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심장 소리가 쿵쿵쿵 북을 두드리듯 거대하게 울렸다.
나는 침착하게 문을 응시하다 창문 난간에 매달렸다.
곧 내 눈에 바로 아래층에 있는 난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테리가 짖지 않는 걸 봐서는 이쪽으로는 사람이 오지 않은 거야.’
나는 굳은 표정으로 결심했다.
‘영화에선 이럴 때 주인공들이 몸을 흔들다가 홱 뛰어내린 후 촤라락 구르며 멋진 착지를…….’
하겠지만!
내 몸은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손이 미끄러졌다.
하염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길, 이따위로 죽으려고 악착같이 버틴 게 아닌데!’
막살다 못해 영감탱 그 혐오스러운 인간만큼은 조져 버리려 했는데!
바닥이 가까워졌다 느낀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몸을 감싸 안는 동시에 나는 단단한 것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온몸이 아픈 동시에 따뜻하고 포근했다. 모순된 감각에 놀라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커다란 나무와 하늘이 보였다.
그 아래로, 너무나 낯이 익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스킨, 레무트?’
어느새 먹구름에 달빛조차 숨죽인 깜깜한 밤하늘.
내 눈앞엔 날카로운 턱선이 인상적인, 어둠 속에서조차 빛을 발하는 미모의 남자가 있었다.
왜, 이놈이 여기에 있는 건데?
그것도 이 시간에, 이 장소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쳤다.
하마터면 어이없이 죽을 뻔한 상황. 이 상황에서 심장이 뛰지 않는 게 이상한 거였다.
마치 흔들다리에 아직 서 있는 듯 긴장감과 떨림이 느껴졌다.
거센 심장 박동과 동시에 적어도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현재 있는 곳은…… 나무 밑인가?’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려는 입에 살며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아스킨은 나를 안은 그대로 나를 보지 않은 채, 창문 쪽을 올려다보았다.
우거진 가지 사이로 얼핏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창문 밑을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에 숨은 우리를 발견하진 못한 듯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공작님께서 창문을 닫지 않으셨나 보군.”
“하기야, 침입자가 이쪽으로 나갔다면 공녀님의 그 괴물 개가 미친 듯이 짖었을 테니 말이지.”
“빨리 돌아가자고. 괜히 여기 있다가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르잖나.”
기사들이 창문을 닫았다. 그 후로 잠깐 동안 아스킨은 내 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손이 떨어졌음에도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으나, 몸과 머리가 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너도 훔치러 왔니?”
“…….”
“이미 내가 선수 쳤어.”
이 남자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잠입해 숨어 나타날 만큼 수상한 건 알아차렸기에 이렇게 던져 보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위험하니 내 목을 꽉 잡아라.”
아스킨의 지시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는 아래를 보고 스스로 이 나무 아래로 내려가는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조용히 손으로 목 뒤를 감자, 남자는 그림자처럼 고요하게 움직였다.
‘뭐야, 얘.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움직이잖아?’
제국 최고의 검사인 건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내가 나무를 타고 들어갔던 정원 쪽이 테리 때문에 그나마 순찰이 없었던 것일 뿐 이 저택엔 외부 침입자를 대비한 무수히 많은 기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스킨은 이를 모두 아는 것처럼 아니, 기척을 미리 알아차린 듯 지나가는 이들을 적절히 모두 피해 가며 걸었다.
‘대체 테리는 왜 짖지 않은 거지?’
내가 무사한 데다 나를 구한 아스킨이 들키지 않은 건 테리가 짖지 않은 것이 가장 컸다.
기사들 또한 테리가 짖지 않으니,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치부하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 알츠베이트 공작이 테리를 싫어하면서도 필요성을 인정한 건 테리가 그만큼 침입자를 막기에 적격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테리는 짖지 않았나.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 근처를 한참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나를 안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이 도저히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아 그대로 안겨 있는 쪽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나 또한 이 시간에 그것도 바깥에서 기사들과 마주쳐선 곤란했기에 기사들을 쏙쏙 피해 움직이는 게 편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렇게 옮겨 가는 동안 할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남자의 얼굴을 보게 된 터라 이 어둠 속에서도 참 어처구니없을 만큼 미남자라는 사실만 체감하고 있었다.
‘얼굴은 진짜 조각이 따로 없네. 그래, 그러니까 그 샤를리즈씩이나 되는 부족함 없는 악녀가 목숨보다 강한 자존심까지 버려 가면서 졸졸 쫓아다닌 거겠지.’
게다가 미움이라도 받을까 전전긍긍하기까지 했다.
아스킨은 ‘샤를리즈’가 참으로 악독하다 생각하겠지만, ‘샤를리즈’의 기억을 들여다본 나로서는 글쎄올시다이다.
실제로 ‘샤를리즈’는 자기 기준으로 악독하다 생각하는 짓은 아스킨에게 하지 않았다.
참으로 놀랍지만 말이다.
그것이 이 악녀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지?”
어쩌다 너희가 이렇게 더럽게 꼬여 버렸나, 원흉을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 악녀가 조금이라도 유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개고생하다 못해 흑화해서는 막살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지.
“내가 뭘? 그보다 내려 줄래?”
샤를리즈가 무거울 리는 없지만, 안겨 있는 상황 자체가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남자에겐 깃털과 같은 무게라고 해도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는 거다.
“넌 무슨 사람을 이렇게 휙휙 들고 다녀?”
“도움을 주고도 이렇게 돌려받는 기분 한번 참으로 묘하군.”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새삼스럽게 왜 이래? 사실, 네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그리고 내려 줄래?”
인적이 드문 공간이었다.
기척에 둔한 나라도 이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니 아스킨도 망설임 없이 목소리를 낸 것이리라.
“넌 우리 집의 돈을 꿀꺽하고도 나를 미워했고 나는 도움을 주고도 네 싸늘한 얼굴을 보고 살았지.”
“그건…….”
나는 여기서 아스킨이 ‘네가 먼저 아리아를 가지고 모욕하고 장난질을 치지 않았냐.’ 이렇게 반박하리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싸움이자, 또 한 번 반복될 것 같은 싸움에 지긋지긋함을 먼저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인지 아스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 네게는 그랬겠어.”
……뭐? 내 눈이 잠시 커다래졌다.
그와 동시에 아스킨의 얼굴로 수많은 표정이 스쳤지만 아무런 말 없이 내가 시킨 대로 날 조심조심 내려 주었다.
막상 발에 땅이 닿자, 어처구니없게도 마치 평생 땅에 발 한 번 디디지 못한 사람처럼 낯설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기묘한 아쉬움에 무안함과 의문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스킨에게는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너, 우리가 왜 그곳에서 마주쳤는지. 아니, 내가 왜 그곳에 있는지. 무슨 일인지 왜 안 묻니?”
“물으면 대답해 줄 건가?”
“아니. 내가 왜 대답을 해야 하는데?”
질문을 한 것 자체가 아스킨 이 놈은 왜 거기 있었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스킨은 담백하고도 어쩐지 평소보다 힘이 빠진 모습으로 순순히 물러났다.
이런 모습에 당황한 건 나였다.
“그럼 묻지 않겠다.”
“아, 예. 아주 감사하다고 말하면 되니? 네가 묻지 않으면 나야말로 물어보자.”
덤덤할 만큼 차분한 목소리가 내게서 튀어나왔다.
“넌 왜 거기서 나타난 건데?”
“…….”
아스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떨어트리고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조금 숙여진 고개에, 눈동자만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는데, 평소의 고집스러움이나 서늘함, 싸늘함 따위는 보이지 않고 어쩐지 침울해하는 기색이 느껴져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 내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깜빡했네. 넌 원래 내 질문에는 답을 잘 안 했지?”
“널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대답을 잘 안 하지 않느냐는 말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타이밍이라 잠시 답을 할 순간을 놓쳤다.
“이곳으로 가던 길에 웬 수상한 자가 이곳으로 조심조심 들어가길래, 이상해 뒤따라왔더니 떨어지는 널 발견하고서 끌어당긴 것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구멍이 숭숭 뚫린 대답이었다. 하지만 간과할 수는 없었다.
“수상한 자라고?”
“그래.”
저 하늘의 새도 떨어트린다는 거대하고도 권력이 막강한 알츠베이트의 저택이었다.
누군가 이런 저택에 침입했다? 자연히 알츠베이트의 적을 떠올리겠지만…… 너무 많기도, 아예 없기도, 혹은 터무니없는 상대만이 떠올랐다.
알츠베이트는 적이 많지만 동시에 귀족파의 수장인 이상 동등한 적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단 하나, 황실을 제외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