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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140/194)

139화

그 후로도 아스킨은 문 앞에서 쉽사리 들어가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를 반복했다.

결국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채로 문고리를 잡았다.

노크 소리와 더불어 두 여성의 목소리가 멈추더니, 이내 들어오란 말이 함께 이어졌다.

달칵.

문이 열리고 아스킨이 들어가는 동시에 샤를리즈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오빠!”

아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리아는 조금 전까지 샤를리즈와 오빠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던 것도 잊고 눈밭을 뛰는 토끼처럼 뛰어갔다.

아스킨은 아리아를 마주 안아 주며, 여동생의 가는 몸에 살이 붙었음을 알게 되었다.

레무트 영주성에서 시중인들과 자신이 극도의 노력을 들이고도 쉽사리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서 와! 그치만 너무 했어, 제대로 말도 해 주지 않고선……!”

“미안하다. 잘 지냈어?”

살이 붙어 더욱 생기가 도는 뺨에 심지어 발그레한 건강한 홍조마저 들었다.

아스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샤를리즈의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든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아닌 창문 쪽을 보게 되었다.

“내가 돌아왔다.”

이 무뚝뚝한 목소리라니, 대체 무얼 하는 것인가.

평생 몸에 밴 것을 하루아침에 고치긴 어렵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인사를…… 아스킨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샤를리즈를 향했을 때였다.

아스킨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 왔니? 그런데 무슨 인사가 그러니?”

눈앞에서 샤를리즈가 밝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스킨이 당황한 동시에 의도치 않던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보고 싶어서.”

“뭐?”

아스킨의 얼굴로 더욱 큰 당황이 떠올랐다.

샤를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인지 저 남자의 새하얀 뺨이 단풍 물들 듯 발긋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눈토끼 집안이라 그런가, 저 남매는 유달리 하얬고 동시에 뺨의 저런 변화가 더욱 잘 보였다.

“……아, 아리아가 보고 싶었단 이야기다.”

샤를리즈는 눈썹을 쑥 치켜올렸다.

동생이 보고 싶었단 말을 저리 수줍게 할 이야기인가?

‘순간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누가 당신 여동생 아끼는 거 모른대? 이렇게 토벌 끝나자마자 달려온 것만 봐도 알겠네.”

“그게 아니라…….”

“뭘 또 변명을 하려고 해. 너도 참 대단하다. 아리아와 인사나 계속해.”

샤를리즈는 한 걸음 물러서서, 아리아와 아스킨이 서로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비록 아스킨이 서운하게 만든 마음에 아리아가 가끔 서러움을 토로했다지만, 그간 말 못할 걱정이 얼마나 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샤를리즈가 이처럼 걱정하는 아리아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오빠에 대한 애틋함은 아니었다.

물론 애틋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커다란 눈으로 아스킨을 한번, 샤를리즈를 한번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아리아의 토끼 같은 눈이 깜빡깜빡하다가, 이내 초롱초롱한 빛이 돌았다. 설마?

“오빠, 오빠!”

아리아가 제 오빠의 옷깃을 사정없이 잡아당기자, 아스킨은 어쩐 일인지 아리아의 투정 같은 몸짓을 받아 주면서도 샤를리즈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를 봐? 쟤가?’

샤를리즈는 그런 아스킨의 모습이 어색해 결국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무슨 연인이 재회한 것도 아닌데, 남매끼리 있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눈짓을 저리도 주는 거지?’

아마 그간 샤를리즈가 아리아를 돌봐 준 것을 몰랐을지도 모르고, 이제야 막 알아서 당황했던 걸지도 모른다. 샤를리즈는 이리 추측했다.

어쨌거나 방을 나선 샤를리즈는 한가로운 오후 정원을 바라보며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벤치에 앉아 정원을 보고 있으려니, 레무트 공작가에서 노숙하던 때가 떠올랐다.

‘허어, 거기서 노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내 팔자도 참.’

샤를리즈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그 시간을 놀고먹는 것도 좋지만 괘씸한 알츠베이트 공작과 집안에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되갚아 주고 나서 알츠베이트 가문도 폭상 망하고, 영감탱에게도 한 방 거하게 먹인 그 뒤에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뭐,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샤를리즈가 턱을 괴며 느릿하게 하품했다.

“하암,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피곤하네…….”

아스킨이 온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아리아를 열심히 꾸미느라 바빴다.

그 여파가 이제 온 것인지 조금 노곤했다.

그렇기에 샤를리즈는 조심스럽게 자신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간 잘 지냈나?”

고개를 들어 보니 아스킨이었다.

왜 아리아와 눈물겨운 재회를 나누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면 벌써 재회가 끝났나?

아스킨은 제복 차림이었다.

아마도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일만 끝내고 이곳으로 달려온 듯한 모양새였다.

‘이렇게 급히 뛰어올 거면서 왜 재회는 이렇게 짧게 끝내?’

아, 아니면 샤를리즈 자신이 사라지면 제대로 회포를 풀려는 걸지도 모른다.

아스킨이 돌아왔으니, 이제 자신은 이 남자에게 불청객이 되지 않겠는가?

“못 지낼 이유가 있니? 아무튼 너야말로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네.”

샤를리즈가 이렇게 말하다가 말을 나른하게 흐리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가벼이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다.”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라, 그 말 진심인가?”

샤를리즈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건 지금 또 시비를 거는 건가?

진지하게 굳은 표정의 아스킨을 바라보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아가, 무척이나 너를 걱정했어. 애가 밤잠도 못 이룰 만큼 걱정했는데, 이제 해결됐으니 고맙지. 안 그래?”

“……그렇군. 아리아가.”

“그래.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냔 말이 진심이냐니, 그럼 진심이지.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죽길 바라는 사람인 줄 알겠다?”

“그런 게 아니다.”

아스킨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샤를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눈앞의 아스킨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황한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

마치 처음 부임한 기사라도 된 듯 어색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처음 보는 모습에 샤를리즈는 덩달아 얼떨떨해졌다.

“그런 게 아니라, 너와 약속을 지킨 나를 생각해 주는 네 모습이 너무도…….”

“너무도?”

아스킨이 머뭇거리는 동시에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공작님!”

누군가 아스킨을 부르며 다급하게 뛰어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샤를리즈에게도 익숙한 사람인 아스킨의 부관 벤이었다.

아스킨의 눈썹이 살짝 추켜 올라갔다.

“공작님,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얼굴에 홍조를 띤 것을 발견하고 미처 하지 못한 뒷말이 더욱 궁금해졌다.

“……아니다. 무슨 일이지?”

벤은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이었다. 마치 하기 어려운 말을 해야하는 사람처럼.

“저어, 그것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공작님.”

벤은 아스킨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샤를리즈는 그 말을 듣진 못했지만 아스킨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는지는 것을 보았다.

벤이 말한 것은 간단했다.

오늘 연회에서 차일드 백작이 쓸데없는 말을 할지도 모른단 첩보가 들어왔다는 것.

“그렇다고는 하나 날 강제할 순 없을텐데.”

“예, 물론입니다. 다만, 공을…….”

“공을 빼앗거나 축소하고 허위 사실을 말할지도 모른다는 거군.”

차일드 백작과 채무 관계는 모두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편이 된 건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공작님은 그렇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으시지만.’

벤은 싫었다. 제 주군이 그토록 노력한 결과와 공을 감히 누가 빼앗는단 말인가.

아스킨은 잠시 진지한 낯으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 참석하겠다.”

벤의 얼굴로 화색이 돌았다.

“앗 그렇다면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그, 당장이 아니면 늦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가……. 바로 나갈 테니 준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벤이 돌아간 뒤, 샤를리즈와 아스킨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서로 끝맺지 못한 말에 대해 조심스러웠다.

‘뭐야, 이 분위기.’

샤를리즈는 황당했다.

벤이 한차례 억지로 끊은 탓에 말을 꺼내기도 그렇다고 침묵하기도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평소처럼 까칠하게 굴려 해도 어쩐 일인지 조금 전 본 모습들이 스쳐 가는 통에 말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 앞만 바라보다 동시에 입을 떼었다.

“너, 할 말…….”

“조금 전엔…….”

“먼저 말해.”

“아니다, 네가 먼저 이야기해라.”

“너 할 말 있으면 하라고. 대체 왜 어울리지 않게 눈치 보는 건데? 계속 멈칫하고 있잖아.”

샤를리즈에게서 평소와 같은 무심한 듯 삐뚜름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 혹시…… 연회에 같이 참석해 주겠나?”

샤를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이 시점의 연회라면 분명 토벌 성공에 대한 축하 연회일 것이다.

토벌의 주체가 차일드 가문이었으니, 그곳에서 여는 연회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방금 벤도 연회에 대해서 운운했으니 말이다.

“내가 토벌에 성공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거길 가니?”

생경했다.

그에게 연회 한번 같이 가자고 조르던 때가 꽤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이제는 이 남자가 내게 연회를 가자고 하네?

왜?

“다른 사람의 축하보다, 네가 해 주는 축하를 듣고 싶다.”

왜?

샤를리즈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때론 시선이 말보다 더욱 큰 의미를 전할 때가 있었다.

아스킨 또한 샤를리즈의 두 눈 가득 떠오른 의문을 느끼고 잠시 멈칫했다.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내가 해 주는 축하를 듣고 싶니?”

“그건…….”

“아스킨 레무트.”

샤를리즈가 빙긋 웃었다.

“나는 너처럼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거 안 좋아해.”

아스킨이 멈칫하더니 시선을 슬쩍 내렸다.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모습에 샤를리즈는 또 한 번 황당함을 느꼈다.

‘시무룩? 시무루루욱? 쟤가?’

“그리고…….”

“그리고 뭐? 말 망설이지 말고 그냥 해. 이번만은 욕이라도 눈 딱 감고 들어 줄 테니까.”

목숨을 걸고 사지를 다녀온 사람인데 아리아를 봐서 한 번은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아무래도 토벌 도중에 머리를 다친 게 아닌가 싶은 장면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있으니.

‘판 깔아 줘도 안 해?’

샤를리즈의 시선이 좀 더 날카로워지려는 찰나, 아스킨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네 앞에서 모두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한번 봐주겠다 한 것은 잊고 뭐라 하려는 찰나, 샤를리즈의 입술은 그대로 꾹 닫혔다.

대신 조금 놀란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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