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샤를리즈를 볼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좋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역시 자신이 직접 찾아가고 싶었다.
한편으로 이안은 알츠베이트 공작에게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안은 알츠베이트의 의중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 마차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샤를리즈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하나라도 더 얹어주고 싶었으니까.
‘나 참, 몇 달 전이라면 전혀 하지 않을 생각과 행동이군.’
샤를리즈는 알츠베이트 공작을, 제 외조부를 끔찍이도 싫어했고, 나아가 본인의 가문을 무너트리고 싶어 했다.
이것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그가 굳이 이 순간까지 예의를 다해 이 마차에 올라서진 않았을 것이다.
현재 샤를리즈의 생각으로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 정도였지만 이런 순간에서 알츠베이트 공작의 호의를 완전히 무시할 만큼 바보가 된 건 아니었다.
‘분명 레무트 공작이 죽지 않은 것 때문에 뿔이 나 있겠지.’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알츠베이트 공작은 지나치게 자세하리만큼 토벌 내용을 캐물었다.
이안은 내키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의 반응을 관찰하며 평소처럼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최대한 실감나게 전하였다.
“그래, 이제 자네 가문이 온 제국에 이름을 떨치겠어. 껄껄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공작님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예끼, 지나친 겸손은 사양함세.”
“아닙니다. 공작님의 덕이 맞는 것을 어찌 달리 말하겠습니까?”
공작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처음으로 노회한 공작의 눈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쳤으나, 어쩐지 이 또한 뱀과 같은 미소였다.
“어허, 나는 지나친 겸손을 가진 손녀사위보다 야망에 불타오르는 손녀 사위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준다네.”
“…….”
알츠베이트 공작과 이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를 테면 제 아비보다도 더 큰 야망을 가진 손녀사위라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
알츠베이트는 이안 앞에서도 자신의 손녀를 재물로 거래를 하려 들었다.
이안은 순간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자식을 두고 거래라.’
제 부친에게서 느꼈던 똑같은 감정을 눈앞에 있는 알츠베이크 공작에게서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한때는 거대해서 바라보기조차 버겁다 싶던 상대가, 이 순간 한없이 초라란 모습으로 군림하려드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안의 얼굴로 이내 그린 듯한 아름다운 미소가 스쳤다.
“……어떤 야망을 말씀하십니까?”
관심 있다는 듯 굴자, 기다렸다는 듯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로 음흉함이 스쳤다.
그 얼굴은 인자한 듯 떠올린 미소에 금세 사라졌지만 이안은 똑똑히 확인했다.
* * *
차일드 가문의 연회장은 귀족들만 참석하는 평범하고도 화려한 연회와는 다르게 다양한 계층이 참석한 축제 분위기였다.
게다가 날이 맑았기에 야외 연회장까지 열게 된 것이 신의 한수였다.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제철 꽃으로 화사하게 장식된 연회장은 아주 사치스럽지는 않아도 저택과 어우러지는 멋이 있었다.
귀족들은 차일드 가문이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했다.
연회는 토벌대에 참가했던 가문들 모두가 참석해 각기 자신의 가족에 대한 무용담을 뽐내느라 시끌벅적했다.
차일드 가문의 재력을 보여 주는 자리인 만큼 음식 또한 푸짐했으며, 악단이 연주하는 곡까지 이 풍경과 어우러져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급조한 자리치고는 제법이군.’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곳에 들어서며 이리 생각하는 동시에 속으로 혀를 찼다.
좀처럼 분노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츠베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등장에 차일드 백작이 빠르게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분명 빠른 속도였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은 썩 성에 차지 않았다.
어쩐지 토벌전과 다른 태도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각하께서 친히 와 주셔서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느물느물하게 웃는 백작을 바라볼수록 그가 자신과의 계약을 일부러 어겼을 거란 확신이 굳어져만 갔다.
아니라면 토벌전엔 그토록 비굴하던 자가 이리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차일드 백작의 속내는 그렇지 않았지만 알츠베이트 공작이 알 리가 없었다.
공작은 자신이 살아온 비열한 생에 비추어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했다.
‘감히 이빨을 드러낸 개를 살려 둔 적은 없지.’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러한 분노를 숨긴 채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새로운 로드를 개척했다지. 축하하오. 새로운 금고를 하나 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지. 은행을 매수해도 좋겠소.”
“하하하,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공작님께서 투자해 주신 덕분이니 금고를 장만하셔야 하는 분은 저보다 공작님이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차일드 백작의 말과는 달리, 그는 아스킨 레무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이 토벌에 알츠베이트 가문의 가담을 최소화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를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눈엣가시였던, 이제는 제 손아귀를 벗어나려 드는 아스킨 레무트를 없애 버리는 값이라 생각하고 너그러운 척 얼마간의 손해를 감수했다.
하지만 그 판단이 이 순간 알츠베이트 공작이 토벌 성공에 제 공을 내세우기 어렵게 만든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이 능글능글한 차일드 백작의 뜻대로 된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허허, 이 사람. 농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먼.”
공작과 백작은 익숙한 듯 서로의 속마음을 숨긴 채 서로의 공을 치하하기 바빴다.
한 발짝 떨어져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안은 속으로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안의 눈이 두 노인과 중년에게서 떨어져 군중을 헤맸다.
‘……공녀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알츠베이트 공작이 부른다고 했으니,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군중을 찾고 또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침내 이안이 기다리던 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건, 결코 이안이 바라던 그림은 아니었다.
“레무트 공작님이 입장하셨다!”
“레무트 공작님 만세!”
“공작님 만세!!”
“영웅이십니다!!”
이 순간만큼은 토벌에 참여했던 모두가 체통도 잃고 우레와 같이 함성을 질렀다.
아스킨 레무트는 환호를 내지르는 인파를 헤치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 그사이 옷을 갈아입었는지 깔끔한 제복 차림이었다.
이안은 그의 옆에서 익숙한 여인의 형체를 보았다.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사라졌지만 어찌 모를까.
그가 그토록 찾던 사람. 샤를리즈가 아스킨의 옆에 서 있었으니까.
놀란 것은 이안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킨의 등장으로 그를 연호하던 사람들은 동시에 그의 곁에서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는 샤를리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일전에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파혼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이미 몇몇 이들은 얼마 전까지도 떠돌던 파혼설을 언급하며 뒷말을 하기 바빴다.
하지만 정작 소문의 당사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말 따위 전혀 듣지 못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것에는 샤를리즈의 모습도 한몫했다.
‘세상에 오늘 공녀님의 드레스가……!’
‘그죠? 저만 잘못 본 게 아니죠?’
‘레무트 공작님과 똑같은 색, 똑같은 장식이잖아요?’
샤를리즈는 새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는데, 평소 그녀가 연회에서 붉은색과 같이 강렬한 색을 즐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특별하다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거기다가 평범한 백색 드레스가 아닌 문양부터 하다못해 목걸이의 장식, 브로치까지 푸른색, 바로 옆의 파트너의 눈 색과 똑같은 색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암묵적으로 연인 혹은 특별한 사이에서 파트너의 눈동자 색과 같은 보석 장식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제는 한물 간 관례라지만 그걸 행한 사람이 그 알츠베이트 공녀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스킨의 옷에 매달린 똑같은 모양 똑같은 장식의 브로치나, 검 장식으로 붉은 보석이 쓰인 것을 보면 더더욱!
샤를리즈의 모습은 작정한 듯이 아름다웠기에 아스킨을 보고서 반갑게 달려가던 이들 또한 자연히 발걸음을 멈추고 샤를리즈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게다가 샤를리즈가 다정하게 팔짱을 낀 모습이라니, ‘사교계의 독장미’라 불리던 별칭과는 가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들 도대체 두 사람이 어떻게 함께 들어온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이, 차일드 백작은 얼른 자리를 옮겨 오늘의 주인공 아스킨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