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같은 시각.
쾅!
날아간 물건이 그대로 벽에 부딪쳐 부서졌다.
산산조각 난 물건을 보며 알츠베이트 공작의 비서관은 숨을 삼켰다.
여기서는 숨죽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분노하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분노를 뒤집어쓸지도 모르니까.
“뭐? 레무트 공작이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고?”
“예, 공작님.”
“심각한 부상도 없이, 중독 증세도 없이! 아주 멀쩡히 이 수도로 돌아오고 있다?”
“……그렇다고 합니다.”
이마를 문지르던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내 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웃겨서 웃은 것이 아니다. 노회한 공작의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 토벌에서 반드시 죽어야 할 아스킨 레무트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차일드 백작.
“……백작,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아주 재밌게 되었어.”
백작이 배신을 한 것이다.
물론 살해 시도가 실패하고 레무트 공작이 생존한 것일지도 모르나, 그런 소식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배신당했다. 감히 이 알츠베이트를 배신하다니.
“차일드 가문에 대한 감시를 더욱 늘리도록 하여라.”
토벌에 얼마나 투자했던가.
새로운 ‘로드’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눈은 이제 증오로 변질되고 있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미소를 띤 낯으로 책상에 놓여 있는 서류 더미를 손으로 짓이겼다.
“알츠베이트를 우습게 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줄 터이니.”
* * *
수도에 막 들어선 토벌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와아아아!”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 앞에서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는 자부심. 끝으로 대단한 환영 인파가 보내는 엄청난 함성이 그간의 고생을 싹 씻어 주는 듯하였다.
한편 이처럼 토벌대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이들이 환영 인파 대신에 포로가 탄 마차를 흘긋거리기 바빴다.
포로였다 구출된 여성 플로리아.
‘저 여성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치 제국 제일의 미인이었던 알츠베이트 공녀, 샤를리즈에 견줄 듯한 미인이었다.
대단한 미인과 함께 돌아가니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토벌대는 기나긴 길을 지나 마침내 출발했던 곳, 차일드 백작저에 도착했다.
토벌대가 성공했다는 소식에 차일드 백작은 직접 문 앞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오, 오셨습니까!”
사실 차일드 백작은 아스킨 레무트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알츠베이트 공작과의 계약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큰일이로구나.’
대체 왜 함께 보낸 그의 은밀한 자객 파이란은 소식이 없었단 말인가?
토벌 중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래도 이안이 무사히 돌아온 게 어딘가.’
토벌이란 위험한 자리였다.
게다가 총사령관을 죽이라 지시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아들이 역경을 잘 헤쳐 가리란 믿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단 소식에 안도하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었다.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차일드 백작은 이번만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실로 대단한 자가 아니던가. 가치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봤다만은 아무래도 그가 값을 잘못 매긴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 병력이 부족할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차일드 백작은 이번 토벌이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번 토벌이 실패하면 알츠베이트 공작과의 계약을 지키기 쉬워졌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몬스터들을 대부분 없앤 뒤 일 테니, 또 한 번 2차 토벌을 시도해 공을 차일드에서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남자가 기어이 해내고 만 것이다.
차일드 백작이 숨을 꿀꺽 삼켰다.
“공작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약속을 지켰을 뿐이다.”
아스킨은 지나치게 밝은 얼굴을 한 차일드 백작을 향해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오, 이안 너도 함께 들어오거라.”
차일드 백작은 아스킨을 집무실로 안내하며, 제 아들인 이안의 안위를 눈으로 꼼꼼히 살폈다.
‘흐음? 이안이 뭔가…… 바뀐 듯한 느낌이 드는구나.’
어쩐 일인지 아들의 눈빛에서 무언가 기묘한 것을 본 기분이었다.
장사꾼의 감이 무언가 이상한 점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에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속으로 축하하며 눈앞의 귀한 손님을 모실 때였다.
토벌은 대성공했지만, 어쩐 일인지 잠시 뒤 차일드 백작의 집무실은 마치 토벌에 실패라도 한 듯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그도 그럴 게 작위가 가장 높은 아스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돈을 빌려준 입장이니 차일드 백작이 작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붙여볼 수 있었겠지만 토벌이 대성공을 거둔 이상 상황이 달라졌다.
새로운 로드의 생성.
실로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가치를 가진 일을 차일드 가문에 해 준 것이다.
사실상 아스킨은 차일드 백작가에 돈을 갚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이를 잘 아는 차일드 백작은 숨을 삼켰다.
“……역시, 공작님께서는 성공하실 줄 알았습니다.”
차일드 백작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지만 아스킨은 대답이 없었다.
이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끝에 아스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약은 이제 다 끝난 것으로 알겠다.”
“당연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스킨은 진한 피로감을 느꼈다.
하기야, 토벌 내내 깊이 잠들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스킨은 책임의 무게만큼 잠을 줄였다.
“서로 계약한 대로 이행했을 뿐이니 감사 인사는 넣어 두지.”
차일드 백작은 금빛 봉투에 넣어 둔 계약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아스킨은 그 봉투를 지그시 응시했다.
계약서.
빚을 진 그 순간부터 턱밑까지 차오른 물에서 생활하는 듯했다.
몸은 항시 무거웠고 언제 익사할지 몰라 신경은 늘 곤두서 있었다.
기실 그가 샤를리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이런 벼랑 끝에 몰린 기분으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자신을 짓눌렀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빚은 없는 걸로 알겠다.”
“예, 물론입니다.”
그사이 노크와 함께 아스킨의 부관인 벤이 정중하게 들어왔다.
그러고는 아스킨에게 무언가를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대들 몫의 부산물은 정확하게 계산하여 옮겨 두었다고 하는군.”
“아, 네! 감사합니다. 공작님!”
가만히 경청하고 있던 벤이 이어서 말했다.
“공작님, 이외 부산물은 저희 마차에 실어 두었습니다. 공작저로 모두 이동시켜 놓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번 토벌에 참여한 인원에게 똑같이 나눌 것이니.”
“예? 전부 똑같이 나누신다고요?”
벤이 화들짝 놀랐다. 아스킨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다 같이 한배를 탔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아스킨은 시선을 들어, 백작 뒤에 고요하게 서 있는 이안에게로 눈을 옮겼다.
두 남자의 시선이 찰나 간 교차한 뒤 떨어졌다.
이안은 자신이 보았던 아스킨이라면 이리하리라 짐작했기에 놀라지 않았다.
곧이어 이안이 벤에게 눈짓했고, 잠시 뒤 벤이 포로였던 플로리아를 데려왔다.
“백작, 그대가 요청한 또 다른 일 또한 끝냈으니, 완벽하게 정리하도록 하지.”
“오오, 예, 예. 물론이지요.”
백작은 플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시선을 끄는 여성이었지만 백작의 눈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모든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만 돌아가겠다.”
“아! 공작님, 저녁에 연회를 준비해 두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꼭 대접하고 싶습니다.”
아스킨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고생들 했으니, 인사는 이 정도 하도록 하겠네.”
아스킨은 짧은 인사와 함께 포로를 남기고 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아스킨은 걷는 동안, 한 사람을 생각했다.
눈을 감는 매 순간마다 떠올렸던 얼굴이었다.
지금 순간에도 벚꽃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스킨은 걸으며 얼굴을 짚었다.
“나도 참…….”
이게 무슨 일인지. 한마디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보고 싶다.
‘중증이로군.’
몇 개월 전의 그라면 전혀 못 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선을 넘었기 때문일까, 정말로 보고 싶었다.
샤를리즈가.
* * *
차일드 백작은 아스킨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떠난 후 집무실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안은 흘끗, 포로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저 여인을 대체 왜 데려오라 한 거지?’
이는 이안도 뜻을 몰랐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그래. 내 아들. 일단 앉자꾸나!”
이안은 섣불리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그가 꺼낼 이야기 중에는 기밀에 해당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는 플로리아가 신경 쓰여 눈짓했지만, 어쩐 일인지 차일드 백작과 플로리아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는 듯하였다.
“자리를 비켜 주겠나?”
“예, 이안 도련님.”
플로리아의 말에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치 자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호칭이었다.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당혹을 감추었으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나가 보겠습니다, 백작님.”
“오, 그래. 그러시오.”
플로리아는 분명 처음 보았을 백작에게 정확한 예를 갖춘 뒤, 익숙한 곳에 온 듯 백작의 부관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안은 떠나는 플로리아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쳐다보았다.
‘도대체 뭐지?’
그가 모르는 일이 얼마나 더 있었다는 건가.
이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