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아악! 다리가 안 움직입니다……!!”
“꼬리를 조심해라, 독침이 돋아 있다!”
“검은 모래바람이 불어옵니다!”
“모두 빨려 들어가지 않게 꽉 잡아라!”
산맥의 주인은 자신이 불리해질 때면 거대한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모든 것이 빨려들어갈 것 같은 바람이었다.
그사이에 숨을 잔뜩 들이마신 킹 미노타우르스는 바람에 더해 제 입에서 엄청난 화염을 토해 냈다.
가히 몬스터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살벌한 모습이었다.
“피해! 방패로 맞서지 마라!”
순식간에 너무도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스킨의 판단은 빨랐다. 이대로 가면 모든 인원을 잃을지도 모른다!
“대장들 모두 뒤로 물러나, 후퇴하라!”
기가 실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명령에 산맥의 주인을 상대하던 기사들이 일시에 뒤로 물러났다. 아스킨은 홀로 산맥의 주인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셔츠를 부욱 찢었다.
헝겊으로 손과 검을 묶어 그대로 꽉 감싸 쥘 때였다.
“공작님,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이런 멍청한 소릴 누가 하는가.
아스킨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이안이 있었다.
“패턴을 알았습니다. 모래바람을 일으킬 때 아주 잠시 정지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때 시선을 끌면, 약점인 목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아스킨은 이안이 자신과 똑같은 것을 보았단 것에 놀랐다.
그러나 찡그림을 펴지 않았다.
“이안 차일드, 당장 돌아와라! 명령이다!”
“이대로면 모두 죽습니다!”
이안이 이를 꽉 물었다. 샤를리즈는 둘 다 살아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만약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어떤가?
‘……어쩐지 우리 공녀님은 나를 택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어쨌거나 한 번이라도 사랑했던 사람을 고르지 않을까.
바로 저 남자를 말이다.
“한배를 탄 이상 후회는 없습니다. 기회는 한 번뿐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이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로는 킹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검은 순식간에 킹 미노타우르스 발에 꽂혔다. 두꺼운 가죽 때문에 제대로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윽!’
이안이 빠르게 검을 들어 올렸지만 자신의 발에 상처를 입히는 상대를 가만히 둘 킹 미노타우르스가 아니었다.
킹 미노타우르스의 시선이 이안에게 집중된 사이, 아스킨의 눈에는 목덜미가 노출된 것이 들어왔다. 약점이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야 한다.
아스킨은 할 수 있는한 최대치의 속도를 끌어 올려 킹 미노타우르스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갔다.
이안은 최선을 다해서 몬스터의 관심을 끌었다.
아스킨의 눈으로 보기엔 저건 미친 짓이었다.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었기에 결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사이의 이안의 몸으로 상처가 수없이 늘었다. 큰 부상은 피했지만 시간문제였다.
아스킨이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는 사이, 이안은 몬스터의 오른쪽 발톱을 경계했다.
아스킨의 눈에도 그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안은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꼬리 공격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몬스터의 목덜미가 훤하게 드러난 상황!
‘안돼, 지금 목을 찌르면 죽일 수 있을진 몰라도…….’
이안 차일드는 무조건 죽는다.
아스킨은 목덜미를 향해 뛰어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방향을 옮겼다.
이안의 등 뒤로 뛰어간 아스킨이 날아오는 검을 자신의 검으로 튕겨 냈다.
카앙!
꼬리와 발톱 공격이 모두 튕겨 나간 킹 미노타우르스가 눈을 그케 뜬 순간, 몬스터의 눈으로 아스킨의 검이 정확하게 꽂혔다.
크와아아아아악!
대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몬스터의 비명이 토해졌다.
가까이 있던 기사들의 귀로 피가 흘렀다. 고막에 손상을 입은 것이다.
순식간에 눈을 잃은 몬스터는 괴성을 지르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스킨은 그사이 눈알에 꼽혀 있던 검을 뽑아, 킹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오라를 날렸다.
그의 홍채를 닮은 푸른 빛이 목을 꿰뚫고, 곧이어 심장을 관통한 검이 뽑히자 검은 피가 대지를 적셔 버리듯 뿜어져 나왔다.
“……독성이 있는 피다. 모두 물러나.”
아스킨은 끝까지 주변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미물인 몬스터일지라도 대장과도 같은 킹 미노타우르스를 잃은 탓인지, 허무하게 나머지 토벌대에게 제압당했다.
“모두 정리하고 피해 보고 진행하라!”
아스킨은 전장을 수습하며, 토벌대들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다녔다.
토벌이란 성공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낳는 일이었다.
부산물들은 몹시도 비싼 값에 팔렸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각종 부산물들을 싣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아스킨은 킹 미노타우를 사체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안의 모습을 보았다.
아스킨은 외면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다, 돌연 다시 돌아서 이안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
이안은 제 앞으로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제 판단이 틀렸던 것입니까?”
산맥의 주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휘관의 명령을 어겼으니 틀린 것이겠지. 전장에서 감정을 앞세우는 짓은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몰랐다면 더욱이.”
“…….”
이안이 제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이내 얼굴을 문질렀다.
잘생긴 얼굴에서 하아, 하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외교관의 마음가짐과 비슷하군요. 협상에서 감정을 앞세우는 것 또한 전 재산을 잃는 지름길이니.”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저 같은 상인이 전 재산을 잃는 건 곧 자살과 직결되는 건 모르시나 보군요.”
“…….”
이안은 웃음 속에 막 드러낼 뻔한 진심을 삼켰다.
조금 전에 자신은 그 전 재산을 걸고서 나선 것이었다고.
전 재산을 건 도박이라니, 가문의 기치를 생각하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안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가 생각한 가치를 생각하지 않은 채 움직였다.
왜 그러한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안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평소처럼 자태가 흘러넘치는 완벽한 예법은 아니었으나 절도 있는 인사였다.
“모든 병력을 책임지는 지휘관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아스킨은 이안이 일부러 이렇게 인사를 올렸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한배를 탄 것을 축하하네.”
이안의 에메랄드빛 눈이 눈앞의 사령관을 향했다.
어쩌면 이 영역이 자신의 영역이었다면, 협상 테이블이었다면 승리한 것은 응당 자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자신의 영역을 버리고 이 남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 남자에게 혹시 모를 위험을 알리고 살리기 위해서.
사실은 그럴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스킨은 처음으로 이안이라는 남자에 대해 인정하는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라.’
아이러니하게도 아스킨은 이안의 인사를 받으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스킨 자신은 오랫동안 제 잘못된 시야를 인정은커녕 피하기 급급했지 않았던가.
샤를리즈가 새롭게 끌리는 인물은, 샤를리즈는 저런 모습에 이끌렸을까?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스킨은 표정을 시무룩하게 일그러트렸다.
시무룩함이라니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하, 이러다 눈물이라도 뚝 흘리겠군.’
아스킨은 한 치 앞도 모르고서 이런 생각을 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조만간 자신이 지금 생각한 그대로 행동할 줄은 전혀 모르고서 말이다.
* * *
오늘도 아리아와 함께 쇼핑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뉘엿뉘엿 지는 노을 속에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우리 눈 토끼 아가씨는 도대체가 안 어울리는 옷이 없더라고?
‘내가 생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주세요를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지. 그것도 내가 재벌이 되어서 사 주는 역할이 될 줄은 더더욱 말이야.’
성인 다섯이 들어도 다 들지 못할 한가득한 짐은 시종이 들고 가거나 마차에 싣거나 아니면 저택으로 배송을 요청해 두었다.
“언니……. 옷은 이제 진짜 그만 사도 될 것 같아요. 제, 제 방엔 더 이상 놔둘 공간도 없겠어요……!”
“어머, 이제 한 계절 옷 산 건데 뭘 그래요.”
샤를리즈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공간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죠.”
샤를리즈의 맑은 미소에 머뭇거리던 아리아 또한 밝게 웃었다.
그런가? 그래, 언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이제 아리아는 샤를리즈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자신이 있었다!
언니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했다고?
그럼 해는 서쪽에서 뜨는 거!
샤를리즈가 없었다면, 아리아는 아스킨이 돌아올 때까지 방 한구석에서 걱정만 한 채 우울하게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샤를리즈가 있어 준 덕에 가끔씩이나마 오빠에 대한 걱정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물론 혈육이기에 완전히 잊는 건 불가능했다.
‘……오빠는 나 때문에 위험한 곳에 간 거니까.’
오늘 많은 옷을 미리 저택에 보내거나 시종들이 들고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뒤로는 많은 시종들이 옷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아리아와 함께 저택에 들어서다가 달갑지 않은 인물을 만났다.
‘윽, 저 영감은 왜 지금 여기 나타난 거야?’
지금까지 용케 마주치지 않았던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