 유쾌하네, 영감탱.
‘저 영감의 역린은 무엇인가.’
우습게도 아스킨이었다.
자신이 몇 년이나 공을 들여, 심지어 약점인 여동생의 병까지 이용해 옭아맸지만 기어이 그 올가미를 벗고 나가 버린 존재.
나는 그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저 영감이 엿을 먹는 게 더 보고 싶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내 앞에서 심심하면 아스킨에게 빼앗은 것들을 자랑하듯 말하곤 했다.
내가 지금 말한 영지 또한 그런 것이었다.
레무트 공작가 정도 되면 다스리는 영지가 꽤 많았다.
지금은 줄어든 이유가 바로 이자를 갚지 못할 때면 이렇게 영지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또한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자를 갚지 못하게 수를 썼겠지만 말이다.
“저를 대가로 뺏은 거니, 처음부터 제 몫 아닌가요?”
나는 싱글싱글 웃었다.
여기서 네 거라 우기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먹겠다, 이 심보를 보이는 꼴이지. 어디 말해 봐.
“그리고 영지 관리 까짓거 한번 해 보면 되죠. 뭐 어렵나? 때 되면 세금 걷고, 영지민들 알아서 살라 하고.”
무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오신 분이 바로 나다.
영지가 주어진다면 이 세계에 최초의 자본주의를 보여 주겠노라……!
엉뚱한 생각을 하며 우아하게 위를 후볐다.
‘어차피 곧 죽어서 하지도 못할 일이니 상상만 해 보면 뭐 어때.’
드디어 내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건지,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이 조금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