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레무트 공작가의 귀한 공녀.”
록시디언에게서 흘러나오는 나직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는 혈육으로서 듣기에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눈앞에서 못 볼 걸 본 것 같은데, 앞에 아리아가 있어서 무어라 하기는 애매한 상황? 샤를리즈는 이 기분에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제 건강은 괜찮아진 것인가?”
이상했다. 샤를리즈가 알기로 분명 록시디언은 아리아와 처음 대면하는 것일 텐데, 마치 잘 알기라도 하듯 말을 건넸던 것이다.
게다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게…….
‘진짜 아스킨 대신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 아니야?’
물론 록시디언이 아리아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스킨이 제 여동생을 위해 어떤 일까지 했는지는 제국의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하지 않던가.
허튼짓이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나설 생각으로 몸을 움직이는데, 아리아가 허둥지둥 움직였다.
“예, 황제 폐하의 은혜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조금 전 처음 인사할 때에 비하면 비교적 차분한 답변이었다.
“내 여동생과는 친분이 깊어 보이는군. 샤를이 친구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는 건 처음 봐서 말이야. 오붓한 시간에 실례했네.”
그 순간 샤를리즈는 멍하니 제 오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뭐? 샤아르을? 게다가 저 멀쩡한 목소리는 뭐야? 오래전 윤지훈을 바깥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밖에서 만난 오빠는 사회생활 멀쩡히 하는 회사원이었다.
배나 긁적이고 트렁크 바람으로 배회하는 오빠 놈이 아니라 멀쩡하게 보이는 윤지훈이라니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지금의 기분이 딱 그러했다.
“아, 아닙니다……. 고, 공녀님과 제가 친분이 있고 마, 많이 친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이어서 자신의 눈치를 보듯, 특히나 ‘많이 친하다’에서 눈치를 보는 아리아의 귀여운 모습에 모두 잊혀지고 말았다.
어쩜 이런 귀여운 존재가 있을까!
“그럼요, 많이가 아니라 아주아주 많이 친하죠. 아리아 말고는 이 집뿐 아니라 내 방에까지 들이는 친구는 없는걸요.”
아 물론 개망나니즈라고 멋대로 저택에 쳐들어오는 친구들은 있었으나, 걔들은 친구가 아니었다. 망나니즈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그럼 내 여동생과는 좋은 시간 보내도록.”
샤를리즈는 순순히 대화를 마무리하는 록시디언을 보며 다시 한번 의구심이 솟았다.
뭐야, 아리아에게 대신 응징하려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아니면 설마 지금은 탐색전이고 다음에 보복하려고?’
그런 치사하고 치졸한 짓을 할까? 싶었지만 이미 제 오빠는 선례가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예, 감사드립니다…….”
아리아가 어깨를 살짝 떨고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록시디언의 시선이 물러나는 아리아를 뒤쫓았다.
폭군의 이상 반응에 당황한 건 샤를리즈뿐만이 아니었다.
노아 또한 자신의 주군이 보이는 행동에 당황하던 참이었다.
‘현재 레무트 공작이 눈앞에 없으니 대신 응징이라도 하시려는 걸까?’
동시에 샤를리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샤를리즈가 알았다면,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할 만한 생각이었다.
그사이 록시디언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노아에게 재빨리 포탈을 열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노아는 표정으로 아리아가 보고 있다는 듯 난감한 얼굴을 했다.
폭군의 비서관인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건 극비 사항이었다.
샤를리즈야 폭군의 하나뿐인 혈육이었지만 아리아 레무트는 그렇지 않았다.
제아무리 친구라곤 두지 않을 것 같은 공녀님이 애지중지하는 눈치라고는 하나, 이런 기밀 사항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이러한 뜻을 알아차린 록시디언이 샤를리즈를 향했다.
“샤를.”
샤를리즈가 ‘이 새끼 미쳤나?’ 하는 시선으로 보았지만 록시디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물론 그라도 샤를리즈가 목걸이를 매만지자 아주 잠시 사나워졌지만.
“내가 여기 보좌와 잠깐 급히 이야기를 놔눌 일이 생겼는데,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겠어?”
샤를리즈는 황당했다.
‘……이 XX, 여기가 내 방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지?’
하지만 샤를리즈는 여기서 폭군과 왈왈대며 싸울 생각은 없었다.
아리아는 황제를 만난 것만으로 살짝 얼이 나간 듯했으니까.
“기꺼이, 오라버니.”
또한 노아를 눈짓하는 폭군의 모습에서 돌아가려는 것을 눈치챘다.
이제 저놈이랑 눈짓만으로 통하다니, 결코 유쾌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남매는 그렇게 서로 눈으로 욕하며 시선을 서로 움직였다.
“아리아, 우리 잠시 나갈까요?”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손을 잡고서는 방을 나섰는데, 예의 바른 아리아는 살그머니 눈치를 보면서도 황제에 대한 예를 잊지 않았다.
“황제 폐하,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두 여성이 나간 뒤 문이 닫혔다.
록시디언은 샤를리즈와 아리아가 떠난 문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보좌야, 알아봐야 할 게 있겠다.”
이윽고 노아가 록시디언의 얼굴을 슬쩍 향했을 때, 록시디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당장.”
* * *
몬스터들의 본거지는 숲과 이어진 산맥,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시작해 숲으로 내려왔기에, 숲을 토벌하려면 자연스럽게 이곳까지 처리해야 했다.
또한 산맥의 가장 깊은 곳이지만 동시에 상인들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의 기간을 아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아스킨은 오늘 이곳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이곳을 점령한다는 건 곧 이 토벌의 끝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인원 점검은 모두 마쳤나?”
“예, 공작님.”
고개를 숙이는 자는 영지에서부터 아스킨을 오래 모셔 온 부관 벤이었다.
벤은 아스킨에게 다가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한데 공작님…… 차일드 백작이 보내 준 부관 겸 시종이라는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건 막사 안에 짐도 그대로 있긴 합니다.”
아스킨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장에서 도망치는 놈들이 한둘인가,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됐다. 오히려 잘된 일이겠군. 준비 사항은?”
“예,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벤이 자리로 돌아가 도열했다.
아스킨은 눈앞에 정갈하게 서 있는 병력을 향했다.
어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탓에 도망자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게다가 차일드 백작이 붙여 준 자라니, 이 토벌에 열의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어쩌면 차일드 백작에게 돌아가 보고라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스킨은 병력 맨 앞줄에 서 있는 이안을 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떨어지고, 모든 인원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전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전투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살아서 돌아간다.”
“예!”
많은 전투를 거쳐 온 상황인지라, 모든 병력은 아스킨을 숫제 신처럼 모시는 듯한 시선을 했다.
실제로 자신이 먼저 적진의 한가운데를 향해 앞장서는 모습엔 전신(戰神)의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이 탓에 따르는 이들 중 대부분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죽음마저 영광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몬스터의 본거지에 이르러 마지막 전투에 돌입했다.
본거지인 만큼 몬스터의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마치 자신들의 둥지를 잃지 않겠다는 듯이.
전투는 극단으로 내달렸다.
“대형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에 마력을 더 주입해!”
“서쪽이 비었다! 젠장, 의무병!!”
인간 또한 집을 공격받으면 필사적으로 나서듯 몬스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버티는 몬스터들을 볼수록 병사들에겐 이것만 해치우면 끝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토벌대가 이처럼 이를 악물며 몬스터들을 베어 가며 전진할 때였다.
비교적 수월하게 느껴지던 전진이 가로막혔다.
쿠웅!
반대편에서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거대한 진동에 토벌대는 일시에 정지한 채로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검은 모래바람이 가장 먼저 보였다.
먼지바람이 가라앉자, 거대한 몬스터가 주변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잡아 먹으며 토벌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킹 미노타우르스다!”
“산맥의 주인이다!! 당장 전열을 가다듬어라!”
얼굴은 소의 머리를, 아래로는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되, 다리는 침팬지의 것처럼 부숭부숭한 털이 가득한 저 몬스터는 이 산맥의 주인 킹 미노타우르스였다.
‘나타났나.’
다시 말해 저것만 쓰러트린다면 이 토벌은 토벌대의 승리였다.
이 본거지까지 온 것 또한 저것을 맞닥뜨리기 위함이었다.
“전원 정신 차리고 집중하라! 전략대로 각 대장급들은 나와 함께 산맥의 주인을 상대한다! 이외 부대장과 각 소대원들은 뒤편 몬스터들을 제압하라!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와아아아아!
이렇게 외친 아스킨은 몬스터의 피로 흥건한 검을 들고 산맥의 주인과 대치했다.
“살아 돌아와.”
어째서 샤를리즈의 목소리가 지금 생각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아직 거리가 있지만 킹 미노타우르스가 내뿜는 기운에 아스킨은 실로 오랜만에 온몸의 세포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결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가 몬스터들에게 포위되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일이었다.
아스킨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명령을 내린 후 가장 먼저 앞장서서 산맥의 주인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