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레무트 공작가가 멀쩡했다면 모를까, 아스킨이 1대 1로는 최강자여도 가문끼리의 힘은 격차가 분명히 있어.’
그러니 함부로 쓸데없는 짓을 할 만한 적은 없다.
유력한 범인은 황실이 있겠지만…… 록시디언은 보기보다 약고 머리 좋은 폭군이었으니 눈에 띄는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럼 그 수상한 자는 잡았어?”
“그래, 잡았다. 그리고 잡히는 즉시 자살하더군.”
“……그거 방식이 꼭.”
“암살자들의 방식이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공작이 없는 저택에 나타난 암살자라.
땅만 보던 아스킨은 어느덧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남자의 눈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재 공작은 저택에 없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초일류 암살자가 이곳에 들어와 죽이려던 인물이…… 내 판단으로는 너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나?”
알츠베이트 공작에게는 나 말고 다른 혈육이 없다.
록시디언이 있기는 하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이 그쪽을 손주로 여기지도 폭군도 이쪽을 할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으니 제외해 두자.
초일류 암살자. 대륙 제일의 검사가 말했으니 암살자의 수준이 사실일 터.
암살자는 일류로 갈수록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런 비용을 들여 죽일 사람은 대체로 높은 고위 귀족들.
그의 말처럼 모든 뱡항이 나, 샤를리즈 알츠베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조용히 나를 덮친 사실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새삼 충격적이진 않은데.’
충격을 안 받아서 충격이랄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이미 어마어마한 업보를 쌓은 인물, 난 그저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뿐인데 몸 주인의 업보로 칼침을 맞을 뻔하지도 않았던가.
단순히 생각해 보면 샤를리즈에게 암살자를 보내고 싶을 만큼 원한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있을 법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내게 암살자를 보낸 사람은 알츠베이트 가문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는 거지.’
이건 들키면 ‘아, 암살자가 찾아왔다가 실패했군요?’ 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애지중지하던 물건, 즉 샤를리즈가 다칠 뻔한 것만으로도 노발대발할 테고.
‘흠집이라도 나면 이용할 수 없을까 봐 말이지.’
누가 보냈는지 들키는 순간 그 가문은 풍비박산 날 거다.
이를 알면서도 원한에 가득 차 보낸 거라면…….
‘어째서 지금이지?’
이미 샤를리즈가 여행에서 다시 수도로 돌아온 지는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이제야 노린 건 이상하게 여겨진다.
의문점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동안에 아스킨은 나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 인간이 아니면 오늘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건데.
달갑지만은 않은 구세주를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내 자신이 웃기기도 했다.
“암살자에 대해 더 아는 건 없지?”
“……애석하지만 없다.”
“그래.”
난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 쪽에서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죽게 놔둔 걸 책망하지 않는 건가?”
책망? 그걸 왜 해?
‘솔직히 아스킨 레무트 쪽에서 암살자를 보냈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납득할걸.’
‘샤를리즈’에게도 억울한 부분은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의 악녀의 기준이고.
객관적으로는 이 남자 쪽에서 억울한 일이 더 많긴 하지. 내가 이놈에게 가진 분노와는 별개로 말이다.
내가 정말로 책망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스킨은 더욱 당황하더니 이내 얼굴을 푸욱 숙였다.
“……미안하군.”
……응?
나는 잘못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였지만.
“붙들 땐 더 살려 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살하는 것을 막아볼 것을 그랬나, 내 생각이 짧았군.”
“……왜.”
네가 사과해?
……얘 왜 이래?
이번만큼은 나도 눈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본인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나를 보는 시선이 평소와는 달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왜,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
“이번엔 그놈이 네게 푹 빠져서 졸졸 쫓는다는 소문?”
하필 이 순간 폭군 오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건 이상한 흐름이 아니리라.
그 말을 뒷받침해 주듯 록시디언의 태도는 논리적이지 못했으니까.
“너, 그놈이랑 다시 약혼할 생각 있냐?”
그리고 록시디언은 알지 못했다.
다시 약혼할 생각이 있냐고? 전제부터 틀렸지.
만약 내가 계속 살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이 인간과 어떻게든 약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폭군 오빠는 모르고 있다.
“그 알츠베이트 공작을 엿 먹이기 위해서 설사 그놈과 다시 연인인 척이라도 할 수 있냐고.”
나는 손을 쭉 뻗었다.
툭, 아주 가볍게 내 손이 살갗에 닿았다.
제국 제일의 검사라면 내가 뻗는 순간 알아차렸음에도, 피하지 않고 제 뺨을 내준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놀란 듯 매우 흠칫하며 눈을 크게 뜬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너 왜 그래?”
“……뭐가.”
내 목소리를 듣긴 한 듯 한 발짝 늦게 답변이 흘러나왔다.
최근 그랬듯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무심하거나 체념한 얼굴 대신 이번만은 순전히 의문 가득하게 물었다.
“왜 헷갈리게 굴어?”
“…….”
설마, 자기가 헷갈리게 구는 건지 모르진 않겠지.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자 시선이 툭 떨어진다.
“아니, 됐다. 너랑 무슨 대화를 하겠니.”
내가 미련 없이 손을 거두려 들자, 내 손이 탁 붙잡혔다.
가는 손목을 채우고도 남을 커다란 손, 차가운 체온이건만 쿵쿵, 어디선가 무언가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피하지 말고…….”
“내가 언제 피했다는 거니. 지금 헷갈리게 구는 건 너잖아.”
내가 설핏 짜증을 냈다. 손목으로 아프지 않은 힘이 느껴진다.
이윽고 고개를 살짝 돌린 아스킨의 모습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헷갈리지 않게 하면. 너는 내 말을 들어 줄 수 있나?”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차마 보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돌린 모습, 밤의 호수처럼 파란 듯 어둠에 잠긴 눈동자, 그 아래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꿈?’
잡히지 않은 손으로 뺨을 꼬집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이 인간에게 좀 배신당했던가? 정말이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에도 거부당하고 끝내 포기하게 만든 철벽의 인간이었다.
‘뭐야, 헛소문이 아니었다고?’
그래서인지 눈앞의 결과를 보고도 쉬이 믿지 못했다.
‘대체 왜?’
의문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이 밤에 나를 찾아오면서, 그것도 그런 얼굴을 하는 건데?”
“……대답해 줄 수 있겠나. 헷갈리지 않게 하면, 나와 대화를…….”
“해 줄게. 해 줄 테니까 이것 좀 놓고 얘기해.”
슬슬 손목이 아프려 하니까. 이 말에 아스킨이 놀라 서둘러 손을 뗐다.
허둥거리는 모습이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 같은 구석이 있어 놀라는 한편 헛웃음이 나왔다.
줄곧 보아 온 차갑고 올곧고 빈틈없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래, 그래서 나를 왜 보러 왔는데?”
“……내일 토벌을 떠난다.”
나는 그 말에 방금 공작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계약서 내용을 떠올렸다.
그 영감이 계약서까지 작성해 가며 일을 벌리는 거라면 분명 작지 않을 일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새로운 로드를 개척하는 일이었지?’
아스킨의 말을 들으니 이 토벌이 쉽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널 보니 다른 말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럼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해. 간단하잖아?”
“…….”
아스킨은 잠시 멈칫했다.
표정을 봐서는 ‘한 개만 허락된 거 아니고 두 개 다 해도 돼?’ 하고 말하고 싶은 얼굴인데.
어울리지 않아서 헛웃음이 자꾸 샜다.
……저기요, 제가 아는 아스킨이랑 같은 인물 맞으세요?
“그럼 순서는 내가 정해 줄 테니 넌 차례대로 말해 봐. 본래 하려던 말은 뭔데?”
“……토벌을 간다.”
“그건 들었어.”
“……토벌에서 돌아온 뒤, 나를 다시…….”
아스킨은 여기까지 말하고서 머뭇거렸다.
그러고 나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말이 나오기 전에 내가 그의 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남자의 눈빛이 다음 내용을 말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더는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
이미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뇌가 홱 돌아 버려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상황이거든?
내가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목숨이 달려 있다.
이번에도 믿었다가 다시 불신의 벽에 가로막히면, 정말 어떻게 돌아 버릴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화도 아직 덜 풀렸다.
“넌 정말 멋대로네? 나한테 욕할 게 아니었어.”
“……그런가. 그렇게 느껴졌다면, 정식으로 사죄하겠다.”
아이 씨. 적응 안 되게! 대체 얘 왜 이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