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리아는 알츠베이트 공작가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자신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샤를리즈 덕분이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날 때부터 함께한 유모도 이렇게는 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보살핌을 주곤 했다.
“아리아, 이것도 좀 먹어 봐요.”
레무트 가문은 기본적으로 무가(武家)였다.
대대로 검을 숭상하고, 몬스터를 잡아 온 이 가문은 아이들 또한 강인하게 키웠다.
이 탓에 아리아의 부친은 분명 레무트의 사람치고는 다정하고 인자했으나,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병약하게 태어났음에도 또래 영애들에 비해서, 또 처지에 비해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나마도 부모님이 죽고 오빠가 해 준 기억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스킨 또한 레무트였던지라, 게다가 아리아의 약값을 위해 나가는 일이 잦아질수록 아리아가 따뜻함을 느끼는 순간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또래 여성과의 교류가 전혀 없던 아리아로서는 이제는 정말 진짜 언니라도 생긴 듯한 기분에 포근함은 물론 포근함이 지나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아리아, 이것도 좀 먹어 봐요.”
“언니도……! 언니도 드세요.”
“나 지금 많이 먹고 있잖아요?”
샤를리즈가 포크를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포크 끝에는 제국 남부에서만 만들어지는 싱싱한 최고급 소고기가 잘 익혀진 채 꽂혀 있었다.
이 또한 샤를리즈가 아리아를 위해 특별히 만든 스튜에 들어간 고기였다.
“그렇게 조금씩 먹어서 어떻게 튼튼해지겠어요?”
애정이 담긴 타박.
자신을 보살펴 주는 모습을 볼수록 아리아는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엄마의 모습이 이러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코가 찡했다.
여기서 울다니, 정말 주책이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훌륭한 숙녀는 울지 않아!
게다가 눈앞의 ‘훌륭한 숙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아리아는 더더욱 참기로 했다.
훌륭한 숙녀라고 하기엔 샤를리즈의 악명이 어마어마했지만 이미 아리아의 머릿속에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단, 문제가 있었다. 눈물은 참을 수 있었지만,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까지 억누를 순 없었다.
“아리아, 왜 그래요? 아파요?”
“아니에요. 언니한테 너무 고마워서요. 이 은혜는 꼭…….”
“뚝. 그 말은 이제 더는 안 해도 된다고 했죠?”
“네……. 사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리아의 말에 샤를리즈의 표정이 묘해졌다.
책 속에서 아리아의 모친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하기야 주연도 아니고 조연의 부모까지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건 아리아가 아주 어린 시절에 남매를 두고 죽었단 점이었다.
“어머니는 편하게 계실 거예요. 이렇게 자랑스러운 딸이 있잖아요.”
샤를리즈는 결국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만 아리아의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수정구슬처럼 커다란 두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아리아는 결국 세수를 하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은 샤를리즈는 아리아가 사라진 자리를 착잡하게 보았다.
‘어휴…….’
혹시 아리아가 불편할까 싶어 하녀들과 시종들도 모두 물린 채 방에서 식사 중이었다.
아리아의 올망졸망한 눈물을 보고 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심성이 진짜 착하다니까…….’
역시 우리 눈 토끼는 심성부터 달라. 이리 생각한 샤를리즈의 입이 슬쩍 열렸다.
“친오빠 안 닮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녀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였다. 방 안에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존재감을 확 드러내는 구멍에 샤를리즈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게 왜 지금 생겨?!’
샤를리즈는 벌떡 일어나 구멍을 막아 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애초에 손으로 막아질 리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숄도 던져 보고 식탁 위의 물도 뿌려 보았지만 구멍은 더더욱 커다래져, 이윽고 사람이 통과할 만한 크기가 되었다.
폭군과 노아가 드나들던 구멍이었다!
‘안 돼, 지금 아리아가 있는데……!’
폭군 그놈은 여태 내도록 조용하더니 왜 하필 언질도 없이 오늘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언질이란 걸 하지 않는 인간이었지만 다급해진 샤를리즈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경악을 배신하고서 구멍으로 사람이 나타나고야 말았다.
구멍 사이로 거대한 체구가 나타난 것이다.
‘……이미 늦었어.’
웬일인지 이번엔 노아부터가 아니라 록시디언이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따라서 노아가 나타났다.
록시디언은 이곳에 이동하자마자 심상치 않은 샤를리즈의 얼굴을 마주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러 일의 여파로 그의 여동생은 최근에 늘 이런 상태였던 것이다.
“잘 있었냐?”
“방금 전까지는. 완전 잘 지냈거든?”
너 때문에 망쳤다, 이런 의사가 팍팍 느껴지는 말에도 폭군은 피식 웃기만 했다.
너의 슬픔은 나의 행복이란다, 짓궂은 미소까지 띤 채로.
“오빠, 지금은 내게 정말 중요한 일이 있거든. 나중에 다시 올래? 급한 용건이 있더라도 내일 듣겠어. 아니다, 내가 내일 황성으로 찾아갈게. 꺼져 줘.”
“……허? 살다 살다 이 몸에게 꺼지란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응. 알았으니까. 사라져 줘.”
“제국의 황제가 온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뭐야, 너 수상한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설마 새로운 남자라도 생겼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샤를리즈는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 아리아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몰랐다.
샤를리즈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운 오빠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 환한 빛을 내는 구멍으로 이 두 남자를 도로 집어넣어 버려야 했다.
결국 샤를리즈는 다짜고짜 이들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노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고, 공녀님?!”
“일단 내가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까 지금은 제발 좀 돌아가라!”
“제발? 제에발? 너 진짜 남자 생겼냐!”
“남자고 나발이고 생기면 너랑 무슨 상관인데?! 아니, 아니니까 돌아가, 썩 꺼져!”
“그래? 당장 이유를 말하면 갈게.”
“아오, 제발 말 좀 들어라.”
샤를리즈가 폭군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 조금 전엔 제가 괜히 주책…….”
문을 닫고 울려 퍼지던 목소리가 딱 멈췄다.
샤를리즈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상황이 속된 말로 X되었음을 느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천히, 그렇지만 우아하게 등을 돌렸다.
“아리아, 어서 와요. 잘 다녀왔어요?”
“언니…….”
“아, 새로운 사람이 있어 놀랐죠? 이쪽은 내 친오빠예요.”
샤를리즈는 아리아가 단 한 번도 사교계에 나온 적 없음을 되새겼다.
그렇다는 건 제 친오빠인 황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소리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는 록시디언의 얼굴을 보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그러다 아리아는 록시디언의 옷에 화려하게 수놓아진 문양을 발견하고서는 재빠르게 예를 갖추었다.
“제,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예를 갖춘 동시에 약간은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문제 삼을 만한 자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아를 상처 입은 새처럼 청아하고도 가련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네. 친오빠이자, 제국의 황제기도 하죠.”
샤를리즈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폭군이 자신을 제외하고서는 퍽 차갑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회에서 록시디언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모를 수는 없었다.
혹시나 아리아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불안한 기분으로 록시디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놀랍게도 폭군은 저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리아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싸늘함은커녕 묘한 호기심마저 느껴졌기에 샤를리즈는 눈을 끔뻑였다.
“예를 갖추려면 제대로 해야지. 이름이 빠졌잖아.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앗, 네! 저는…….”
“오빠, 내 손님이야. 불청객은 오빠 쪽이니 빨리 돌아가.”
샤를리즈는 슬쩍 아리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는 아리아의 답변을 빠르게 차단했다.
아리아가 누군지 이름을 듣게 되면 저 폭군 또라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사실 숨기기엔 외모가 너무 명백하긴 하지만……. 아직은 시치미를 떼든 해서 쫓아 버릴 수 있어.’
이름을 들려주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샤를리즈의 얼른 가라는, 짜증 섞인 압박에도 폭군은 아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진다.
아리아가 대답이라도 할까 노심초사한 마음에 샤를리즈가 대신 나섰다.
“오빠, 여기는 내 친구로, 이 친구는 이름이…….”
“레무트 공작가겠지.”
샤를리즈의 입에서 하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결국 기어이 도장을 찍으려는 모양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 보려 했건만 폭군이 직접 그 시도를 무참하게 치워 버렸다.
그녀는 록시디언이 아스킨 레무트에게 얼마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았다.
어찌 보면 남매로서 생각해 주는 그 마음은 고마울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리아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초조한 마음이었다.
‘확 뒤통수라도 쳐서 기절은 못 시키겠지…….’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샤를리즈는 눈을 지그시 감아 버렸다.
여차하면 목걸이를 손에 쥐기 위해 손가락을 슬며시 풀며 준비 운동까지 마쳤다.
하지만 샤를리즈가 눈을 떴을 때, 폭군에게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