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이안은 샤를리즈가 나타나기 무섭게 활짝 웃었다.
“공녀님, 너무 반갑습…… 켁!”
“혹시 목숨이 3개쯤 되니? 아니, 그냥 아깝지가 않은 거지?”
“켁, 그럴, 리가요! 하하하…….”
이안은 샤를리즈의 손에 크라바트가 쥐여 켁켁 거리면서도 용케도 예쁜 웃음을 사수했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치 넘어질 때도 예쁘게 넘어져야 한다는, 그런 신념을 가진 남자 아이돌을 보는 기분이었달지.
“그냥 미쳐 버린 거겠지? 도대체 아침부터 왜 이래? 혹시 술 마시고 진상짓을 한 거라면 오늘에야말로 테리 아침밥은 네가 될 거야.”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요즘 미쳐 버리다 못해 푹 빠진 곳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공…….”
“응, 조용히 해.”
샤를리즈는 재빨리 이안의 뒷말을 막아 버렸다.
뻔한 영화를 보듯 오글거리는 대사가 나올 듯해서였다.
샤를리즈는 이안의 입을 가로막은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킨 그놈은 똑같이 오글거리는 소리를 해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던데.’
분명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소릴 했건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샤를리즈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대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왜 왔어?”
샤를리즈는 어디 용건이나 들어 보자는 기세였다.
동시에 별거 아닌 용건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시선 또한 함께였다.
“공녀님, 저 오늘 토벌을 떠납니다.”
이안이 장난 어린 미소를 슬쩍 거둬들이며 그 자리에 평소의 부드러운 얼굴을 띠었다.
‘토벌?’
익숙한 단어에 샤를리즈는 자연스럽게 아스킨과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계약서를 떠올렸다.
“……설마, 아스킨이 가는 그 토벌?”
샤를리즈는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던 아스킨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일순간이지만 이안의 표정 위로 그늘이 스쳤다. 웃고 있지만 불이 꺼진 듯 시선이 어두워지고 미소 또한 흐릿해졌다.
샤를리즈는 당황하느라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외람되지만 언제부터 레무트 공작님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셨을까요?”
“다정?”
그럴 리가 있나. 샤를리즈 안에서 아스킨은 아스킨 새끼, XX놈 각종 나쁜 욕설의 주인공이 된 지 오래였다.
이뿐 아니라 이 몸에 빙의했을 때부터 책 속 최애였던 인간을 부지런히 속으로 불러 댔으니 자연스럽게 이름이 나온 것뿐이었다.
샤를리즈의 얼굴로 불쾌감이 떠오르자 이안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레무트 공작님이 가시는 건 알고 계셨군요. 제가 가는 건 모르실 것 같아서 이렇게 직접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뭐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건 아니고 이래저래 어쩌다 보니. 근데 나한텐 왜 알려 주는 건데?”
아스킨은 유능하다못해 제국 제일의 검사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안은 일단 외교관 겸 상인 아니었던가?
왜 직접 가는 거지? 정말 새로운 로드를 개척하기 위함인가.
새벽빛이 아스라이 가라앉으며 세상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슬이 똑똑 떨어지는 시간, 새벽과 아침 사이에서 이안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만약 제가 이 토벌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공녀님의 지난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맑게 웃고 있는 남자에게서는 평소와 같은 짓궂음도 능글맞음도 장난기마저도 없었다.
그렇기에 샤를리즈는 평소처럼 삐딱한 자세 대신 이안을 한참 응시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제 부탁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샤를리즈는 이런 제안에 문득 알츠베이트 공작의 방에서 보았던 계약서가 떠올라 순간 화가 치밀었다.
본인과 본인의 가문은 누군가를 살인할 계획을 세우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한다?
샤를리즈는 분명 아스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을 사람 하나 미리 정해 놓고,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면 내가 동정심이라도 가질 줄 알았니?”
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놀라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나왔다.
“공녀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모른 척하기로 했니? 아니면, 토벌에 성공하면 네가 레무트 공작을 직접 죽이는 임무라도 맡아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거니?”
직설적인 한마디에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긍정인 듯 당혹인 듯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아니. 믿어 주실지 모르겠지만……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건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안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사실상 제국 최고의 검사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얼핏 타당하게 들리는 그 말에 샤를리즈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말 몰랐다는 표정이네. 혹시 제국 밖을 돌아다니면서 연기도 배웠니?”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거라면 무언가 확신한 증거가 있으신 거군요.”
역시 눈치가 빨랐다, 이 남자는.
“하지만 저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이안이 샤를리즈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샤를리즈는 확 놓아 버리려다가 무슨 꿍꿍인지 보자는 기세로 그대로 두었다.
이안이 붙잡은 그녀의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살짝 처진 듯 오묘한 눈매가 샤를리즈를 간절히 응시했다.
“한평생 혀로 누군가의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했던 적,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
“하지만 제 모든 것에 맹세코 전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샤를리즈는 맹세란 게 사실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죽기 살기로 아스킨을 설득해 약혼을 이어 가려 했던 제 맹세와 같던 의지가 결국 무너지고 만 것처럼.
“그래? 그럼 따라와. 증거, 직접 보여 줄 테니까.”
이안은 잠자코 샤를리즈를 따랐다.
샤를리즈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잠시 시계를 보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안의 얼굴에는 샤를리즈가 자신의 곁을 내어 주었다는, 기쁨만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잠시 뒤 샤를리즈가 내미는 것을 보고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리즈는 종이를 내민 채로 이안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봤지? 증거.”
샤를리즈가 내민 것은 그녀가 알츠베이트 공작의 집무실에서 몰래 빼돌린 계약서 낱장이었다.
샤를리즈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으로, 아스킨 레무트 살해 관련한 사실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알츠베이트 공작이 여차하면 차일드 가문을 압박할 수단으로 쓰려 했던 모양이지만, 도구는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샤를리즈는 이안의 손에서 계약서를 다시 빼내 오며 말했다.
새벽, 그리고 조용한 방 안. 샤를리즈의 말은 나지막하게 울렸다.
“어디 한번 둘 다 살아서 돌아와 봐. 너도 아스킨 레무트도.”
토벌에 간 아스킨이 살아 돌아온다면 이안을 믿겠다는 소리였다.
“그럼 네 제안이 뭔지 들어 봐 줄게.”
아스킨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안의 눈이 짙어졌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이 차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안은 곧 그림같이 웃으며 천천히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분명 약속하신 겁니다. 제가 공녀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킨다면…….”
이안은 딱 반보만 걸음을 디뎠다.
표독스럽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경계가 많은 눈앞의 샤를리즈가 물러서지 않을 거리만큼만을.
“그땐 저도 레무트 공작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생각해 주시는 겁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이런, 전 토벌대 발대식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안은 자신의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샤를리즈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는 샤를리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도 아니면서 기사의 인사를 올리는 자세만큼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했다.
샤를리즈는 이안의 웃는 얼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진지함을 느꼈다.
‘만약 그 계약서에 대한 걸 차일드 백작만 알고 있다면, 이안은 정말 결백한 거겠지.’
과연 이를 믿을 수 있는가? 이건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다.
샤를리즈가 자신의 손등을 내어 주었다.
“알겠으니까. 너나 그놈이나 살아 돌아오기나 해.”
그러자 이안은 무엇 때문인지, 공을 문 커다란 강아지인 양 얼굴 가득 미소를 피워 내더니 눈을 감을 듯이 휘었다.
그러고는 곧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샤를리즈의 방을 나섰다.
곧이어 창문 밖으로 이안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샤를리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까지 타고 온 걸 보니, 저놈은 담을 넘은 게 아니었구만.’
샤를리즈는 사라지는 마차를 보면서 복잡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은 놈들의 생사를 바라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샤를리즈는 어쨌거나 죽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 * *
차일드 백작저, 저택 앞 커다란 공간에는 한 무리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모두가 이번 토벌의 정예 중의 정예들로, 중간급 지휘관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맨 앞줄에는 아스킨 휘하 수하들이 도열해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아스킨이 준비된 단상에 올랐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차일드 백작의 유지를 받아, 이 토벌대를 이끄는 총지휘관이 된 아스킨이 나직하게 말했다.
서늘한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어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우리는 반드시 임무에 성공할 것이며, 여기 모였던 인원 그대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