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8/194)

127화

마음만 먹었다면 제트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제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어떤 선고가 내려져도 그대로 받겠다는 양 평온하게 아스킨을 바라보았다.

“내가 베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인가?”

“저는 현장에서의 공작님을 압니다. 제가 아는 공작님께서는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무고한 목숨을 취할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 말에 아스킨은 검을 쥐었다가 폈다.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나를 아는 듯한 말투를 보아하니, 마주친 적이 있는 모양이군.”

“스쳐 지나간 일입니다.”

“그 힘을 쓰는 자가?”

“…….”

“언제부터 성기사가 이리도 흔한 인재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군.”

아스킨은 자신의 손을 움직여 들고 있던 검을 검집으로 밀어 넣었다.

“진짜 외양 또한 숨긴 채 여기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스킨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곧 아스킨의 푸르른 눈에 명료한 의지가 깃들었다.

“샤를리즈에게 해를 끼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제트의 우묵한 눈이 잠시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외람되지만 의외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봐 온 바, 공작님께서 이리 변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대에게 토로할 이유는 없다는 걸 더 잘 알겠지.”

“…….”

제트는 답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날을 세우는 대신 천천히 말했다.

“공녀님께 해를 끼친 존재가 공작님이 되신다면, 저 역시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

제트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스킨이 돌아서려 할 때, 제트가 아스킨에게 무언갈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두 분의 대화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공녀님께서는 살아 돌아온 공작님에게서 들어야 할 말이 있으신 줄로 압니다.”

아스킨이 제트의 손을 응시했다.

“이번 토벌에 필요할 겁니다. 살아 돌아오셔야 공녀님께서 기다리시는 말을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제트가 전해 준 것은 성기사들이 응급 상황 시에 사용하는 마법 가루였다.

아스킨은 적지 않은 지식으로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알았다.

게다가 이를 건넨다는 건……. 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조차 않겠단 소리였다.

“그냥 성기사도 아니고, 고위 성기사였나.”

이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인정함과 동시에 진심이 전해졌다.

오직 샤를리즈를 위해서 자신에게 내민 것이다.

아스킨은 제트의 눈에서 진심 어린 시선을 보았다.

이런 사내가 옆에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여행에서 돌아온 최근의 샤를리즈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럼.”

제트가 그림자 속으로 물러났다.

홀로 남은 아스킨은 마법 가루를 손에 쥔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찡그린 미간마저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해치지 못했다.

그런 미모 위로 후회란 그림자가 진하게 스며들었다.

‘……대체,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가.’

* * *

같은 시간,

침실로 무사히 돌아온 샤를리즈는 방금의 떨림이 가라앉지 않아, 침대에 눕지도 못한 채 방 안에서 같은 곳을 계속 맴돌았다.

아스킨의 품에 안겨 움직일 때는 자각하지 못했다가, 이제야 자신이 겪은 일들을 실감한 탓이었다.

‘뭐야, 그놈은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진작 좀 그러지. 샤를리즈는 이를 부득부득 갈기 바빴다.

‘설마 내가 곧 죽을 거란 걸 알게 돼서 바뀐 건 아닐 테고……. 대체 왜?’

이유가 궁금해진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새벽이 늦도록 생각에 잠겨 잠들지 못하던 샤를리즈는 결국 침대는커녕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깊은 잠에 빠져든 샤를리즈를 깨운 건 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뭐야, 비가 오는 건가?’

샤를리즈는 힘겹게 눈을 비비며 창문을 바라보았지만, 비가 내리는 건 아니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소리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잠이 확 깨는 기분을 느꼈다.

뭐야. 저건.

‘설마, 암살자?’

샤를리즈는 바로 소리를 지를까 고민하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 주는 제트를 믿기로 했다.

제트가 있는 한 암살자가 그녀의 방 창문을 두드리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침착해졌다.

제트를 향한 믿음과 더불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체념이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은 샤를리즈는 그렇다고 완전히 불안감을 떨치지는 못한 채 지팡이를 손에 꽉 움켜쥔 채로 창가로 향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는데, 다시 한번 탁! 하고 창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샤를리즈는 순간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마침내 창문 앞에 도달한 샤를리즈가 숨을 꿀꺽 삼키며 커튼을 확 걷어냈다.

탁!

‘뭐야……, 돌?’

막 아침이 밝기 전, 새벽 시간이었다.

시간을 고스란히 알리듯 어둡고 어스름한 새벽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긴장하게 만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돌이라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샤를리즈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았을 때, 익숙한 얼굴을 맞이했다.

이안 차일드.

‘허…….’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바로 이안이 창밖에 서서 던진 작은 돌멩이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알츠베이트 가문의 보안이 이것밖에 안 돼?’

대체 어제부터 몇 명의 밤손님을 맞이하는 건지.

암살자부터 아스킨에 이제는 이안 차일드까지……. 아스킨이야 자기 실력으로 보안을 뚫었다 쳐도 이안은, 대체 어떻게?

샤를리즈는 고민 끝에 저쪽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눈감아주었을 거란 결론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제 새로운 약혼 후보가 아니었던가?

‘그보다 어제부터 창문과 지긋지긋한 일들이 엮이네.’

창문에서 떨어질 뻔한 경험이 불과 몇 시간 전 일이다.

그런데 이번엔 창문 밖에서 달갑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까지 했으니, 이젠 창문에 질릴 법도 했다.

샤를리즈는 목을 뒤로 빼고는 잠을 자지 못해 초췌한 얼굴을 거울을 통해 한번 쳐다봤다.

그러고는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공녀님!”

샤를리즈와 눈이 마주친 이안은 반가움 탓인지, 원래 목소리가 큰 탓인지.

아니면 저 또라이가 작정하고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인지 어느 쪽인지 몰라도 알츠베이트 가문 사람들을 다 깨울 태세로 샤를리즈를 반갑게 불렀다.

마치 강아지 귀랑 꼬리가 살랑살랑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공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너, 닥쳐.”

샤를리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녀는 이 쪽팔린 광경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제국의 욕은 먹을 대로 먹은 자신이기에 더 이상 먹을 욕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저쪽에서 거리낌 없이 열심히 불러제낀 탓에 부끄러움은 샤를리즈 몫이 된 것이다.

그녀의 현재 기분을 말하자면 흡사 대학교 때 피피티 발표하다 말고 공개 고백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잊을 수 없었건만 설마하니 비슷한 수준의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이야……!

샤를리즈가 손가락으로 입에 자크를 잠그는 시늉을 하자, 이안은 이번엔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로 자신이 올라가도 되는지를 물었다.

‘미쳤나 봐. 이 시간에 내 방에 오겠다고?’

죽고 싶은 건가. 죽으려면 왜 아주 그냥 저택 옥상에 가서 뛰어내리시지?

우습게도 저 능글맞은 표정과 행동이 저 잘난 잘생긴 얼굴과 합쳐져서 완전히 밉지만은 않은 모습이 된 것이 문제였다.

다른 이가 보기엔 아주 그냥 사랑에 폭 빠져서는 프로포즈를 못해 안달이 난 로맨틱한 장면 속 남자 주인공처럼 보일 것 같으니 말이다.

‘올라오겠다고? 되겠냐?’

샤를리즈는 어이가 없어서 두 팔을 교차해서 커다란 엑스 자를 보여 준 뒤, 창문을 닫고는 커튼까지 쳐 버렸다.

샤를리즈가 침대에 앉으려 할 때쯤, 창밖에서 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니임, 그럼 저 여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미친 XX가!”

샤를리즈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창문을 열었고, 이안의 잘난 얼굴이 보이는 순간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

‘너 목 닦고 기다려라.’

‘네! 공녀님! 제 목은 공녀님 거!’

이안은 잽싸게 입 앞으로 모았던 두 손을 내리더니 차렷 자세까지 취하며 자신은 기다리겠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아우, 저 또라이 같은 자식은 도대체 뭘 먹었길래 오늘도 똘끼가 넘치는 건데?’

샤를리즈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스운 건 미운 정도 정이라고 했던가, 기다리란 신호에 덩치 큰 강아지처럼 기다리는 모습이 퍽 귀엽게 보여서 자신이 미쳤나 싶었다.

하필 새벽빛에 비친 머리 색이 커다란 강아지 같아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샤를리즈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이없는 생각을 지우려는 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서는 1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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