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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22/194)

121화

알츠베이트 공작만큼은 아니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소상공인이었던 차일드 가문을 대형상단으로 키운 백작의 얼굴에 난처함이 나타났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를 알아차리면서도 앞에 놓인 자신의 먹이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날 위해 놀란 표정까지 지어 주는 걸 보니, 역시 제국 최고의 상단을 이끌 만하군.”

“알고 계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공작님을 속이려던 건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백작의 마음 다 알고 있지. 암. 그 큰돈을 그놈이 구해 왔다면, 백작 말고는 없지 않겠나?”

“송구합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담담하게 인정하는 백작을 보며 속으로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다.

“아닐세, 장사꾼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해야지. 안 그렇나?”

“…….”

“피스텐 지역이라면 그놈만 한 놈도 없으니,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난 그 덕에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돈을 회수했고, 이렇게 좋은 자리도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 토벌에 자신의 가문을 넣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압박이었다.

차일드 백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시선으로 백작을 제압하면서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셨다.

“한데 말이지……. 토벌이 끝난 후, 레무트 그놈을 그대로 죽이는 건 어떤가?”

공작의 가슴에서는 괘씸한 아스킨 레무트를 향한 증오와 모멸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 아스킨 레무트가 죽는다면, 자신이 그토록 써먹고 싶어 안달이 나는 손녀가 함께 죽는 것도 모른 채.

아니, 이미 자신이 만든 굴레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공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몇 배로 돌아올지 전혀 모른 채로.

차일드 백작은 이번에야말로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레무트 공작을 죽인다니요?”

“사냥이 끝난 뒤 쓸모없어진 사냥개는 삶아 먹는단 고언을 자네 또한 알고 있겠지?”

“…….”

“그놈을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한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이 또한 이번 토벌이 끝나고서 새 로드를 개척하게 된다면, 메꾸고도 남을 돈이 수중에 떨어지겠지. 수지가 맞는 장사 아닌 가?”

차일드 백작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어떻게 죽일 생각이십니까?”

“이 늙은이는 토벌에 참여하지 않아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네. 아수라장이지. 인간들의 전쟁과 다르게 아주 야만적이고 위험한 곳이라는 것도. 그러다 몬스터 수라장에 갇혀 누군가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곳 아닌가?”

“…….”

“갑자기 몸이 굳어서 몬스터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죽게 되었다. 하지만 시체에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을 테지.”

공작이 느릿하게 웃었다.

“어떤가, 내가 쓴 소설은 재미난가?”

은밀하게 독을 구해 줄 테니 아스킨 레무트에게 먹여 처리하라는 소리였다.

차일드 백작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선택지였지만, 이리와 뱀의 수장을 앞에 두고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공작이 무언의 긍정을 느끼고는 다시 한번 차를 음미했다.

즐거운 날이었다.

“황실 쪽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네.”

“그 문제는 레무트 공작이 용병으로 참여함으로써 해결된 문제 아니겠습니까?”

“허허,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아니, 황제를 모르는 것인가?”

공작의 앞으로 맹수와도 같은 폭군 록시디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노회한 알츠베이트 공작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그놈이 샤를리즈를 약간이라도 덜 아꼈다면, 지금보다 더 마음껏 샤를리즈를 세뇌하고 조정했을 것인데.’

새삼 아쉬움을 느꼈다.

“토벌이 성공했을 때 욕심 많은 황실이 과연 넘어가 줄 듯싶은가? 병력에 드는 비용 절반은 내가 부담하겠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으나, 이로 인해 제 가문은 더 큰 빚을 지게 될까 우려됩니다.”

“오, 아니지, 아니지. 난 양심은 있는 사람일세. 계산은 정확해야지. 그래야 서로 오래 볼 것이 아닌가?”

알츠베이트 공작이 신호하자, 보좌가 제 품에서 두툼한 계약서를 꺼내어 백작에게 내밀었다.

백작은 안경까지 쓰고선 꼼꼼히 계약서를 읽은 뒤, 마침내 자신의 서명을 그려 넣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흡족한 미소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번 일 이후엔 우리 두 가문이 이런 계약서 따위는 필요 없는 관계가 된다면 제국에서 제일 높은 곳을 향할 텐데…… 안 그런가?”

“……제 아들 녀석을 이리도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후 자신의 아들인 이안과 샤를리즈의 약혼 이야기임을 모를 리 없는 백작이 공손히 말했다.

정작 그 아들인 이안이 아주 진지하게 샤를리즈의 손을 잡고 알츠베이트 공작이 X될 작전에 낄지 말지 고민 중인 것도 모른 채.

“내 손녀를 맞이하기엔 충분하지. 거기에 내가 날개까지 달아 주고 싶으니, 자네도 이안에게 잘 말해 보게나. 우리 샤를리즈는 내가 여기 간다니까…… 아침부터 따라나서는 모양을 봐서는, 좋은 소식도 머지않았네! 껄껄껄.”

정작 샤를리즈가 조건을 쥐고 흔든 후에야 이곳에 오겠다고 결정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순간, 차일드 백작의 저울은 아스킨 레무트에게 내건 것에서 알츠베이트 쪽으로 기울었다.

훌륭한 상인은 판돈을 양쪽에 거는 법, 어느 쪽이 이기든 그쪽이 자신의 편이면 된 것이다. 장사꾼다운 얍삽한 결단이었다.

마주앉은 두 남자는 서로 다른 꿈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마치 자신의 꿈만이 이루어질 거라는 자신감에 찬 허황된 웃음이었다.

그 끝에서 자신이 가장 쉽고 우습게 보던 손녀의 손에 어떻게 나락으로 치닫게 되는지 전혀 모른 채로.

* * *

차일드 백작가 방문을 마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샤를리즈는 모든 시종을 물리고서는 방 안에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커튼을 쳐 버렸다.

침대에 누워 캄캄해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좋아, 알츠베이트 그 영감 XX를 엿 먹일 수단과 방법은 거의 완벽해지고 있어.’

이렇게 어두울수록 회사를 마치고 쓰러져 잠들기 직전 여러 생각을 하던 때가 떠올라 집중이 잘 됐다.

지구에서는 대개가 ‘대체 언제쯤 퇴사할까, 퇴사 마렵다, 이직은 언제 하지?’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다 끝나면 이 저택에 불이라도 질러 버릴까?’

아니다. 그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지도 모르니까 폐기다.

지금 막 세운 이 완벽한 계획 실행 전에 이 영감탱을 어떻게 괴롭힐까.

샤를리즈가 골똘히 생각을 하는 동안 어두웠던 방 안에 환하게 빛나는 구멍이 생겼다.

이내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빛은 점점 커져서 방 안을 환하게 비출 정도였다.

‘저건…….’

샤를리즈는 구멍을 똑똑히 보았지만 무신경하게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저건, 노아가 멋대로 드나드는 구멍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구멍으로 노아가 먼저 나타나더니 이어서 폭군 록시디언이 엄청난 존재감과 함께 등장했다.

“뭐야, 방이 왜 이렇게 깜깜해?”

“어차피 폐하께서는 이런 어둠쯤은 문제없이 잘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거야 그렇지만, 아니 이건 무슨 유령도 아니고 밤처럼 해 놨어? 헷갈리게.”

샤를리즈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너, 누워서 뭐 하고 있냐? 벌써 자냐?”

“어. 자니까 돌아가라…….”

기시감이 느껴졌다. 전생의 오빠 윤지훈도 꼭 자신이 누워 있으면 나타나서는 약을 올리곤 했는데……. 이 인간 또한 다르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히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짓궂게 웃는 얼굴이 훤했다.

“안 자네. 야, 잠깐 일어나 봐.”

“내 말 못 들었어? 꺼지라고. 꼭 뭘 맞아야 직성이 풀리냐?”

“어어, 이거 오늘 왜 이렇게 사나워?”

“내 입에서 꼭 꺼지라는 말이 나와야 다들 직성이 풀리는 거야 뭐야?”

생각 이상으로 날카로운 반응에 폭군이 사나운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끔 꿀 먹어 이빨이 달라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곧 샤를리즈에게 압도되었던 제 모습에 자존심 팍 상한 폭군이 노아에게 인상을 썼다.

‘쟤 왜 저래?’

입모양으로 물었지만, 노아라고 샤를리즈가 왜 저렇게 성이 났는지 아는 건 아니었기에 건장한 성인 둘은 그저 정중한 자세로 조용하게 샤를리즈님의 노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짜증이야 나지만, 지금은 샤를리즈 님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이야기를 할 수 없을 테니까.

한참을 기다린 덕에 드디어 기다렸던 다정한 목소리! 는 아니고 샤를리즈의 짜증을 한 번 더 들을 수 있었다.

샤를리즈께서는 섬섬옥수로 친히 베개를 던져 주었다.

“아, 오빠, 왜 왔냐고. 진짜 맞아야 돌아갈래?”

“야야, 알겠으니까. 저기요 여동생님? 내가 님이라고 불러 줄 테니까 좀 일어나서 들어 볼래?”

샤를리즈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놈이 왜 고집을 부리는가, 그것도 안 하던 호칭에 비위까지 맞춰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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