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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137/194)

136화

과연 보고대로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비교적 작은 문이 아만티움으로 만든 쇠사슬과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아스킨은 직감적으로 이곳이 차일드 백작이 말했던 그 포로가 갇혀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요구 사항으로 말할 정도 인물이라 범상치 않은 포로라 생각했지만, 아만티움으로 만든 쇠사슬로 입구부터 봉쇄했다라…….’

“모두들 뒤로 물러나라.”

아만티움을 끊어내기 위해선 아스킨 또한 집중해야했다.

또한 좁은 공간에서 혹여라도 튀어나간 파편으로 부상자가 생기면 안 되니, 신중했다.

아스킨이 곧 자물쇠를 내리쳤고, 감옥 전체가 울릴 듯한 파열음이 생기며 자물쇠가 땅으로 떨어졌다.

‘……저게 검으로 잘릴 수 있는 거였다니.’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되면 아만티움도 깔끔하게 자를 수 있는 거였구나……!’

주변 기사들과 병사들이 감탄했다.

“공작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문을 열어라.”

정말 일반 포로가 아닌 듯 감옥 문의 두께도 엄청났다.

여러명의 병사가 힘을 합쳐 겨우 문을 열자, 아스킨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 모두들 주위를 경계하라.”

범상치 않은 포로인 만큼 감옥 안의 상황도 다를 수 있다.

이런 위험에 부하들을 노출 시키기엔 위험이 따른다는 판단이 들어 아스킨은 자신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아스킨의 뒤를 따라 들어온 마법사들은 어두운 공간을 환하게 비추는 마법등을 켰다.

이미 마법등이 없어도 웬만한 어둠 속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아스킨이었다.

곧 그는 안쪽에서 백작이 원하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쪽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기에 바로 알아보았다.

포로는 기이한 천으로 손발이 묶여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포로가 아스킨의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상착의와 외양이 일치하는군.’

아스킨은 제 판단이 옳았음을 느끼며 망설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포로를 묶어 두던 천이 풀어졌다.

뒤이어 마법등을 들고 쫓아온 기사들은 눈앞에 보이는 포로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앞에는 대단한 미인이 파르르 떨며 앉아 있었으니까.

‘엄청난 미인……!’

‘와, 이 정도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던 알츠베이트 공녀랑 비견될지도…….’

비록 표독스러운 악녀로 알려져 있으나 샤를리즈가 장미꽃같이 극도로 화려함을 가진 제국 최고의 미녀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지금 마법등을 받아 시야에 들어온 얼굴은 수국 같은 청초함을 가득 품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샤를리즈와는 대비되는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저를…… 구해 주시는 건가요?”

청초한 목소리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와, 목소리마저 예쁘구나!

이 현장에서 오직 아스킨만이 무뚝뚝하게 여성을 내려다보았다.

동요라고는 전혀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나?”

여성은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운 입술에서 나오는 음성이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요, 아주 오랫동안 다리를 펴지 못했더니…….”

여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얀 새처럼 여린 손, 누가 됐든 자신도 모르게 잡아 주고 싶은 손이었다.

아스킨은 그런 손을 무심하게 보다 고개를 돌렸다.

“벤, 부축해서 나오도록.”

모든 이들이 여성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얼어붙은 가운데, 아스킨 홀로 반응이 무심하고도 겨울철 매서운 바람만큼이나 차가웠다.

“이름이 뭐지?”

잠시 잊을 뻔했다는 듯 툭 흘러나온 아스킨의 말에 여성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플로리아입니다…….”

아스킨은 그걸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돌아섰다.

돌아서는 아스킨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사히 끝내고 돌아간다.’

그렇다는 것은 곧 샤를리즈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스킨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에 당혹스러웠다. 심장이 뛰다니.

샤를리즈를 향한 마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이처럼 자신의 변화를 깨달을 때마다 곤혹스러움이 함께였다.

싫은가 하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고 싶다니.’

아스킨은 제 얼굴을 감싼 채 멈춰 서고 말았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귀가 발긋 물들어 있었다.

여성은 그런 아스킨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벤의 부축을 받은 여성, 플로리아가 밖으로 나오자 따사로운 볕 아래 그녀의 미모가 더욱 빛이 났다.

동굴 안에 들어갔던 이들은 물론, 들어가지 않았던 토벌대 또한 플로리아의 미모에 감탄했다.

그러나 심각한 표정으로 나온 아스킨은 나와서도 여전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벤은 물론 근처에 있던 이안마저 아스킨을 응시했다.

“포로를 구출했으니, 돌아간다. 모두 채비하도록!”

“예!”

토벌대가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스킨의 표정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 * *

수도에 며칠 내내 비가 내리더니, 오랜만에 화창한 하늘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하늘을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빙긋 웃었다.

“아리아, 오랜만에 날씨가 좋네요. 정원에서 차 한 잔 어때요?”

“앗, 언니! 저도 방금 그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세상에, 생각을 했으면 바로 말을 해야지. 정말, 자꾸 망설일 거예요?”

“아니에요……!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에이, 거짓말.”

나는 아리아의 찹살떡 같은 볼을 꼬집었다. 물론 아프지 않게다.

우리 사랑스러운 눈 토끼 아프게 할 데가 어딨어?

“뎡마이에요!”

하필 빵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기에, 아리아의 발음이 무너졌다.

“저 거짓말하려던 거 아니에요, 진짜예요. 믿어 주세요!”

아리아는 볼까지 빨개진 채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사실 거짓말 했으면 뭐 어때. 하지만 편안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젓는 아리아를 보며 우리가 정말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몸을 바쳐 몸빵한 보람이 있군.’

그 망할 영감과 아리아를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다행스럽게도 요즘 그 영감은 뭘 하는 건지 저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수월했다.

‘사고라도 치려나……. 지금 시기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거겠지.’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리아의 말은 무조건 진실인 걸 알아요.”

“……언니 정말 짓궂어요.”

“그게 내 매력이지?”

나는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녀님, 나랑 차 한잔하러 갈까요?”

“좋아요!”

그렇게 따스한 햇살 아래 우리는 간만의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차를 마셨다.

‘지금 정도면 소식이 들릴 만도 한데…….’

이렇게 생각할 즈음, 허겁지겁 달려온 내 전담 하녀 수잔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곧 온화한 미소로 아리아를 응시했다.

“아리아, 좋은 소식이 있어요.”

“네? 어떤 소식이요……?”

“레무트 공작이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고 해요.”

흐음, 살아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니, 안심이야.

‘안심? 내가 왜 안심해? 안심까지 할 일이야?’

혼란을 겪는 사이 아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오후엔 제국에 도착한다고 하네요.”

“정말요? 세상에, 신이시여! 오빠한텐! 아무 일 없을까요? 다, 다친 곳은!”

“네. ……무사히 잘 돌아오고 있다고 하네요.”

평정을 가장한 채 대답하고는 난 가슴을 살짝 만져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안심이라니, 혼란이 머릿속을 헤집고 떨어진다.

“치, 오빠도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 한 번을 하지 않네요…….”

“음, 이번 토벌은 그 어떤 때보다 바빴을 거예요.”

아마, 자길 죽이려는 음모도 피해 가면서 성공해야 했을 테니까.

‘그러고보니 슬슬 이맘 때에 원작 여주가 휘말린 사건이 시작할 때 아닌가?’

원작이 시작하려면 멀었지만, 원작에서 원작 시작 전에 여주가 휘말린 사건에 대해서는 나온다. 이 사건으로 여주가 내 오빠, 남주 록시디언과 이어지는 계기가 되니까.

‘그게 아마 적국에 포로로 잡혀 가는 일이었던가…….’

그래, 맞아. 마침 얼마 전에 원작의 사건들을 쭉 정리했던지라 기억이 선명했다.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맞는 거겠죠! 그래도 언니 덕분에 소식을 빨리 듣게 되었네요.”

아리아는 아스킨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채로 끄덕였다.

안심한 건지 환한 미소가 만면에 피어났다.

‘하기야, 아무리 여기서 편하게 지냈다지만 오빠를 사지에 보내고 완전히 편할 수야 없겠지.’

아스킨이 아리아를 아끼듯 아리아도 아스킨을 아낀다.

물론 오빠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지만 말이다.

‘윤지훈이나 록시디언 그 인간이 아스킨 반만 됐어도 좋았겠네.’

나는 눈물방울이 맺힌 아리아의 얼굴에 손수건을 톡톡 가져다 댔다.

두드려 주고는 아리아의 손에 그대로 손수건을 건넸다.

“자, 그럼 이제 옷을 고르러 가 볼까요? 오랜만에 보는 오빠인데 예쁘게 입고 가야죠.”

“네, 네? 설마 옷을 또 사러 가는…….”

“아니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예쁜 옷 입고 헤어 살롱에 가야죠? 그래야 그 무심한 인간, 아니 오빠를 놀래켜 주죠.”

남의 집 아이는 빨리 큰다. 이 말을 들어 보기는 했는데, 아리아에게도 해당되는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10대 중후반 같던 아리아는 우리 집에서 눈에 띄게 생기를 되찾은 동시에 키도 살짝 컸다.

그래 봐야 눈 토끼처럼 예쁘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건 여전하지만.

아리아는 언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냐는 듯 눈물을 훔치고선 이내 강아지처럼 신이 난 발걸음으로 내 뒤를 쫓아왔다.

‘흐음…… 그 인간이 무사히 돌아온단 말이지. 그럼 이안 그놈도 함께 돌아오나?’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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