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4/194)

123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근데 너 갑자기 머리가 잘 돌아간다?”

샤를리즈는 이죽거리는 록시디언 얼굴 앞으로 목걸이를 내밀었다.

몸을 뒤로 물리려던 록시디언은 기겁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변하는 게 죽어도 싫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호라? 건수를 잡은 샤를리즈가 본격적으로 목걸이를 손에 쥐는 것과 함께 뒷걸음질 치던 록시디언이 아직도 열려 있던 황성으로 이어지는 포탈 속으로 툭 사라져 버렸다.

샤를리즈는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며, 노아에게 눈짓으로 빨리 뒤따라가기나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포탈로 환했던 빛이 사라진 방 안은 다시 어둠으로 꽉 채워졌다.

‘잠이 확 깼네.’

샤를리즈는 커튼을 확 젖혔다.

어둡게 물든 저녁 하늘이 그녀를 반겼다. 저녁이라지만, 안개가 잔뜩 낀 바깥의 풍경은 야심한 밤과 다를 바 없었다.

‘소문.’

샤를리즈는 창문 밖에 시선을 둔 채 록시디언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실없는 소리만 하고 간 것처럼 느껴졌지만 사실상 중요한 말들을 던지고 갔다.

이어서 알츠베이트 공작과 차일드 가문을 떠올렸다.

안개가 가득 낀 밖을 다시 한번 보았다.

자신이 행동을 옮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 결심했다. 그건 분명 거기에 있을 거야. 항상 그곳에서 꺼내 왔으니까.’

아직 공작은 귀가하지 않았다.

늘 공작의 마차를 세워 두는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증거였다.

샤를리즈가 방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샤를리즈 앞을 가로막았다.

다름 아닌 제트였다.

“공녀님, 실례가 안 된다면 혹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샤를리즈는 우묵한 시선이 흘끗 눈을 던졌다.

계속 방문 앞을 지켰던 걸까? 방 안에 들어가기 전 모두 얼씬도 하지 말란 명을 내린 탓에 복도에는 제트뿐이었다.

“방 안이 답답해서 산책이나 가려고.”

그녀는 ‘평소처럼 내가 어딜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저도 함께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샤를리즈는 제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트의 시선은 마치 샤를리즈가 산책이 아니라 무언인가 하러 가는 것임을 아는 듯한 눈빛이었다.

샤를리즈는 픽 웃었다.

“나 혼자 가고 싶어. 걸리면 난 죽진 않지만 네가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저는 괜찮습니다.”

“말했잖아. 나는 잔소리 좀 듣겠지만, 너는 바로 죽은 목숨이라고.”

샤를리즈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이는 생의 무언가를 놓은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어떠한 광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난 미친 짓을 하러 갈 거야. 알츠베이트 공작의 것을 훔치러 갈 거거든.”

“…….”

동시에 자신만만하여 생기마저 도는 시선이었다.

샤를리즈가 예쁘게 웃었다.

“이딴 가문 망해 버리라지.”

제트는 웃지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심지어 놀라지도 않았다.

“그것이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까?”

“아, 뭐가? 알츠베이트가 망하는 거? 그렇다면?”

“공녀님을 위한 일을 하다 죽는다면 저는 제 소임을 다하고 죽는 셈입니다.”

샤를리즈는 당황하는 대신에 가만히 생각했다.

‘세상에, 여기 나 말고 미친 사람이 또 있네?’

그녀는 다시 한번 제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우직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향기가 느껴지자, 제트는 처음으로 당황을 보였다.

샤를리즈의 손끝이 장갑을 낀 커다란 손등을 스쳤다.

경직된 손이었다.

“제트, 넌 내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믿는 사람인데, 네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내게 다음이 있겠어?”

“……공녀님.”

“이건 명령이야. 내 명령을 무시하진 않겠지?”

샤를리즈가 생긋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제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후,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녀가 훔쳐야 할 것은 그곳에 있었다.

한편, 제트는 멀어지는 샤를리즈를 바라보며, 공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자신의 신분을 되새김질했다.

동시에…… 자신의 진짜 신분을 조용히 떠올렸다.

* * *

복도로 들어선 나는 고요한 복도를 티가 나지 않게 살폈다.

“공작님께서는 오늘 늦으신다지? 아침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건가?”

“조금 전에 들르셨다가 급히 또 나가셨다던데.”

“그렇군.”

오늘 온종일 돌아오지 않은 줄로만 알았던 알츠베이트 공작은 저택에 왔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다시 나간 모양이었다.

‘잘됐어.’

주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집무실 주변은 한산했다.

나는 무심한 눈으로 복도를 눈에 익힌 뒤 주변을 지나가는 척 계속 걸었다.

정원으로 나오자, 쥐 죽은 듯한 공간이 나를 반겼다.

순찰하거나 저 멀리 벽을 지키듯 서 있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거리가 꽤 있었다.

나는 산책하는 척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 뒤편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창문이 보이는 공간까지 왔을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집무실은 불이 꺼진 상태였다.

‘문으로 들어갔다면 좋겠지만 경비병을 따돌리려다가 괜히 일이 커지면 안 되니까, 이 방법밖에 없다.’

잠시 뒤, 나는 얌전히 신발을 벗어 두고 낑낑거리며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샤를리즈의 몸이 가는 편이라 가능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근력이 있어서 놀랐다.

‘악!’

하마터면 나무에 붙은 벌레를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혀가 아릴 정도로 강하게 깨물어 비명을 참아 냈다.

이 근처는 테리의 집이 멀지 않았다.

테리는 낯선 사람이 오면 미친 듯이 짖어 댔기에 순찰 인원이 비교적 한산하게 돌아다닌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샤를리즈’ 기억 속에 있는 내용이지만 말이다.

‘근데 샤를리즈는 왜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

순간 의문이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운이 좋게도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니까.

어렵사리 도착한 창문을 슬며시 밀자, 다행히도 문이 소리 없이 열려 주었다.

‘허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제국 최고의 가문답게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어오기는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어려웠으나, 내부는 이리도 허술할지 누가 알았으랴.

‘테리를 지나치게 믿고 있는 건가?’

공작은 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문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며 못마땅해하던 모습이 ‘샤를리즈’의 기억에 있었다.

나는 냉소적이 되어 비웃었다.

‘그렇게 욕을 해도 필요하면 가차 없이 가져다 쓰는구나.’

알면 알수록 참 혐오스러운 영감이었다.

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조심조심 공작의 책상으로 다가가 유심히 보았다.

‘오늘 아침에 분명 내가 들어오자마자 서랍장을 급히 닫았지?’

내가 나타나기 무섭게 부산스레 움직이던 공작을 떠올리며 손으로 이것을 더듬었다.

다른 서랍장은 손으로 당기자 스르륵 열렸지만, 딱 하나의 서랍만큼은 굳건하게 잠겨 있었다.

‘허, 일이 쉽게만 풀리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잠겨 있잖아?’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잠겨 있는 걸로 봐서는 분명 허둥거렸던 이유가 여기 때문이란 소린데. 이걸 어떻게 열지.’

이럴 땐 각종 콘텐츠로 단련된 기억을 뒤져 봐야 하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열쇠 구멍이라거나 뭔가 이용할 수 있는 구멍을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어떻게 된 서랍인지 그런 건 없으며 철옹성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좋아, 결심했다.’

이럴 땐 말이지, 무조건 힘으로!

나는 발로 책상을 지탱하며 손가락을 서랍장 손잡이에 끼웠다.

있는 힘껏,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서랍이 조금씩 움직였다.

이거다!

‘내가 로판 세계에 와서 이런 무식한 짓이나 하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죽는 마당에 쪽팔리고 현타 오는 게 무에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정말로 알츠베이트 공작, 그 영감탱이 X되는 걸 봐야겠어.

내가 더욱 힘을 주자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지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퍼억!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역시, 무식한 게 제일이구먼.’

나는 얼얼한 손가락과 열린 서랍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맨 위에 놓여 있는 서류에 눈이 갔다.

‘……차일드 가문?’

달빛 아래 가문의 문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이를 얼른 꺼내어 달빛에 본격적으로 비춘 뒤 재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렸다.

‘……영감이랑 차일드 백작이 한패잖아.’

알츠베이트 공작이 돌연 이안 그놈과 짝지어 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진척 사항이 있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에 쓰여 있던 내용을 쭉 읽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그리고 내 눈동자가 커지는 순간, 창문을 미처 닫지 못한 탓인지 바람이 세게 불어와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아……!’

그 소리에 집무실 밖 복도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망했다.”

어떡한다? 어떡하긴 어떡해. 일단 튀자.

나는 서류에서 한 장만 뽑아 손에 쥐고, 서류를 최대한 빨리 넣고 서랍장을 원래대로 닫은 뒤 서둘러 창문으로 달려갔다.

‘올라올 땐 몰랐는데, 높아도 너무 높잖아. 여기서 그냥 뛰어내리면 죽겠는데?’

어차피 죽음은 따 놓은 당상인 목숨, 미련은 없었지만.

내 생을 망친 그 영감탱이 X되는 걸 보기 전까지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뛰어오는 발자국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