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
나는 이안의 말에 조용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난치는 게 아니군.’
언제나처럼 능글능글 맞고 다정한 듯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에메랄드빛 예쁜 색의 눈에 고인 시선은 한없이 진지했다.
장난치듯 고백했다면 참지 않고 이번에야말로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찼을지도 몰랐다.
이제 거리낄 게 없으니까.
나는 대답하기 직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눈앞의 찻잔에 시선을 머물렀다.
“그 말이 나와의 약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니?”
“그럴 겁니다. 단, 공녀님께서 저를 허락하신다면요.”
“넌 네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니?”
“그거야…….”
나는 이안의 말을 가로채며 그를 응시했다.
“대답,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난 네게 단 한 번밖에 기회를 주지 않을 거거든.”
생각해 보면 연회장에서 아스킨 그놈에게 끝끝내 걷어차이고 비를 맞는 동안 저놈의 도움을 받긴 했다.
당시의 내게는 별 도움같이 느껴지지 않는 도움이었지만, 어쨌거나 도움에 속한다.
현재 내 머릿속에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파혼’이라는 일이 일어났건만 내가 왜 죽지 않는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설마 신이 그 지령을 철회한 건 아닐 테고,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만.
정말 시간이 주어진 거라면…… 이놈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아도 괜찮지 않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이 인간의 속을 알 필요가 있었다.
‘보통 이런 인간은 꿍꿍이를 감추기만 할 뿐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지.’
그렇기에 이런 점을 자극했다.
여기서까지도 숨긴다면 다신 기회를 주지 않을 예정이었으니까.
“글쎄요, 저는…… 제 반려에게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좋은 사람일 겁니다.”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눈을 화려하게 휘었다.
“넌 거짓말쟁이네.”
“…….”
“뭐, 대답은 알았어.”
어쩌면 내게 죽을 때까지 시간이 주어진 게, 신도 알츠베이트 가문이 망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닌 건가. 내 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래, 신 새끼야. 너도 양심이 있으면 그 정도는 배려해 주겠지.
“네가 그렇게 가식을 벗지 않겠다면야. 그러도록 해.”
“공녀님.”
“아, 탓하는 거 아니야. 네가 정말 그런 놈이라면, 그런 놈인 대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니까.”
내 눈은 여전히 휘어 있었고, 이안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달싹이는 입술이 보였지만, 그는 곧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띠었다.
“쓸모라니요?”
“관심이 있니? 내가 앞으로 좀 거대한 깽판을 칠 건데.”
“깽……판이요?”
나는 끄덕였다.
“나는 알츠베이트를 완전히 무너트릴 거야. 참고로 그냥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라 되도록 폭삭, 돈을 탈탈 털든, 아예 멸망을 시키든. 아…… 아니면 모든 게 내 손에 들어와도 좋겠다.”
그럴 시간까진 없겠지만 말이야.
이안은 이것이 진담인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려 던진 질 나쁜 농담인지 재어 보는 시선이었다.
이에 나는 한마디 툭 무심하게 던졌다.
“사치하기 바쁜, 하는 짓이라곤 패악만 부리는 골 빈 공녀의 허언 같니?”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갑자기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내가 손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내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네 알 바는 아니잖니? 어차피 너 또한 어떤 꿍꿍이가 있어 내 할아버지의 약혼 제안을 받아들였을 텐데. 아, 거기 내 허락이 중요하긴 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제 관심이 모두 어떤 꿍꿍이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럼 아니라고 할 수 있니?”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믿어 주십니까?”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나는 더욱 예쁘게 웃으며 손에 잡힌 것을 집어던졌다.
퍼억!
“어머, 실례.”
나는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난 말장난할 생각이 없어. 이안 차일드.”
내가 던진 건 티스푼이었다.
땡그랑 소리 내며 떨어진 그것은 우리 사이의 침묵을 만드는 동시에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선택해, 나와 깽판 한번 제대로 칠지. 아니면 이대로 나가서 내 할아버지의 개가 될지.”
나는 떨어진 티스푼에 일부러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아, 물론 여기서 나가서 내가 했던 말을 쨍알쨍알 일러바쳐도 상관없어.”
대신 그때 부로 너와 난 적이야, 확실한. 내 눈이 이리 단정 짓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남자니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잠깐의 침묵을 두던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생각의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긍정의 의미였다.
“오래는 못 줘.”
“하루, 하루면 됩니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선 능글능글함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그대로 수긍하기로 했다.
어차피 잃을 게 없는 놈이 제일 무섭다고, 나는 주변에 있는 모든 걸 이용하다가 뒈질 생각이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차를 마시는데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얼굴이 어느새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예의 바른 척은 다 하더니, 누가 사람 얼굴을 그렇게 훔쳐보래?”
“훔쳐봤다기보다는…… 대놓고 본 쪽이 아니던가요?”
“그래? 눈 찔려 볼래?”
“죄송합니다.”
이안은 고민하더니 3초 만에 싱긋 웃었다.
“그럼 제가 공녀님의 얼굴을 쳐다봐도 되겠습니까? 쳐다보면서 생각하면 공녀님의 편을 들고 싶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빌고 싶은 건 아닌데?”
“하하하, 봐주십시오. 그쪽에 붙는 건, 저로서도 큰 모험이 될 겁니다.”
“모험이라 말하는 것치고는 정말 여유로운 얼굴이라 퍽 믿음이 안 가네? 그래서 내가 허락하면 뭘 해 줄 건데?”
“지금 제안해 주신 것을 제외하고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꺼…….”
“꺼지라는 말씀도 빼고요.”
쯧, 나는 혀를 찼다.
그러다 돌연 태도를 바꿔 은근하게 미소했다.
“그래. 꺼지라고 하지 않을게. 일 얘기나 해 봐. 오늘 저 영감, 아니 할아버지가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이지?”
이제 알츠베이트 공작을 향한 무심함과 불쾌감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자, 이안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중요한 계약을 하러 오신 듯합니다. 물론 제 추측이지만요.”
“중요한 계약?”
일단 나를 어떻게든 데려온 것만 봐도 바로 짐작이 갔다.
내 얼굴로 더욱 큰 불쾌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 망할 영감탱이가 날 또 팔아먹겠다는 거겠지. 그래. 내가 아주 제대로 개망신 안겨 줄 테니까 잔뜩 기대하라고.’
“공녀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니, 됐고. 그래서 중요한 계약이 뭔데? 그거나 계속 말해 봐.”
이안에게서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아, 그래. 재 보는 중이라 말하기 싫다 이거지?”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나를 막으려는 건지 이안이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안의 앞을 제트가 막아섰다.
“공녀님의 앞을 막아서지 마십시오.”
오, 든든한데? 불쾌했던 감정이 조금 가셨다.
게다가 제트의 목덜미로 삐죽 선 핏줄이 나를 향한 무례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은 기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힘을 줄 만큼 경계 대상이란 건데, 이안 저놈이 그런 무력도 있어?’
조금 놀란 기분을 숨기며, 난 제트를 툭 두드려 물러서게 했다.
“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는데?”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공녀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리고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자 한다면. 그 전에 조건을 한 가지 붙여도 되겠습니까?”
아아. 조건. 나는 픽 웃었다.
“조건? 내가 그 조건까지 받아들이면서 왜 들어야 하는 건가 싶은데?”
이안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닌지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확실히 반반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알맹이가 이래서야.
“너는 네가 특별한 줄 알지? 이안 차일드. 너도 다른 놈이랑 똑같아. 잘난 척하지 말고 꺼져.”
* * *
같은 시간.
차일드 백작의 집무실 공기는 무거웠다.
온화한 미소로 서로를 맞이했던 것과는 다르게 두 가문의 회담은 긴장감이 흘렀다.
앞에 놓인 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마저 압박감에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차일드 백작.”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나는 빙빙 둘러 이야기하는 건 질색이네. 그런 건 시답잖은 잡배나 하는 짓이지.”
“동감합니다.”
“다행이군. 그럼 직설적으로 말하지. 이번 피스텐 지역 토벌을 준비하고 있겠지? 새로운 로드를 위해서 말일세.”
“…….”
“그 지역 토벌에 우리 가문도 참여하겠네.”
“아, 그, 네……. 송구하나 각하 토벌대를 이끄는 대장이…….”
“아스킨 레무트겠지. 왜, 아닌가?”
차일드 백작은 은밀하게 진행하던 일이 낱낱이 드러났음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