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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139/194)

138화

“시선을 거두거라. 대륙에서 내로라할 미인이라도 네게는 독이 든 사과나 마찬가지니.”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이안은 본래 하려던 말 대신 이렇게 묻고 말았다.

백작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내 미소가 스쳤다.

“다 널 위한 일이니라. 또한 우리 가문을 위한 일이다. 넌 차기 백작이 될 사람 아니더냐.”

“저는 제힘으로…….”

“닥치거라. 방금 나간 아스킨 레무트를 보지 못했더냐?”

“…….”

“아무리 잘나도 사냥개나 다름없던 저 공작처럼 둘 생각은 없다.”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공작님은,”

“넌 가만히 있거라.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겁먹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서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벽을 느껴서다. 그가 협상 자리에서 종종 마주하곤 하는 상황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우리 차일드가 박쥐처럼 이리저리 저울질만 하고 살 수 있겠느냐? 난 네게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권력을 물려줄 것이니라.”

“전 그런 것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충분히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

“못난 놈. 그런 놈이 알츠베이트 공녀 하나 손안에 쥐지 못했더냐?”

“…….”

“공녀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놈이.”

이안의 표정이 고요해졌다.

“가서 연회에 갈 준비나 하거라. 난 지금쯤 뿔났을 알츠베이트 공작을 살살 달랠 터이니, 넌 알츠베이트 공녀의 마음부터 단단히 사로잡거라.”

몇 개월 전의 이안이라면 그저 흥미 정도만 가진 채 망설임 없이 끄덕였을 말이었다.

이안은 가문을 이 자리까지 끌어 올린 부친을 존경했다.

한때는 부친의 방식이 지극히 옳은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으로 여겼던 일이었다.

한데 이제는 부친의 목적 지향적인 방식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발걸음을 그대로 멈춘 채로 아버지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버지 당신께서 제게 직접 말씀하셨죠.’

사람은 높이 올라갈수록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어느새 아버지께서 그런 모습이 되셨군요.

적은 바로 옆에 있을지 모르니 늘 경계하라 말씀해 주시던 분께서.

이안은 이내 부친을 향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는 동시에 누군가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두 남자가 동시에 샤를리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스킨의 부관 벤은 어쩐지 부산스럽기 짝이 없는 아스킨의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토벌은 끝났다.

게다가 자신과 가신들의 평생 염원이나 다름없었던 빚 또한 토벌 완수로 인해 모두 사라졌다.

이제 걱정할 것이 전혀 없건만, 자신의 주군은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냥 근심이 아니라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진 듯 무거운 표정이었다.

“벤, 우리 몫의 부산물을 가지고 먼저 돌아가라. 가서 기사들과 병사들 하나하나 부족함 없이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이미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저택으로 가려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를 몰랐던 벤은 아스킨이 말을 향하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다.

“예, 한데 공작님……. 공작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스킨은 벤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나는 알츠베이트 저택에 들렀다 가겠다.”

“예에?”

벤의 눈이 화등짝만 하게 커졌다.

그러나 이도 잠시, 아주 오랫동안 아스킨을 모셔 온 부관답게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내가 전쟁에서 눈앞으로 화살이 스쳐 가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미 파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 약혼자를 찾아간다는 주군의 모습, 게다가 저 표정은……. 아스킨보다 나이가 많은 벤의 입장에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은 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뵈러 가시는 거라면, 전달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방금 막 아리아 아가씨와 함께 알츠베이트 저택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리아가?”

벤의 보고를 듣는 순간 아스킨의 얼굴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샤를리즈가 아리아를 데려가 외롭지 않게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품었던 의문보다 더욱 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은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인가?

‘내가 정말…… 어디까지 그녀를 잘못 보았던 거지?’

“그래서 공작님, 현재 아리아 아가씨는 알츠베이트 공녀님과…… 어, 공작님? 공작님!”

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스킨은 거친 몸짓으로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당장 다음 날 전투에 나가야 하는 출정식에도 서둘러 본 적이 없는 아스킨에게서 볼 수 없었던 다급함이었다.

이전까지 샤를리즈가 저질렀던 모든 악행을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 아마 앞으로도 그의 오랫동안 남아 그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여행을 기점으로 변했다.

그건 인정해야 했으므로, 그의 잘못이 있다면 오직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내가 변한 모습을 보여 줄 기회라도 주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어?”

그리하여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그렇다면 놓쳐 버린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가.

이미 일어난 일은 제아무리 대륙의 제일 검사라 하여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니 아스킨은 다른 식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돌아가는 법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직선과도 같은 옳고도 곧은 길만 걸었다.

그렇기에 샤를리즈에게 다가가는 방식 또한 곧기만 했다.

지금 달려가는 다급한 이 길처럼.

아스킨은 그렇게 고삐를 꽉 쥐며 알츠베이트로 향했다.

* * *

“언니, 저 이제 옷 그만 갈아입으면 안 될까요?”

“무슨 소리예요? 이거 하나만 더 입어 봐요. 응?”

샤를리즈는 지금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아리아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아리아는 물론 샤를리즈가 기뻐하니 자신도 덩달아 기뻤지만 이렇게 많이 입어도 되는가 싶은 생각을 조금 했다.

문제는 조금 했다가도 환하게 웃는 샤를리즈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도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래, 언니가 좋아하니까 다 괜찮은 거 아닐까!

응, 그래. 맞아.

“언니,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왜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아니라…… 오빠가 돌아오는데 왜 제가 옷을 예쁘게 입어야 하죠? 상황을 따지자면 오히려 언니가…… 아, 죄송해요.”

자연스럽게 샤를리즈와 아스킨의 관계를 입에 올리려던 아리아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어쩜 이걸 잊는단 말이야!

너무너무 안타깝고 아쉽게도 두 사람은 파혼했다.

정식 서류는 아직이라곤 하나 샤를리즈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곧이었다.

이게 다 눈치라곤 약에 쓸 데도 없는 제 오빠 때문이 분명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아리아의 팔이 굽는 방향은 여러 가지였다.

샤를리즈 전용 굽는 팔도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아리아가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샤를리즈가 빙긋 웃었다.

“아리아가 예쁘게 입어야 하는 건, 오빠가 없어도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런 걸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에요.”

“‘오빠가 없어도 잘 지내고 있다’요……?”

“네. 어딜 가나 오빠 놈들은 다들 저만 잘난 줄 알기 때문에,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요. 봐요, 아스킨 그 인간도 아리아가 이렇게 걱정하는데 제대로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렸잖아요?”

“…….”

잠시 생각하던 아리아가 무구하게 끄덕였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그러더니 살풋 미소 지었다. 은초롱꽃처럼 청아하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푸흡, 역시 언니는 삶의 지혜가 풍부하신 것 같아요.”

“삶의 지혜? 뭐……, 당한 게 많았단 게 맞겠죠?”

“헉, 언니가요?”

“왜요, 나는 안 당했을 것 같아요?”

악녀 샤를리즈. 그녀도 처음부터 제멋대로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현재 윤지후가 볼 수 있는 ‘샤를리즈’의 기억은 한정되어 있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가끔 악녀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놀랍게도 어릴 때는 조금 소심한 편이었단 말이지.’

‘샤를리즈’를 변호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악행을 감싸 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삐뚤어진 원인 정도는 알 수 있는 기억들이었다.

‘뭐든 부모가 문제야. 문제. 아, 이 경우엔 외할아버지 문제인가? 그 영감탱.’

원흉은 알츠베이트였다.

“언니는 음, 태어날 때부터 막 백조처럼 우아하고! 당당하고! 이러셨을 것 같은걸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나도 태어날 땐 새빨간 천둥벌거숭이였겠죠.”

“끙, 그렇겠죠? 하지만 언니는 어릴 때부터 새하얬을 것 같은데.”

“흐응, 이렇게 아리아의 눈 같은 피부를 자랑하는 건가요?”

“네? 앗, 아니에요!”

아리아와 샤를리즈가 웃고 떠드는 사이 두 사람은 문 앞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하기야 일반인이 제국 최고 검사의 기척을 느낀다는 일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아스킨이 작정하고 기척까지 숨겼을 때엔 더욱이 말이다.

아스킨은 샤를리즈의 방문을 앞에 두고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긴장되는 것인지.

이 문을 열었을 때 살아 돌아온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본다면 그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아리아의 웃음이…….’

거기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아리아의 웃음은 레무트 성에서도 많이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였기에 아스킨을 더 망설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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