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6/194)

135화

공작은 그간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저택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스킨을 죽이려 든 계획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우연과 샤를리즈의 의도가 겹쳐 지금까지 알츠베이크 공작은 아리아를 보지 못했단 소리다.

‘나만 빨리 인사하고 들어가야겠다.’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교묘하게 뒤로 숨긴 채 혼자만 앞서 나가 인사를 꾸벅 올렸다.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그간 많이 바쁘셨나 봐요? 저는 몸이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

“허어, 할애비를 보고 올리는 말버릇이 그게 무엇이냐? 넌 어떻게 클수록…….”

알츠베이트 공작은 잔소리를 이어 가려다, 샤를리즈의 뒤로 보이는 아리아에게도 시선을 향했다.

그대로 우뚝 멈춘 채 아리아에게 집요하게 고정했다.

노회한 공작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샤를리즈가 숨긴다고 숨겼지만 숨겨질 리가 없었다.

“너는 레무트 공녀가 아니더냐?”

“알츠베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아리아는 서둘러 치마를 살포시 잡고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여긴 어쩐 일인가? 그리고…… 네가 내 손녀와 친했던가?”

알츠베이트 공작이 아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록시디언 또한 아리아를 관찰했지만 그가 바라보던 눈빛과는 전혀 다른 시선이었다.

노골적인 무시가 느껴졌다.

물론 록시디언은 아리아를 위아래로 훑지도 않았다.

‘저 영감이 미쳤나. 감히 저 썩은 동태눈으로 아리아를 보고 있어?’

샤를리즈는 저 영감이 물건에 가치를 매길 때 보이는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모를까? 자신을 볼 때도 가치를 매기는 인간인데.

지금 저 영감의 눈빛이 바로 저 눈빛이었다.

당장 아리아의 가치를 매겨 최대의 이익을 올리려 드는 그 이익을 모두 독차지하려 드는 이리같은 탐욕스러운 눈빛.

“레무트 공녀가 나랑 친하든 말든, 그게 왜 중요한데요?”

“허, 녀석. 말버릇하고는. 내 지금까지는 그냥 두었지만 곧 혼약도 올릴 숙녀가 보일 말버릇은 아니구나. 레무트 공녀가 우리 가문을 뭘로 보겠느냐?”

그때였다. 샤를리즈와 알츠베이트를 열심히 번갈아 보며 집중하던 눈 토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앗, 저는 알츠베이트 가문을 좋게 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악의라고는 한점 없는 순수하고도 새하얀 외침이었다.

알츠베이트는 나빠. 하지만 언니의 가문이지.

언니의 가문은 뭐다? 찰나 가치 충돌한 아리아의 새하얀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오늘부터 좋은 가문 하자!

기 싸움을 이어 가던 알츠베이트 공작마저 찰나 얼빠져 보게 될 만큼.

정신을 가장 먼저 차린 건 다름 아닌 샤를리즈였다.

“아리아, 꼬박꼬박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샤를리즈는 얼이 빠진 알츠베이트 공작을 흘끗 보았다.

“할 말 끝나셨으면 이만 들어갈게요. 피곤하네요.”

샤를리즈는 감히 아리아를 향해 더러운 욕망을 보인 저 영감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여기 있는 눈 토끼를 놀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리아 입장에서 이런 콩가루 집안은 처음 보겠지.’

샤를리즈는 뒤에서 자신을 불러세우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아리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방에 도착했을 때,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언니……. 제가 여기 있어서 곤란하신 거죠?”

“무슨 소리예요, 아리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네?”

“이상한 사람이 말을 걸면 무시하거나 확실하게 싫다고 의사 표현을 해야 해요. 알겠죠?”

“어…….”

“자 따라해 봐요, 안 돼요. 싫어요.”

“안 돼요, 싫어요……?”

“대머리야.”

“대머리, 네?”

아리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알츠베이트 공작님이 대머리, 아니아니! 이상하신 분인가요? 인자하게 생기셨던데…….”

“아리아, 기억해요. 그 인간은 나쁜 놈이에요. 당신과 오빠를, 그리고 당신의 가문을 힘들게 만든 주범.”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아끼고 좋아했지만, 과거 ‘샤를리즈’와 알츠베이트 공작이 한 일마저 미화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나도 나쁜 사람이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건 기쁘지만 진실을 왜곡해서야 되겠는가.

“언니……!”

“아, 알아요. 지금은 아니란 거죠? 나도 그래요. 지금은 그 누구보다 아리아가 소중하거든요.”

그래서 네가 오래오래 살아 줬으면 좋겠어. 혹시나 내가 일찍 죽더라도 말이야.

샤를리즈는 하지 못한 말을 살짝 삼켰다.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영감의 얼굴이 인자하다고요? 아리아, 이 언니가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네요.”

소위 말하는 ‘꼰대’ 같지만 아리아의 선량함이 그 망할 영감을 향해서는 절대 안 된다.

샤를리즈는 그날 하녀들을 시켜 칠판을 가져오게 했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밤늦은 시간까지 전생에서 배웠던 ‘관상은 과학’이라는 이론을 무려 그림까지 그려 가며 아리아에게 설명했다.

아리아는 아주 착하게도 이상한 표정을 짓는 대신 열심히 끄덕이며 질문까지 하는 열성 학생이었다.

“네! 앞으로 알츠베이트 공작님처럼 생긴 사람은 피할게요!”

“관상은?”

“과학이에요!”

* * *

토벌대의 마지막 밤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

당일 엄청난 양의 몬스터와 더불어 아스킨이 산맥의 주인을 토벌하기까지 했으니,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부상자도 사망자도 있었으나 모두의 얼굴엔 피로보다는 몬스터들을 완전히 토벌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돌아가면 우린 영웅이 될 거야!”

“암, 새로운 역사를 쓴 거지! 곧 우리가 토벌한 길에 새로운 로드가 생기는 셈 아닌가!”

개중 들뜬 이들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서 어떤 소문을 낼 것인지 떠드느라 바쁜 병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스킨은 홀로 고요했다.

그는 돌아가는 길 또한 임무의 일환이라 생각했기에 아직 임무를 끝낸 것이 아니라 여겼다.

그렇기에 병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토벌을 끝낸 이들은 늘어지거나 피로하거나 나른해 보였다.

아스킨은 흐트러진 정렬을 탓하지 않았다.

“제군들 덕분에 킹 미노타우르스까지 제거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레무트 공작님 덕분입니다!”

“맞습니다, 공작님 감사합니다!”

용기 내어 외친 기사를 시작으로, 곁에 있던 기사들이 하나씩 아스킨의 공을 앞다퉈 말하기 바빴다.

그들은 진영 상관없이 자신의 총사령관을 향한 존경으로 가득했다.

‘공작님의 추종자가 늘겠군.’

아스킨의 부관인 벤은 아주 익숙하게 보아 온 풍경이었다.

“레무트 공작님 만세!”

“만세!”

뜻하지는 않았지만, 장내는 다시 축제 분위기처럼 달아올랐다.

아스킨은 이들이 승리감을 만끽하며 스스로 다시 집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아스킨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짓에 사람들은 거짓말같이 조용해졌다.

“제군들 모두 잘 따라와 주어 고맙다. 부상자도 사망 인원도 있었으나, 나는 그대들 하나하나의 노고와 고생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토벌대에겐 아직 한 가지 임무가 남았다.”

아스킨은 좌중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대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 또한 나의 역할, 그대들이 그리워하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마음 다잡길 바란다.”

“예, 공작님!”

아스킨은 사람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전장과 토벌을 떠돌며 병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덕분에 이 순간 병사들이 가장 원하는 말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한편으로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이 있었다.

‘차일드 백작의 요청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백작의 요청은 총 두 가지.

한 가지는 몬스터 토벌로 오늘 성공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백작이 원하는 포로를 풀어 주고 무사히 데려오는 것이었다.

“공작님, 이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차일드 백작이 준 두 번째 요청을 진행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포로가 갇혀 있는 곳을 발견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갇혀 있는 이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수와 다수로 갈라져 날이 서 있는 상태였지만, 낯선 인원의 등장에 약속이라도 한 듯 긴장하며 경계했다.

포로를 지키던 이들은 아스킨의 등장만으로도 주춤하더니 물러났다.

몬스터가 범람하여 이들 또한 갇혀 있던 탓에 모두 굶주린 듯한 얼굴들이었다.

“제, 젠장! 도망쳐!”

“으윽! 대장님! 같이 가요!”

아스킨 또한 괜한 살생을 피하고자 도망가는 이들을 쫓지 않았다.

아스킨의 눈짓에 부관인 벤이 먼저 포로들이 잡혀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서 이들을 밖으로 빼냈다.

감옥은 총 3개였고, 튼튼한 창살이 있었다.

모든 감옥의 문이 열리고 포로들 모두 밖으로 빠져나와 눈물을 흘렸다.

아스킨은 백작의 요청을 완수하기 위해 감옥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차일드 백작이 말했던 포로는 찾았나?”

“그게…… 실은 공작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신 머리색을 가진 젊은 여성 포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계속 찾아보도록.”

감옥 3개의 문을 모두 열었건만, 발견되지 않았다니 이상했다.

그때였다. 아스킨이 감옥을 둘러보던 중 기사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

“공작님! 자물쇠 하나가 열리지 않습니다.”

“부수면 될 것 아닌가?”

옆에 있던 벤이 아스킨을 대신해 기사를 다그치듯 말했다.

기사는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얼른 대답했다.

“저, 그것이…… 아무래도 아만티움으로 만든 듯합니다. 저희 칼날이 모두 이가 나가 버렸습니다.”

아만티움, 강철보다 더 단단하고 강력한 금속이었다.

그러나 아주 희귀하고 드문 금속이기에 가격이 어마어마하건만, 그걸 고작 자물쇠로 만들었다고?

돈을 바닥에 버리는 짓이거나 아니면…….

‘그 안에 뭔가 있다는 거군.’

기사의 보고를 듣던 아스킨이 직접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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