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제국 최고의 검사답게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런 아스킨을 향해 모여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결연한 의지와 함께 각자의 병장기를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저택이 떠날 것 같은 고함이 울려 퍼졌다.
기사들의 소리를 들은, 멀리 함께 도열해 있던 병사들도 우렁찬 소리로 화답했다.
아스킨이 간단한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단상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차일드 백작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레무트 공작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제 수하들임에도 군기가 확 사는군요.”
“차일드 백작,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우리는 바로 출발하겠다. 이의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그 전에 여기, 이 사람을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아스킨은 차일드 백작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서 살짝 놀라는 동시에 곧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백작 옆에 서 있는 자는 두 명의 남자였는데, 그중 하나는 아주 익숙한 청년, 이안 차일드였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파이란입니다. 공작님의 손과 발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만큼 훌륭한 부관은 없으리라 제가 자부합니다.”
“부관이라면 나와 오랜 기간 함께한 부관이 있다.”
아스킨은 이안에게서 눈을 떼어내 옆에 있던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에게서 딱 한 가지만 특징을 잡자면 제국 수도에서는 보기 드문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외양의 남자였다. 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다면 부관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맡을 게 아닌, 오직 공작님의 시종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머리도 영민하고, 손이 빨라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스킨은 눈을 가늘게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쪽은 아시겠지만 이안, 제 아들로 이번에 저를 대신해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놈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 괜한 누가 될까 말렸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허허허.”
이렇게 말을 했지만 결국 이 토벌은 차일드 백작이 주도한 토벌이었다.
그러니 차일드 일족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알겠다. 최전방에 세우진 않을 테니 염려 말도록.”
아스킨의 말에 이안은 한마디를 섞고 싶었지만, 아스킨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 토벌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두 남자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눈치챈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 * *
샤를리즈는 어젯밤, 잠을 설쳤지만 그렇다고 온종일 잠에 빠져 지내진 않았다.
오히려 잠은 오지 않아서 오전부터 쭉 눈을 뜬 상태였다.
사실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서 침대에 누워 봐야 정신이 더욱 선명해지니, 차라리 뭐라도 하고 이 있는 쪽이 나았다.
“이게 전부라니?”
“네, 공녀님……!”
샤를리즈는 눈앞에 가득 쌓인 서류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일은 일종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책 속 원작 내용과 ‘샤를리즈’의 기억이 있었다.
이 두 가지를 합하니 짜잔 놀랍게도 알츠베이트 공작을 엿 먹일 훌륭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물론 약간의 고생을 더 해야겠지만 말이다.
샤를리즈가 한창 서류를 보며 씨름하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하녀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샤를리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안 먹어.”
“저, 공녀님 그게 아니라,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샤를리즈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도대체 아침부터 누구야?”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혹시나 이안 그놈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했다.
물론 하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찾아오는 이안을 향한 반응이었다.
“그게…… 레무트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혹시 다시 돌아가시라 할까요?”
“뭐?”
누구? 아리아?
샤를리즈가 얼른 손에 쥐고 있는 서류를 집어던졌다.
아리아, 너는 노크를 할 필요가 없어요!
“아리아가? 어서 들어오라고 해. 당장.”
“예, 알겠습니…….”
“아니다. 어디에 있어? 내가 내려갈게.”
샤를리즈는 기대어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바꿔 신지 않고 실내화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숄만 대충 두른 차림이었다.
1층엔 조금 수척한 얼굴을 한 아리아가 샤를리즈를 보고서 애써 밝은 미소로 맞이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얼굴을 보고서 잠시 멈칫했다가 얼른 다가갔다.
“아리아!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내가 보고 싶었나요?”
샤를리즈는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농을 던졌지만, 아리아가 그대로 열심히 끄덕였다.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로 세차게.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샤를리즈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네……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뭐지? 이 귀여운 생물은? 혹시 알츠베이트 저택에서 키워도 되나?
아니, 아니다. 이런 귀여운 눈 토끼에게 알츠베이트 같은 쓰레기 환경을 줄 순 없었다.
샤를리즈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내가 가거나 마차를 보내 줄 수도 있었는데.”
샤를리즈는 낡은 레무트 공작가의 마차를 떠올리다 재빨리 아리아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아무래도 아리에게 줄 다음 선물은 마차로 하는 게 좋겠다, 생각하면서.
아리아는 화려한 샤를리즈의 방 안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는가 싶더니, 이내 어째서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 1층에서는 애써 밝게 웃었지만 사실은 이런 표정이 하고 싶었던 것처럼.
“따뜻한 차 한 잔 줄게요, 아침에 오느라 추웠죠?”
“감사합니다, 공녀님…….”
“왜, 나는 언니가 더 좋은데.”
샤를리즈가 맞은 편에 앉은 채 턱을 괴며 씩 웃었다.
곧이어 시종이 내어온 찻잔을 손안에 꽉 쥔 아이라는 추위가 가시는지, 조금 창백하던 안색이 조금씩 풀려 가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자리를 옮겨 아리아의 바로 옆에 앉아 아리아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며 자신의 두툼한 숄을 직접 둘둘 둘러주었다.
‘……담요에 쌓인 눈 토끼인가.’
하얀 담요에 휩싸인 아리아는 털 망토를 두른 토끼 같았다.
샤를리즈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며 속으로 흐뭇하게 끄덕거릴 때였다.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갑자기 찾아왔어요, 죄송해요.”
샤를리즈는 당황하는 대신 물었다.
“아리아, 무슨 일…… 있어요?”
아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샤를리즈는 그런 아리아의 모습에서 정답을 발견했다.
“오빠가 토벌에 참석해서 그런 거죠?”
“언니……!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오늘. 정확히는 새벽에 알게 되었어요.”
아리아의 오빠가 첫새벽에 나를 찾아와서 직접 말했거든요.
차마 이렇게 말하지 못한 샤를리즈는 표정을 슬쩍 갈무리했다.
“오빠는…… 항상 그렇게 자기 멋대로예요.”
아리아가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이제, 토벌을 가지 않겠다고 약속도 해 놓고선……!”
약속을 했었어?
“다른 사람이랑 한 약속은 그렇게 잘 지키면서, 항상 저랑 한 약속은 이렇게 무시한다니까요.”
씩씩거리는 아리아를 본 순간, 샤를리즈는 그녀에게 참 미안하게도 고개를 홱 돌려야 했다.
창백한 볼에 분홍빛 분기가 쌕쌕 돌며 심통이 잔뜩 난 아리아가 실로 상황도 잊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마치 화가 난 햄스터처럼 말이다.
“푸흡, 아…… 미안해요. 이건 불평하는 아리아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웃은 거예요.”
“아뇨, 괜찮아요. 이젠 언니가 오빠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가 가요!”
아리아의 답변에 샤를리즈는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라는 대답을 할까 망설이다 이내 속으로 삼켜 버렸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거의 애증에 가까웠지? 마지막엔 증 쪽에 더 가까웠고.’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아스킨 레무트로 인해 죽게 되었으니 원망스럽고 미웠지만 아스킨 레무트가 자신을 끝내 믿지 못한 이유도 이해는 했다.
어디까지나 이해만 했다는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아스킨의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지만, 눈앞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눈 토끼가 있었다.
토끼님을 달래기 위해선 아스킨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오빠도 아리아와의 약속을 어겨서 마음이 아플 거예요.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샤를리즈가 손수건으로 아리아의 눈을 살살 눌러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리아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저, 언니…… 쿨쩍. 오빠가 또, 토벌을 떠난 건, 제 약값 때문이겠죠……? 저는, 오빠한테 짐만 되네요.”
샤를리즈의 손이 멈칫했다.
“혹시나 오빠가 잘못되거나 하진 않겠죠?”
“아무렴. 제국 최고의 검사란 칭호를 괜히 얻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번 토벌은 아리아의 약값 때문만은 아니에요.”
순간 샤를리즈는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잠시 잊고, 어떡하다 이 남매는 이런 비극을 반복할 수밖에 없나 하는 안타까움을 곱씹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 감상이었다.
책 속 아리아는 끝내 아프고 힘들고 병만 앓다가 안타깝게 죽는 인물이었다.
여동생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남자는 망가지고 말고 말이다.
“이번에 가게 된 건 아주아주 나쁜 영감탱이 때문이에요.”
이건 좀 비약이긴 하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의 착취만 없었더라면 아스킨은 아리아의 약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