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아스킨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응어리진 표정이었다.
간절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면서도 여러 복합적인 표정이 얽혀 있었다.
샤를리즈는 자연스럽게 지난날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은 항상 압박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나는 견디기 위해서 어떻게든 벽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항상 올바르고 당당하고 차갑던 아스킨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주변 상황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픈 여동생, 이미 죽어 버린 부모.
몰락한 귀족, 빼어난 검 실력만 아니었다면 진작 망했을 가문, 허울뿐인 공작이란 이름.
빚쟁이 공작.
세간에서 말하는 수근거림과 악질적인 소문을 그라고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꼬인 파리 중 하나가 바로 ‘샤를리즈’였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진정으로 당당해질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빤히 보았다.
사실 지금이라고 딱히 용서한 것도 아무렇지 않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만큼은 아주 잠시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을 뿐.
굳이 따지자면 제 편 하나 없이 홀로 버텨야 했던 빙의자로서 지금 아스킨이 걸어온 길과 제 길이 겹친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리아를 생각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한 번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샤를리즈는 크게 숨을 내쉰 후 대답을 이었다.
“그렇게 보여 주고 싶다면, 같이 가 줄게.”
연회장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있을까, 없을까?
아마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자리에 자신이 아스킨과 함께 들어간다면?
샤를리즈의 얼굴로 미소가 스쳤다.
“대신 조건이 있어.”
샤를리즈가 손을 내밀어 툭, 아스킨의 어깨 쪽을 살짝 찔렀다.
“넌 무슨 무드가 이리도 없니? 이게 파트너 신청이라니, 나 알츠베이트 공녀로서의 면이 서질 않지.”
“…….”
“제대로 신청해 봐. 파트너 신청.”
지난날을 잊을 수는 없다. 이 남자와 한번 가까워져 보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게다가 죄다 실패했지. 거절당했지. 연회에서도 고까운 기억들 뿐이었다.
“나, 너 때문에 연회엔 딱히 좋지 않은 추억이 생겨서 가기 싫을 지경이 됐거든?”
“……사과하면 되겠나?”
“그러는 넌 내 말 한마디면 모든 게 용서가 되든?”
“…….”
“봐, 아니지? 그러니까 성의를 보여 봐.”
샤를리즈의 눈이 배시시 휘어졌다.
아스킨은 숨을 삼켰다. 샤를리즈야 별생각 없이 다가온 듯했지만 그녀에게선 은은한, 아니. 강한 장미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스킨은 숨을 살짝 참았다.
뭉근하게 퍼져 나오는 이 향기를 어떡하면 좋을지 자신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스킨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샤를리즈의 눈이 뾰족해졌다.
뭐야, 자기가 먼저 함께 가 달라고 해 놓고서 또 차갑게 고개를 돌리는 건 뭐란 말인가?
‘왜, 말해 놓고 후회라도 되나 보지?’
빈정이 상한 샤를리즈가 손을 뻗어 아스킨의 턱을 잡았다.
그렇게 휙 잡아채는 순간 탁, 소리와 함께 아릿한 고통을 느꼈다.
아스킨은 샤를리즈의 손을 쳐내고서 아찔함을 느꼈다.
“허, 네가 먼저 청해 놓고서 쳐다보지도 않는 건 대체 무슨 예법이니? 그래 놓고서 닿기도 싫다? 아주 고상하기 짝이 없는 신사구나.”
“잠깐…….”
“됐어, 꼴보기 싫은 사람이랑 무슨 파트너니? 아주 잘 알았어.”
“아니, 그게 아니야!”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스킨은 제 얼굴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훅 다가오는 향기에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쳐내 버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쳐낸 건 어쩔 수 없는 검사의 본능이었다.
아스킨은 샤를리즈가 자신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손을 내쳐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샤를리즈는 손을 붙잡힌 그대로 눈을 가늘게 좁히며 아스킨을 노려보았다.
“왜, 이젠 때리기라도 하려고?”
“아니다!”
“그래, 고귀하신 공작님께서 레이디를 때리진 않겠지. 그래서 뭐?”
“……화내지 않는 건가?”
“당장 걷어 차 줘?”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네 화가 풀린다면…….”
‘뭐지? 역시 미친 건가?’
샤를리즈는 역시 이 남자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엔 눈길이 얽히는 것조차 싫다는 듯 자신을 피해 다니던 인간 아니었던가.
커다란 손은 자신의 가냘픈 손목을 잡고도 한참이나 남았다.
“당황해서 손을 쳐내고 말았다, 사과부터 하지. 미안하다.”
“허어, 그러게. 왜 손을 대냐고 화는 내지 않네?”
“……으니까.”
“뭐?”
“싫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아스킨은 제 손안에서 가는 손목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샤를리즈의 붉은 눈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불신이 스쳤다.
“역시…… 너, 토벌에서 머리를 다친 거지? 그렇지 않으면 그 몸 안에 다른 영혼이라도 들어갔니?”
나처럼? 샤를리즈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다치지 않았다.”
아스킨은 천천히 샤를리즈의 손을 놓아주었다.
조심스러운 행동에 샤를리즈는 생경해졌다. 정말 머리를 다친 것도 나처럼 다른 영혼이 들어간 것도 아니라고?
아스킨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높이가 다른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공녀.”
아스킨이 손을 내밀었다.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아스킨에게 이안에게서 보이던 마치 교본에서 나올 법한 완벽한 예법은 없었다.
있는 거라곤 지독히도 직선적이고 우묵한 절도만이 느껴졌다.
공녀란 호칭 앞으로 흔히 붙는 ‘친애한다’는 말도 ‘아름답다’는 말도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샤를리즈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네가 신청하는 상황인데, 적어도 예의상이라도 예쁘다든가, 아름답다든가,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거나. 수식어 하나쯤은 붙여 줘야 내가 혹하지 않겠니?”
“수식어……?”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의 아스킨이 고개를 느릿하게 갸웃했다.
“그런 것이 왜 필요하지?”
“허?”
“당연한 사실 아닌가.”
“뭐?”
“네가 아름답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라 했다.”
샤를리즈가 눈을 깜빡였다. 이내 참지 못하고 푸하 웃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이안과는 다른 의미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없는 미소를 넘기며 아스킨이 내민 손 위에 손을 올리는 대신 그대로 손을 뻗었다.
샤를리즈가 향한 곳은 아스킨의 턱이었다.
느릿하게 다가갔기 때문일까, 아스킨은 더는 물러나지도 손을 쳐내지도 않았다.
대신 긴장한 듯 굳은 어깨가 보였다.
“너, 나한테 비는 거잖아, 같이 가 달라고.”
“……공녀.”
“그럼 간절함을 보여야지, 애타게 바라는 사람 쪽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아스킨 이 남자는 지금 제 얼굴을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샤를리즈는 아스킨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그 손을 아스킨의 손 위에 올렸다.
“생각해 봐, 내가 좋아할 말을. 이건 선불로 줄게.”
커다란 손 위에 가냘픈 손 하나.
아스킨은 제 손을 멍하니 보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았다.”
* * *
다각다각.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이안은 이 소리를 들으며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날이 무척이나 좋지 않은가.”
반대편에서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잠시 고민 끝에 이내 평소와 같은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예, 그렇군요. 각하.”
눈앞에는 알츠베이트의 주인, 알츠베이트 공작이 있었다.
그것도 웃고 있지만 결단코 평온한 미소라고 할 수 없는 얼굴을 한 채로.
이안은 몇십 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부친의 방에서 나와 그대로 말을 타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저를 부르는 이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샤를리즈가 있는 저택에 도착했을 터였다.
그리고 샤를리즈에게 당당히 약속을 지켰노라고 말했을 텐데…….
“차일드 경 아닌가?”
마차에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알츠베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토벌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었네.”
기어이 길에서 그를 막고 불러낸 건 이것 때문인 듯했다.
“축하하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피곤할 텐데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 이곳은 내 저택 근처인데 말이지.”
“예, 공녀님을 뵈러 왔습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을 휘었다.
“젊음이 좋긴 좋구먼. 그럼 이렇게 함세. 나와 같이 차일드 저택으로 가지.”
“……네?”
“걱정 말게. 샤를리즈 그 아이는, 내가 불러 줄 테니.”
이안은 다른 날과 다르게 정중하게 거절하려 했지만, 알츠베이트 공작 또한 다른 날과 달랐다.
“가는 동안 말동무가 없어 쓸쓸하던 차인데, 오히려 잘됐지 않나?”
이안은 결국 집요하게 달라붙는 공작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