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3/194)

122화

“얼씨구?”

“일어나서 들어봐. 그래야 이유를 말해 줄 거 아니야.”

“이유 안 들을 테니까 그만 나가 주는 건 어때?”

남매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이거 나한테 뭐 시키려고 드는 거 아니야?’

윤지훈도 그랬다.

꼭 심부름시키기 전에만 ‘여동생님’, ‘윤지후 님’, 생난리였다.

샤를리즈는 생긋 웃었다. 그와 함께 폭군의 얼굴 또한 조금 느슨해졌다.

‘훼이크다, 멍청아!’

샤를리즈가 옆에 있는 베개를 있는 힘껏 던졌으나, 폭군은 그것을 오히려 옆에 있던 노아의 얼굴로 받아쳐 버렸다.

졸지에 라켓이 된 노아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 퇴사하고 싶다.

폭군을 모시고 이따금 하게 된 생각을 또 한 번 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기껏 생각해 줘서 이렇게 달려왔더니.”

“생각해 주는 사람이 이전엔 돈 한번 빌려주는데 그렇게 재고 따졌니?”

“어허. 정말 생각해 준대요.”

“뚫린 입이라 뱉는다고 다 말이 아니네요, 폐하.”

“이게 진짜.”

폭군이 슬쩍 찡그렸다.

“알츠베이트 공작 엿 먹이는 건데 싫으면 말아라.”

폭군은 정말 빈정이 상한 듯 노아에게 눈짓했다.

다시 한번 깜깜했던 방 안에 흰색 빛이 드러나는 순간 폭군은 제 목덜미를 잡는 손에 캑캑 댔다.

“미쳤냐!”

“아니이,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좀 하지 그랬어요, 오빠?”

“미쳤냐, 징그러우니까 그 말투 집어 치워라, 응?”

록시디언이 징그럽다는 듯 샤를리즈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탁탁 털었다.

모로 보나 사이가 더럽게 좋지 않은 한편으로는 의좋은 남매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엿 먹이는 방법이 뭔데?”

이전과는 다르게 생기마저 보이는 여동생의 모습에 록시디언은 턱을 쓸어내렸다.

한참이나 제 어여쁜 여동생을 보다 피식 웃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

“뭘?”

이윽고 떨어진 폭군의 말은 샤를리즈가 전혀 생각지 못한 내용이었다.

“너, 그놈이랑 다시 약혼할 생각 있냐?”

그놈? 샤를리즈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3초가 지난 뒤에야 이해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게 폭군 이놈이 아스킨을 좀 싫어했던가.

배알도 없는 놈, 반편이 같은 놈 하면서 욕을 욕을 하면서 이상한 수작까지 써서 연회에 못 오게 하던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소리인가?

“미쳤어?”

샤를리즈의 얼굴에서 살기마저 느껴졌다.

“아니, 난 네 각오를 묻는 거야.”

그러나 받아치는 폭군의 얼굴은 여유로운 듯 진지하기만 했다.

적어도 장난기는 없었단 거다.

“그 알츠베이트 공작을 엿 먹이기 위해서 설사 그놈과 다시 연인인 척이라도 할 수 있냐고.”

……그거, 전제부터 잘못되지 않았나?

한 번도 연인인 적이 없는데?

“왜,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

“……무슨 소문?”

폭군이 피식 웃었다.

겨우 어둠이 눈에 익었다지만 검을 모르는 샤를리즈는 여전히 폭군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소리로 그저 웃었겠거니 했다.

제 오빠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는 것을 모른 채.

“이번엔 그놈이 네게 푹 빠져서 졸졸 쫓는다는 소문?”

“무슨 개소리야?”

“진짜야.”

록시디언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용하는 건 어떠냐고 묻고 싶은데.”

“이용?”

샤를리즈가 마찬가지로 나직하게 물었다.

약간의 심드렁함과 이해할 수 없음이 묻어난 목소리였다.

“오빠,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소문이 났다니, 샤를리즈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 난……, 까지 생각한 샤를리즈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동물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아스킨을 목격했다.

설마, 그때 이후로 그런 소문이 돈단 말인가?

‘……그놈 새끼는 왜 소문 하나 간수를 못 하고 다니는 거야?’

이상했다. 자신의 소문을 방관하다 못해 철저히 즐기던 ‘샤를리즈’와 다르게 아스킨은 청빈하다 못해 꼿꼿한 성격상 저와 관련한 헛소문을 절대 그냥 두지 않을 인간이었다.

그런 소문이 돌게 뒀단 말인가?

아니면, 그 소문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단 말인가.

그 정도로 바쁘려면 아리아가 악화되었단 소리일 텐데 그런 언질은 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설마하니 그놈의 마음이 변해 버렸다. 라는 선택지가 있겠지만.

샤를리즈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용은 어떻게 하자는 건데?”

어둠 속에서 록시디언이 샤를리즈를 빤히 응시했다.

자신처럼 어둠도 빛 아래에서처럼 보지 못하는 동생은 제 표정을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거야, 네 손에 달려 있지 않겠니, 내 동생아?”

“뭐야. 뭔가 대단한 작전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 건 본인이면서?”

“어어. 이거 놔라? 어허, 황제 몸에 함부로 손대면 사형에 처하는 거 모르냐?”

“나는 그 지엄하신 황제 나리를 아주 다-정하게 만드는 방법을 아는데. 어때?”

“…….”

록시디언은 턱을 쓰다듬었다.

“똑같이 돌려주자는 거지.”

“뭘 똑같이?”

“소문이 진짜라면, 너도 똑같이 돌려주라는 말이다. 동생아.”

뭘 똑같이 즐겨?

설마하니 졸졸 쫓아다니는 아스킨의 모습, 그리고 그런 모습을 즐기라는 건가? 샤를리즈는 짜증을 내려다가 멈칫했다.

……솔직히 아주 조금은 혹했기 때문이었다.

“자, 동생아 이제 오라버니가 헛소리를 하러 온 게 아니란 걸 믿겠느냐? 어흠, 목이 좀 마른데.”

죽느냐, 사느냐. 샤를리즈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하지만 그 아스킨이 정말로 졸졸 쫓아다니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관심을 갈구한다면?

자신이 못 이기는 척 튕기다 받아 주기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하녀 부르면 되지?”

샤를리즈의 목소리가 꺾인 것을 발견한 록시디언이 화색을 띠었다.

“내가 여기 온 걸 만천하에 알릴 생각이냐?”

그러면서 직접 가서 시원한 물이라도 떠 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짓궂음이 물씬 배어들었다.

“이봐, 노아 너도 목 마르지?”

폭군의 압박에 저도 모르게 끄덕이던 노아는 샤를리즈의 서늘한 시선을 느끼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지나간 뒤, 노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자, 이제 마실 것도 배 터지게 마셨을 테니까 빨리 말해 봐. 그 소문은 뭐고, 알츠베이트 공작에게 엿을 먹이는 건 또 무슨 방법인데?”

실랑이가 지나가는 동안에 샤를리즈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여동생의 당혹한 모습을 즐기던 록시디언으로서는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저게 물심부름 따위를 해 주는 걸 더 즐겨야 하는데.

그러나 더는 참지 않겠다는 눈초리인 걸 봐서는 더 놀려먹었다간 못 볼 꼴을 보일 건 자신일 것 같았다.

짐승 같은 감으로 이를 깨달은 록시디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입을 열었다.

“쯧쯔, 급한 성질머리 하고는. 너, 오늘 차일드 백작 가문에 다녀왔지?”

“뭐야? 그 영감 골탕 먹일 거리를 알려 줄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내 뒷조사 내용을 왜 읊는 건데?”

“그 영감이 괜히 거길 갔겠냐. 그 인간이 가장 잘하는 짓이 뭐지?”

“…….”

샤를리즈가 잠시 틈을 둔 끝에 짧게 대답했다.

“돈.”

“그래. 이번에 무언가를 꾸미는데, 그게 큰 건인 것 같다.”

알츠베이트가 움직일 정도의 큰 건이라면 대규모 돈이 엮인 것. 그리고 대체로 불법이거나 황실의 눈에 거슬릴 법한 일인 법.

“그래서?”

“너 머리가 안 돌아가냐? 큰 건이면 당연히 방해해야지. 모르고 한 소린 아닐 텐데?”

“사람을 끌어들이려면 정보부터 토해 내셔야지. 그 큰 건이 뭔데?”

“몰라. 그건 나도 모르지.”

“…….”

“……라는 건 이 지엄한 황제의 고급스러운 농담이었으니 목걸이에서 손을 떼거라 동생아.”

누가 봐도 뭔갈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뻔뻔스레 구는 것이 딱 얄미운 몰골이었다.

저게 책 속 남주라니……. 갑자기 여기 없는 여주가 불쌍해졌다.

샤를리즈는 이제 원작 속의 카리스마 넘치고 광기 어린 남자주인공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정확한 건 아직 조사 중이라 그래. 요즘 차일드 백작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서 알아보는 중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아침부터 너와 함께 차일드 가문을 방문했다길래 와 본 거니까.”

록시디언의 이야기를 듣던 샤를리즈는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차일드 가문과 알츠베이트 공작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간 자리다.

심지어 아스킨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자신에게 주면서까지 말이다.

‘분명 그 영감이면, 계약서를 썼을 거야. 절대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 성격 때문에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기니까.’

이제 샤를리즈는 알츠베이트 공작을 잘 알았다.

피가 섞인 존재조차 믿지 못하는 그 음흉하고 음침한 인간을.

“아하.”

계산을 끝낸 샤를리즈의 손가락이 툭 소파 손잡이를 쳤다.

“아, 그래서 나를 통해서 정보도 캐내고, 내가 두 가문 사이의 일에 깽판을 놓으면, 오빠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겠다?”

한국 속담으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 이 소리 되겠다.

정곡이었다. 폭군은 웃으면서도 은근히 당황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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