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7/194)

126화

나는 순순하게 그것도 풀이 죽은 짐승처럼 사과하는 모습에 적응이 안 돼서 닭살이 오를 것 같았다!

“됐어. 사과는 됐으니까. 네가 말 꺼낸 김에 나도 그냥 말한다? 난 솔직하게 말해서 너도 싫지만…….”

“싫다고?”

분명 청순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눈빛마저 청순하다 느낀 적은 없는데.

말문이 살짝 가로막혔다가 부아가 치밀었다.

“말 가로막지 마! 그냥 가 버리는 수가 있어. 알겠니?”

“알겠다. 네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

가지 말라는 듯 손끝을 살짝 잡는 커다란 손에 당황했지만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난 너보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훨씬 싫어. 죽기 전에 그 영감의 얼굴에 엿을 먹여 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아니, 가문이 확 망해 버려도 좋을 정도야. 알겠니?”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모르겠지. 넌 나랑 대화도 안 하려 들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생각한 건 너한테 차이고 난 뒤지만. 이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말을 이으려 하는데, 아스킨이 조금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죽는다니 그건 무슨 소리지?”

“…….”

그거야, 님 때문에 뒈지는 거지.

하지만 나는 말을 하는 대신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사실 그걸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저 의례상 과장해서 말한 거라고 듣겠거니 싶었다.

“말 그대로야. 죽기 전에 뭐든 망쳐 주고 싶다고.”

“…….”

“그보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게 아니야. 됐고, 너 그 토벌 꼭 가야 하니? 미리 말하는데 너, 거기 가면 죽어.”

내가 본 계약서, 그 내용 중에는 아스킨의 암살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참으로 적나라한 내용이었다.

토사구팽.

사냥개에게 일을 시키고, 쓸모없어진 개는 삶아 먹는다.

잔인한 옛 구절이 떠오를 만큼 역겨운 내용들이었다.

“네가 가는 토벌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돈을 투자했어. 무슨 뜻인지 아니?”

“……알츠베이트에서 투자했다는 사실은 지금 막 알았다.”

“그래, 무슨 뜻인지 잘 아는 모양이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약조했다.”

그 말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해도, 아스킨은 아스킨이다.

“그래. 그 약속 잘 지키시고, 언제나처럼 그렇게 꼿꼿하게 살아가. 난 죽을 사람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거든. 이만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미약한 힘이지만 내 손을 잡고 잡아당기는 힘을 느꼈으니까.

고개를 돌리면, 마치 기사의 맹세라도 하는 듯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 내려다본 적이 있던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내 걱정, 고맙다.”

게다가 보지 못했던 이런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은.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 약속한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솔직하게 절경이었다.

하얀 살갗 위로 붉게 물든 저런 눈 밑을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조금 전에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들어 주지 않는 건가?”

내 침묵이 허락이라고 생각한 건지, 아스킨은 입을 달싹였다.

모양 좋은 입술이 몇 번의 시도 끝에 다시 열렸다.

“난, 네가 걱정된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과 함께.

“왜 넌 네 위험은 생각하지 않는 거지?”

“……뭐?”

“암살자. 그들이 다시 나타나면 어쩔 생각인가.”

그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리기는 했다.

암살자, 골치야 아프긴 한데, 그게 뭐?

‘아, 얘는 모르지?’

이미 파혼을 한 상태이니, 어차피 얼마 안 가 죽을 건데. 아스킨이 죽어도 난 죽는다.

그런 마당에 암살자에게 죽는 것 또 뭐 어때.

“살다 보니 네게 걱정이란 말을 듣는 일도 다 있고, 내가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긴 하네.”

난 결국 피식 웃었다.

“난 농처럼 말한 게 아니다.”

“알아, 나도 농담한 거 아니야.”

나는 이번엔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나와 대화가 하고 싶으면 정말 살아 돌아오기나 해.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제 너를 완전히 적으로 보고 있을 테니까.”

이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라면 모를까.

솔직히 말해 폭군 오빠가 했던 말들에 흔들리기도 했다.

만약, 폭군 오빠가 전한 소식이 사실이라서 이번엔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하지만 더는 끌려다니는 건 싫어.’

나는 아스킨의 눈을 쭉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나도 잘 살고, 너도 살아서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그럼 무언가 달라지나?”

나는 팔짱을 꼈다.

“네가 어떡하느냐에 따라 달렸겠지.”

진심이었다. 돌아온 뒤에 이 남자가 다시 한번 예전처럼 군다면 나 또한 이젠 거리낌 없이 죽기 전까지 머리 푼 미친X이 되어 살 생각이니까.

아 물론 이제 와 이 남자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해도 예전과 같이 똑같이 굴 생각은 없지만.

“난 간다.”

“잠시만.”

가려는 손끝이 붙잡혔다. 마지막이라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단 한 번도 이 남자가 나를 깨질 유리 조각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었던 탓에.

물론 함께 연회를 가 주겠다며, 함께 갔을 땐 예의를 갖추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느낌이었다.

이런 얼굴이 아니었다는 거다.

“……약조는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겠나?”

“약조? 혹시 계약서를 말하는 거야?”

난 피식 웃었다.

“장사꾼에게 당하더니, 너도 장사치가 다 됐구나?”

그러자 아스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기서 화를 낸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아스킨은 이번 또한 화를 내는 대신 시선을 내렸다.

“계약서도, 약조도 없어. 지키는 것도 네 맘, 어기는 것도 네 맘이야.”

“……알겠다. 꼭 지키겠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일어난 아스킨이 허리를 천천히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귀족 신사 혹은 기사가 레이디에게 올리는 인사였다.

나는 간질거리는 손등을 보다 등을 돌렸다.

밤이라서 그런지, 여전히 헛것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단 살아 돌아와서 얘기하자고. 그리고 깜빡할 뻔했는데, 오늘은 고마웠어. ……아까 본 건 돌아가는 길에 다 잊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 * *

샤를리즈는 기묘한 기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금 얼굴을 아스킨에게 보일까 저어돼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샤를리즈가 들어간 문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문이었으니,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스킨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샤를리즈가 문을 닫고 들어가는 동시에 부드럽게 풀려 있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소의 그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 나오지.”

아스킨은 자리에 선 채로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잠시의 침묵이 이어지자,그의 얼굴이 느슨하게 기울어졌다.

“검을 들어야 나올 건가?”

아스킨의 싸늘한 말에, 거짓말처럼 풀숲이 흔들렸다.

이내 커다란 나무 뒤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나타났다.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커다란 체격과 짧은 머리칼, 샤를리즈의 호위인 제트였다.

아스킨은 제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인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 취미가 있는지 몰랐군.”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뚝뚝하게 답변하는 제트를 보는 아스킨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했다.

“수하로서의 예의를 아는 듯하니 다행이로군.”

끝이 날카로운 말이었다.

이와 동시에 일순간 아스킨과 제트 사이에서 만들어진 기의 기류가 긴장감과 뒤섞여 마구 뒤엉켰다. 마치 번개가 이는 듯했다.

한참 동안 서로 탐색하려는 듯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때였다.

아스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생긴 눈썹이 일순 일그러졌다.

“너, 검기의 운용이…….”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트는 시치미를 뚝 뗐지만 아스킨은 제국 제일의 검사였다.

검사와 관련한 것이라면 숨기려 드는 것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아스킨은 제트에게서 특이점을 발견하고서 찌푸렸다.

사실, 특이점을 알아낸 건 처음이 아니었다.

‘동물원에서도 분명…….’

조금 전 막 샤를리즈를 목표로 한 초일류 암살자를 잡아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잔뜩 예민해진 아스킨은 망설임 없이 검을 빼내어 제트를 향했다.

“네 스스로 숨기는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

제트의 침묵은 곧 긍정처럼 여겨졌다.

스스로 숨기는 것이 있음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의도냐. 왜 알츠베이트 공녀 옆에 너 같은 자가 있는 거지?”

“아무런 의도도 없습니다.”

아스킨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상대를 향해 발을 디뎠다.

순식간에 제트의 앞으로 다가온 아스킨은 그대로 검을 겨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