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화를 내려던 그는 돌연 나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것처럼
“크흠, 샤를? 우리 샤를리즈가 대체 무엇에 뿔이 난 건지 모르겠구나. 이 할애비가 그 부탁 대신에 이번에 이웃 제국에서 들여오는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마. 그거면 됐지? 자자, 바쁘니 어서 준비하거라.”
어디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해?
나는 방긋, 상큼하게 미소했다.
“아뇨, 제 제안을 거절하셨으니, 전 오늘 제 개인 일정이나 진행할게요.”
어디서 밑장 빼기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안 건지, 아니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알츠베이트 공작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샤를리즈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이 인간은 악녀를 뭐 얼마나 백치처럼 본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샤를리즈’는 백치과 악녀도 아니었다.
얘는 사람과 상황을 따져 가며 사람을 괴롭힐 줄 아는, 머리까지 뛰어난 악녀였다.
그러니 그 아스킨을 몇 년간이나 집요하게 괴롭혀가면서도 아스킨의 한계치는 벗어나지 않게 각별히 주의한 거 아니겠는가.
‘어디서 봤는데, 눈치는 지능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이런 ‘샤를리즈’가 공작 앞에서는 보석이면 다 되는 것처럼 화를 풀었던 건.
첫 번째로 그녀 또한 저 공작이 자신을 귀여운 애완견 수준으로 보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두 번째로 그것마저도 애정이랍시고 원했기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을 하나 싶다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호라, 샤를리즈. 그래. 이 할애비가 졌다. 이제야 흥정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진짜 당황했던 주제에 아닌 척하는 꼴이 웃겼다.
속으로는 레무트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주기 싫어 배알이 꼴릴 텐데.
“그래, 이 가문의 핏줄답구나. 네 남편이자 앞으로 나의 후계가 될 자는 든든하겠어. 껄껄껄.”
오호라, ‘샤를리즈’는 다음 공작 후보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만 있었다면 알츠베이트를 통째로 뺏어 주는 건데 말이지.’
알츠베이트는 조금 전 내 앞을 가로막았던 보좌를 불렀다.
그는 아직 정강이가 아픈지 낑낑대며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무트 공작에게서 받은 영지를 샤를리즈 앞으로 이전하거라.”
“할아버지, 또 하나 더요.”
나는 눈을 사르르 접으며 엄지로 상자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또 하나, 저기 있는 금화들도 제가 가져갈게요. 괜찮죠? 이런 건 할아버지 재산에서 새발의 피 아닌가. 너무 멋져요.”
오, 영지민의 고혈, 영지민의 비명. 모두 모아서 돈을 번 자다워요.
“허허허, 이 녀석. 이 할애비가 너무 귀하게만 키웠더니, 이제는 할애비 수염까지 잡으려 드는구나.”
“차일드 가문에 저를 보내서 얻게 되실 이익에 비하면 아직 초라할 텐데. 뭘 그리 정색까지 하세요, 할아버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언변에 억지로나마 감탄하는 듯한 모습이던 공작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분노와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그래. 손녀야. 나는, 네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깝지 않다. 다 가져가거라.”
“…….”
“그리고 내가 한 일이 모두 널 위해서 하는 일이란 것을,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럼, 저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 나갈 준비하겠습니다.”
물론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왜 갑자기 무게를 잡고 난리야. 영감탱이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간과하지는 않았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록시디언에게 언질을 하나 해 줘 봐?
이이제이.
알츠베이트란 오랑캐는 폭군이라는 오랑캐로 물리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직은 누군가의 손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걸음을 되돌려 알츠베이트 공작의 보좌관 앞에 섰다.
보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면서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내 앞 가로막지 말렴. 나는 이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공녀다. 알겠니?”
대답하지 못하는 보좌관을 향해 말을 이었다.
“우리 테리가 새로운 먹이를 필요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널 떠올릴 일은 없으면 좋겠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공작 쪽을 보는가 싶던 보좌관이 공작의 끄덕임에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저기 금화들 내 방으로 옮겨 놔.”
* * *
샤를리즈가 집무실을 나간 뒤, 알츠베이트 공작은 앞에 놓인 식어 버린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노회한 공작의 얼굴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샤를리즈에게 알츠베이트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혈통상 가장 적법한 후계자이지만 하는 행동을 보아선 그가 평생 쌓아 온 것을 한순간에 탕진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키운 것은 자신이었지만, 이 순간 공작은 자신의 책임을 쏙 뺀 채 흡족함을 느꼈다.
샤를리즈를 이안 차일드에게 보낸 뒤, 그놈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놈이 추후 알츠베이트라는 이름을 모두 삼켜 버리는 것은 아닌가 불길한 생각을 했다.
‘오늘 본 모습은 그 걱정을 싹 달아나게 해 주는군.’
알츠베이트는 샤를리즈의 영악함에 만족감을 느끼는 동시에 제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자신의 손바닥 안일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
‘영지와 돈에 욕심을 가지는 것을 보아선, 계속해서 내 재산에 기대려 들겠지.’
결코 황실은 주지 못할 돈을 안겨 주리라.
마음속이 아주 든든한 기분마저 피어올랐다.
잠시 후, 차일드 가문 앞에는 알츠베이트 가문 깃발을 매단 마차들이 줄지어 도착했다.
‘문양을 붙인 마차가 둘?’
깃발과 다르게 가문 문양을 붙일 수 있는 마차는 오직 그 가문의 직계손이 탔을 때였다.
마차가 둘이니, 직계 또한 둘이란 소리였다.
마중을 나와 있던 이안은 두 개의 마차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는 잠시뿐이었다.
줄줄이 이어진 마차의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알츠베이트 공작의 의도가 눈에 보였다.
가문의 힘을 보여 주고자 하는 셈, 기선제압이다.
이안은 오늘은 특히나 어떠한 실수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각오를 다졌다.
한편으로는 문양을 붙인 마차가 둘이란 사실에 묘하게도 기대감을 가진 자신이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이거야 원,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안은 미약한 난감함을 느끼며 문이 열리는 마차로 향했다.
“알츠베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래. 이웃 왕국에 다녀왔다고 하더니, 어째 인물이 더 환해졌군. 그래.”
“과찬이십니다.”
“백작은?”
“아, 송구합니다. 아버지께서 급한 회의가 있으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큰 실례가 되어 정말 죄송한 말씀과 함께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작은 오히려 제가 원한 인물이 나온 것에 흡족한 상태였다.
“아닐세. 껄껄껄. 사람이 바쁜 게 좋은 것이지.”
공작과 이안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번째 마차의 문이 열렸다.
이안은 공작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샤를리즈의 에스코트를 위해 움직였다.
샤를리즈의 무심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이안은 어째서인지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모른 척 손을 내미려 했다.
“샤를리즈 공녀님께서도 오셨군요. 방문하실 줄 진작 알았다면 제가 호위를 위해 먼저 가서 대기할 것을 그랬습니다.”
부드럽고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이안이 샤를리즈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샤를리즈는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제트.”
“예, 공녀님.”
샤를리즈의 부름에 제트는 빠르게 이동하여, 그녀의 손을 잡고는 편안하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이안의 웃는 시선이 커다란 덩치를 가진 제트에게 향했다.
‘흐음, 이건 또 뭘까. 하나를 해결했나 싶더니, 이번엔 또 다른 존재라…….’
샤를리즈가 이안을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 한순간이나마 이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는 아주 잠시일 뿐, 이안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두 사람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곧이어 회의가 끝난 백작이 빠르게 나타나 알츠베이트 공작을 맞이하였다.
알츠베이트 공작과 차일드 백작, 이안 그리고 샤를리즈까지.
네 사람이 집무실로 들어갈 즈음,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안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듯한 고갯짓을 했다.
의미심장한 고갯짓이었다.
‘이런.’
알츠베이트 공작의 뜻을 이해한 이안은 샤를리즈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샤를리즈는 어차피 이쪽이나 저쪽이나 짜증이 나는 면상이긴 매한가지였지만, 좀 더 짜증이 나는 똥 쪽을 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똥보다는 나은 된장이 된 이안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곧이어 응접실에 마주 앉은 그들은 각기 하녀가 내어온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그간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얼굴에서…… 어쩐지 인생을 다 사신 것 같은 노인의 표정이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만.”
샤를리즈는 황당했다. 이 XX, 이제 관상도 보나?
“왜, 사람 얼굴만 봐도 미래가 읽히니?”
“음? 점쟁이를 말하는 것입니까. 글쎄요, 어떻게 한번 봐 드릴까요?”
샤를리즈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이안은 찻잔을 내려놓은 동시에 탁자를 잡고 반쯤 일어나 샤를리즈를 유심히 응시했다.
“어디 보자, 제국 제일의 미인께 장차 향후 30년간은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미래가 보이는군요.”
이거 순 엉터리 새끼네. 샤를리즈가 속으로 혀를 찼다.
30년은커녕 3일도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냥 조용히 있기를 바라는데.”
“아, 한 가지 미래가 더 보이는군요.”
이안이 언제나 방패처럼 두르던 미소를 살짝 지워 내며 진지한 듯 다정한 얼굴을 했다.
“공녀님은…… 반드시 행복해지실 겁니다. 제가 확신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렇게 만들어 드릴 상대가, 저라면…… 가장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