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스킨은 전장과 토벌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리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거의 용병처럼 뛰어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끝내는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되었고 실력을 숨긴 이쯤은 토벌로 어지러운 와중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몬스터와 뒤엉키는 자리에서 이안은 자신의 실력을 숨긴 채 움직였다.
평소엔 거의 티가 나지 않았으니 제 걸음걸이, 심지어 자세조차도 하나하나 신경을 썼단 말이었다.
“……숨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오해를 받기 죄송할 정도로 미천한 실력이라 아직은 조금 더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내가 쉽게 보였던 모양이지.”
“…….”
“아니면 그 정도로 해 두면 알아서 넘어갈 거라 믿는 건가? 나는 그대 집안에서 고용한 한낱 용병이니?”
“한낱 용병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래. 그대가 바로 그 가당치 않은 소릴 하는군.”
“…….”
“지나치게 겸손해. 한배를 탔다고 말하고 싶다면 이번 토벌에서 진심을 터놓는 법부터 배우도록.”
아스킨의 표정은 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이안으로서는 드물게 당황했지만 곧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결정했다.
본디 이안은 확실하지 않은 건 믿지 않는 주의였다.
아울러 모순적이지만 세상엔 확실한 믿음 따위 없다는 주의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아온 것은 그가 장사치 집안에 태어나 배워온 것이 이것뿐이기도 했고 그의 타고난 기질이기도 했다.
“어디 한번 둘 다 살아서 돌아와 봐. 너도 아스킨 레무트도.”
모두 한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공작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온 것이라 말씀드렸건만 사담이 길었습니다. 실은 이번 토벌이 끝나면…….”
“날 죽이라고 하던가?”
“……알고 계셨습니까?”
아스킨은 대화의 단절을 원하는 건가 싶을 만큼 싸늘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로 푸르른 기운이 일어났다. 경지에 오른 기사들만이 쓸 수 있는 힘 ‘오러’였다.
“경지에 오른 기사들이 평범한 기사보다 독에 강한 이유는 알고 있겠지.”
“…….”
“미리 대비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알고만 있다면 웬만한 독은 체내 오러로 해독할 수 있으니까.”
오러가 커지면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타닥, 타닥, 타닥!
무언가 타는 듯한 소리.
아스킨의 오러 안쪽에 기분 나쁜 검은색 물질들이 타올라 튀어 오르는 소리였다.
새까만 덩어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일으켰다.
“파이란이 주는 와인에 조금씩 녹아들어 있더군.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말이지.”
“…….”
독은 그의 혀와 후각으로 느끼지 못할 미세한 양으로 조절된 채였다. 숙련된 솜씨이다 못해 달인이라 불러도 좋을 실력이었다.
오러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만약 아스킨이 눈치채지 못한 채 섭취하다가 마침내 오러로 자연 해독을 할 수 없는 선을 넘었을 땐, 제아무리 아스킨이라도 무사하지 못하거나 위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이란은 그대의 부친이 붙여 준 사람이지.”
샤를리즈가 ‘알츠베이트 공작이 투자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었다.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부터 아스킨도 샤를리즈도 알고 있던 것이다.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이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목소리엔 평소와 같은 평온함은 없었다.
목을 드러낸 상황에서 아스킨이 당장 칼을 내어 목을 친다고 해도 방어할 수 없는 자세.
게다가 부친의 죄가 들킨 이상 당장 죽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뭐가 죄송하지? 목숨이라도 구걸하는 건 아닌 듯한데.”
“부친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음에도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
“이리 빨리 움직이리라고는 생각지…….”
“토벌이 성공하면 부담스러웠겠지. 토벌을 알츠베이트 공작에게도 들킨 이상, 추후 황실과 알츠베이트 공작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
차일드 가문은 천칭을 상징으로 삼는다.
그 저울대처럼 기울어지는 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완전히 한쪽에 서지는 않는다.
그들이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백작은 알츠베이트와 결합한 시점에서 제일 부담이 적은 쪽을 선택한 거겠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토벌과 새로운 로드 개척을 알게 된 이상, 차일드 백작은 알츠베이트의 뜻에 따라 아스킨을 제거하는 쪽을 택했다.
추후 황실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자신은 알츠베이트의 협박에 어쩔 수 없었단 말을 했겠지.
“계획대로 죽어 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그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정계란 이토록 더럽다.
아스킨 자신 또한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헛웃음이 스며 나왔다.
이 순간에도 더러운 것을 더럽지 아니한 척 고결한 척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독하고 더러웠음을 인정하는 샤를리즈의 솔직함이 그리운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정말 중증이었다.
“왜, 묻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 선택에 동조했는지에 관하여.”
“무엇이 달라지지?”
“…….”
“그래, 그대를 문책하지 않는 건 당장 약자에 대한 기사도라고 생각하게. 피로할 텐데 돌아가서 쉬도록.”
이안은 이것이 진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이라 생각했다.
이 말이 진심이라면, 어쩌면 조롱보다 더한 말이라 생각했다.
이안은 어느새 꽉 쥔 제 손을 응시했다.
“샤를리즈 공녀님께서 공작님께 마음을 주신 것은 이런 고결함과 도덕적인 모습 때문일까요?”
뒤로 돌아 책상으로 걸어가려던 아스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돌아섰을 때 색이 다른 한 쌍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글쎄, 그건 그녀만이 아는 일이지.”
아스킨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픽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중요한 건 너도 나도 알츠베이트 공녀의 취향은 아니라는 점이겠지.”
이렇게 말하는 아스킨의 말의 이면엔 부디 그러했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 있었다.
아니, 9할은 바람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저 남자에게도 네가 아직 마음을 주지 않은 것이면 좋겠다. 이건 바람이야.
……내가 돌아가 기회를 구걸할 때까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부드러움보다는 절도가 느껴지는 인사였다.
“……공작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언젠자, 공작님 눈에 약자가 아닌 검사와 검사로서 당당하게 대결을 청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이안이 떠나간 막사 안.
아스킨은 이안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재능이 출중한 자다.’
재능을 깨닫기엔 아슬아슬한 나이지만 만약 깨우친다면.
아스킨은 저 남자와의 악연이 짧게 끝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마음속에서 상반된 감정이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 * *
이안은 막사에서 나와 자신의 부관을 대동하고 파이란의 숙소로 들어갔다.
파이란은 뜻밖의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갖추었다.
“차일드 경 아니십니까.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파이란이 이안을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파이란의 정체를 아는 이안의 표정엔 평소와 같은 미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눈치 빠른 파이란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살짝 굳었다.
“이제 그만하지.”
파이란은 예상했다는 듯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었다.
“안 됩니다. 부친께서 도련님이 무어라 부탁하시더라도 무조건 실행에 옮기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명령이다, 당장 멈춰.”
부친은 이미 이 상황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절대 이안의 명을 들어주지 말라 엄포해 둔 상태였다. 이를 뻔히 들었음에도 이안의 표정엔 한점 변화가 없었다.
“이안 도련님. 알츠베이트 공작님을 적으로 돌리시려는 겁니까?”
파이란이 마치 뱀처럼 속살거리며 음성과 말로써 이안을 옥죄려 들었다.
감히 차일드에서 알츠베이트를 적으로 돌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당연한 우려였고 걱정이었으며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협박이기도 했다.
이안이 천천히 제 검집에 손을 올리자, 파이란은 자신의 품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 재빠르게 이안의 목에 겨누었다.
“도련님, 제가 평범한 부관으로, 시종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안은 자신의 눈을 살며시 감았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분노를 표출하도록 배우지 않았다.
“본디 모든 전장과 토벌에서는 급할 시 현장 지휘관의 명이 우선되는 법이지.”
오히려, 이 분노마저 상황에 유리하도록 배웠을 뿐.
느릿하게 호흡을 조절하던 이안이 눈을 떴을 때, 웃고 있지만 서늘한 눈동자가 보였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위험하리만큼 예기롭게 일렁거렸다.
“전시에 명을 어기는 자는 참수뿐이다.”
“도련님.”
“의미 없는 살생을 하고 싶지는 않아, 파이란. 넌 아버지가 비밀리에 키우고 아껴 온 수하란 걸 잘 알지. 마지막 명령이다.”
“이안 도련님, 저는 실전으로 단련된…… 커흑!”
파이란의 손에서 검이 툭 떨어졌다.
그는 이안이 검을 뽑는 것조차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이안은 바닥을 적시는 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이란이 흘린 피가 그의 셔츠를 적시다 어느 한곳에서 검게 변했다.
‘몸에도 독을 지니고 있었던 건가.’
이안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파드득 떠는 파이란을 멀거니 보았다.
마침내 파이란이 눈을 감았을 때, 자신의 턱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냈다.
‘공녀님, 이 정도면 제 의지가 증명이 되었으려나요?’
눈앞에 아른거리는 샤를리즈의 형상을 보고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의 마지막 말조차 남기지 못한, 아버지가 보낸 암살자를 내버려 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