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이렇게 생각되는 건 결국 자신 또한 문제의 최대 원흉은 알츠베이트 공작 그 영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언니 혹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물론 아스킨 그놈에게 잘못이 없다곤 하진 않을 거다.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쁜 영감 놈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조만간 아주 크게 고꾸라질 예정이니까.”
“…….”
“아리아, 오빠가 떠나 있는 동안 여기에 있을래요?”
샤를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속에 담고 있던 진심을 주르륵 토해 내 버리고선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듯했다.
아니, 이놈의 입은 왜 갑자기 가만히 있질 못하고 왜 이래?
그러나 이 어린 눈 토끼에게 모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야, 아스킨 아무리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귀여운 여동생을 두고 떠날 생각이 들긴 해?’
괜히 아스킨에게 화살을 돌린 샤를리즈는 아리아 몰래 눈을 뾰족하게 좁혔다.
‘살아 돌아와라. 너 진짜 죽기만 해 봐. 너 죽으면 진짜 지옥에 가서라도 발로 차 줄 테니까.’
어차피 아스킨이 죽으면 두 사람은 지옥에서 재회할 가능성이 높았다.
신이 있는 걸 봤는데 사후 세계라고 없겠어?
“헉, 진짜 그렇게 해도 되나요?”
샤를리즈가 속으로 찡그리며 한숨을 쉬는 사이, 아리아가 눈물을 매단 눈으로 초롱초롱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요, 여길 봐요. 넓죠? 정말 넓어서 침대 다섯 개는 더 들여와도 문제없을걸요. 물론, 빈방도 많으니까 같이 쓰기 불편하면 따로 써도 돼요.”
“앗, 언니만…… 불편하지 않으시면 저는 언니랑 같은 방 써 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향해 환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전담 하녀를 불러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자, 우리 우울하게 여기에 있지 말고, 쇼핑 갈까요?”
“어, 아침부터요?”
“당연하죠. 쇼핑은 원래 아침부터 하고 오후엔 새 옷으로 나들이를 가는 거예요.”
샤를리즈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들이하는 동안에 함께 오빠 욕이나 할까요?”
이내 아리아의 얼굴로도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토벌대는 해가 뜬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칼바람이 부는 숲속에 주둔지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가장 먼저 완성된 지휘부 막사 안은 각 진영별 대장들이 아스킨에게 보고를 올리느라 분주했다.
“공작님, 점점 더 놈들의 본거지에 다가가는 듯합니다.”
“부상병들 상태는 어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전투는 무수히 일어났다.
“네, 3기사단은 치명상을 입은 기사 8명, 병사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단은 2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참여가 가능합니다.”
이들의 앞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 토벌이 진행되는 숲의 전체 지도였다. 빽빽한 나무 지대를 바라보던 아스킨이 어딘가를 툭 두드렸다.
어째서인지 이렇게 잠시의 시간이 주어질 때면 눈앞으로 부드러운 벚꽃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리곤 했다.
닿은 적이 거의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하얗고 꼿꼿하던 목과 붉은 눈동자까지.
아스킨은 이곳에 온 뒤로 잠시 잠깐씩 자신이 미쳤나 싶기도 했다.
“일단 살아 돌아와서 얘기하자고. 그리고 깜빡할 뻔했는데, 오늘은 고마웠어. ……아까 본 건 돌아가는 길에 다 잊고.”
……샤를리즈의 생각이 멈추질 않다니.
이 와중에도 훌륭하게 총지휘관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던 건 그저 몸에 밴 관성과 능력 덕택이었다.
아스킨이 입을 열었다.
“숲의 중심으로 갈수록 몬스터들이 더욱 강해지는 만큼, 오늘은 이곳에서 이른 시간부터 최대한 휴식을 취한 뒤, 내일 정오를 기점으로 다시 전진하도록 한다.”
“넷!”
“각 대장들도 최대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내일 아침 회의는 조금 늦게 시작하도록 하겠다.”
여기까지 오며 가장 많은 몬스터를 벤 것은 단연 아스킨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뒤에 머물며 명만을 내리지 않고 직접 나서는 아스킨의 모습은 물론 무위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대장들은 존경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스킨은 그들에게 최대한 휴식을 주기 위해 짧은 회의를 마치고 모두를 각자의 위치로 돌려보냈다.
그 뒤 자신 또한 거처를 만드는 일에 손을 거들었다.
산속의 밤은 급하게 찾아온다.
어두워진 숲속, 이안 차일드는 홀로 밖으로 나와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전쟁의 신이란 별칭이 무색하지 않은 솜씨군.’
이번 토벌에서 보여 준 아스킨의 전투 실력은 이웃 제국을 떠돌며 숱한 전투 경험을 쌓은 이안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했다.
사람들은 장사와 상인. 그리고 외교를 말했을 때 으레 협상장 혹은 회담장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간 길을 직접 개척해 온 이안은 실제 몸을 던지는 싸움판에도 몇 번이나 휘말려 왔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아스킨의 군더더기 없고 효율적인 칼 놀림과 적절한 병력 지휘는 전투 중인 자신의 집중력을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
이안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 또한 검을 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아스킨에게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긴 이안은 아스킨의 막사 앞에 도착했다.
“긴한 용건으로 공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이안의 말을 전달한 부관은 그의 부친이 붙여준 사람 ‘파이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킨의 허락이 떨어졌고, 파이란은 이안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곧 두 남자는 막사 안에서 마주했다.
아스킨은 이안이 들어선 순간부터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인간이 샤를리즈와 얼마나 가까운지, 이미 보았기 때문이었다.
샤를리즈가 언제부터인가 저 인간에게만큼은 묘하게도 거리를 허락했다는 것 또한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미움도 관심의 일종이라더니, 자신은 언제 이런 걸 확인한 걸까?
아니, 사실은 미움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때도 사실은 샤를리즈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아스킨은 티를 내지 않으며 이안을 응시했다.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전장이니만큼 예는 삼가도록 하지. 쉬라는 명령을 못 들은 것인가?”
“아닙니다. 잘 전달받았습니다.”
“전투에선 휴식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빨리 끝내도록.”
“예, 다름 아니라…… 궁금한 점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드러이 미소하는 이안을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불유쾌한 서늘함을 드러낸 아스킨이 시선을 옮겼다.
“뭐지?”
이안은 너무나 쉽게 질문을 받아들인 아스킨의 행동에 잠시 멈칫했다.
아스킨의 시선이 마치 무언가를 알아낸 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외람되지만 공작님께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싸우십니까?”
“어떤 마음가짐이라?”
“예, 혹여 제가 결례를 범한 거라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스킨은 대답 대신 이안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래로 늘어진 눈꼬리와 항시 예의 바른 몸짓.
자신 또한 예의를 모르는 자가 아니었지만 항시 거친 전장에서 구른 자신과는 다르게 물과 같은 예법이 몸에 밴 자였다.
게다가 자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얼굴을 굳히거나 화를 내는 일 없이 해결하는 화법까지.
‘……이런 남자가 좋은 것인가.’
아스킨은 또 한 번 떠오르고야 마는 벚꽃빛 머리카락의 색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안은 이를 모른 채 아스킨의 표정을 불쾌함으로 이해했다.
“이제까진 죽더라도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이번만큼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리 온화한 어조는 아니지만 아스킨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이안이 잠시 흠칫했다.
자신도 모르게 살아 돌아오라는 샤를리즈의 목소리를 떠올리고야 말았으니까.
“그렇군요. 이 질문 또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혹시…… 지금까지 강해지시는 것에 있어 특별한 방법이 있으셨습니까? 좋은 스승님을 두셨다거나.”
“좋은 스승, 경험 모두 중요하겠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전장에선 어떤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한편으로 이 자리에 참여했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토벌이 끝나자마자 적이 될지, 아니면 이 토벌 중에 적으로 돌아설지.
“네가 가는 토벌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돈을 투자했어. 무슨 뜻인지 아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샤를리즈의 말에 따르자면 이미 이 토벌은…….
‘거대한 올가미일지도 모르지.’
아스킨이 알고서도 뛰어든 것은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그가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대답이 되었나?”
답변을 마친 아스킨의 눈빛은 더욱 서늘하여 마치 이안을 억압하는 밧줄과도 같았다.
이안은 압박을 느꼈지만 티를 내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마주했다.
“실례지만 공작님 답변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한배를 탄 것이 아닙니까? 이 전장에서 총지휘관이신 공작님을 믿지 못한다면 저와 무수한 기사들은 대체 누굴 믿고 움직이겠습니까.”
“한배라……. 그렇다면 하나만 묻지.”
“예. 뭐든 성심껏 답변하겠습니다.”
“그대는 왜 실력을 숨기는 것이지?”
“……예?”
“진정 한배를 탄 동료라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