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오오, 레무트 공작님!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분명 처음 권했을 때엔 참석이 어렵다고 했으나, 30분 전 돌연 부관을 통해서 참석을 알린 아스킨이었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몰라도 토벌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 연회의 격이 한층 올라간 셈이었다.
‘알츠베이트 공녀와 함께라니…….’
차일드 백작은 드높아진 연회의 위상을 생각하며 흐뭇해하는 한편, 레무트 공작의 파트너가 샤를리즈라는 점에서 의문과 불안, 호기심을 강하게 느꼈다.
“공작님께서 이 자리를 참석해 주신 덕분에 토벌대 참여자 전원이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는 그 정도면 됐네.”
“하하, 인사치레라니요. 저는 당연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아스킨의 반응에도 차일드 백작은 꿋꿋하게 웃으며 냉대를 넘겼다.
그러한 모습을 샤를리즈가 흥미롭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백작.”
“아, 공녀님……!”
이에 차일드 백작이 샤를리즈에게도 인사를 올리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백작의 뒤에서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샤를리즈, 이게 무슨 짓이더냐!”
분기 가득한 목소리가 자신을 향했음에도 샤를리즈는 눈동자만 느릿하게 굴렸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지켜보던 차일드 백작이 몰래 감탄했다.
“내가 분명 따로 전령을 보냈을 텐데, 어찌 그 마차가 아니라 저놈과 들어서는 것이냐! 네가 정녕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그렇지 않아도 차일드 백작의 배신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에 샤를리즈의 이런 등장이란,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하던 가면까지 집어치우게 만들었다.
“흐응, 할아버지. 어떤 짓을 말하는 거예요?”
샤를리즈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그녀의 손은 이미 금방이라도 나갈 듯한 아스킨의 팔을 잡은 채였다.
“왜 이리 화를 내실까. 난 오늘 술도 마시지 않고, 딱히 사고도 안 쳤는데?”
“너…… 너……!”
“아, 그게 불만이면 지금 와인 한 병 시원하게 마셔 드릴까?”
샤를리즈의 반응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머리끝까지 화나게 하기 충분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옆에 있는 아스킨은 철저히 무시한 채 샤를리즈의 손목을 낚아채려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닿은 딱딱한 손길에 눈을 돌렸다.
“공작, 오늘 내 초청으로 함께한 파트너이니 예를 지키시오.”
알츠베이트 공작은 제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하지 않는 아스킨의 손에 당황하고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지켜보던 샤를리즈는 내심 당황한 마음을 숨기면서 제 파트너를 보았다.
“레무트 공작, 이 손 놓지 못하겠나? 저기 샤를리즈는 내 손녀일세!”
“그건 곤란하겠는데.”
아스킨이 서늘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당신의 손녀라고 해서,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자유 의지까지 억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당신 손녀이기도 하지만 아직 내 약혼녀이고, 내 초대로 이곳에 온 것인데 왜 당신 마음대로 굴려 하지?”
두 공작은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컷 같은 기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세 싸움이라면 아스킨 레무트가 이 제국에서 가장 잘하는 분야라 봐도 좋았다.
거대한 몬스터 앞에서도 눈썹 한 올 움츠려 본 적 없는 소드 마스터의 서슬 퍼런 기세에 노회한 공작은 속으로 움찔하고야 말았다.
“아이참, 아스킨. 그러지 말아요.”
가녀린 손이 아스킨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내 외조부가 좀, 그래요……. 꽉 막혔다니까?”
어찌나 힘을 세게 줬던 것인지,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말리는 척 잡았던 샤를리즈는 너무나 쉽게 말을 듣는 아스킨의 모습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살살 쓰다듬었다.
“안 그래요, 알츠베이트 공작님?”
“뭐? 뭐라 그랬느냐……!”
“음? 왜 놀라시지. 공작 맞잖아요. 알츠베이트 공작.”
눈이 찢어질 듯 놀라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모습에 샤를리즈는 여전히 우아하게 웃으며 응수할 뿐이었다.
“여기서도 이러시면 안 되죠, 알츠베이트 공작님.”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하다못해 저를 망신 주었다고 패악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알츠베이트 공작은 웃고 있는 이 손녀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괜한 오해를 만들어 나와 아스킨을 기어이 갈라놓으려 든 걸로 부족해요?”
샤를리즈의 말이 주는 파동은 컸다.
주변에서 재미난 구경이 난 듯 쳐다보던 이들이 술렁였던 것이다.
“애초에 나와 레무트 공작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까워지다 못해 진정한 연인이 되었는데…… 터무니없는 오해 거리를 만든 사람이 있었죠. 그게 알츠베이트 공작님이셨고.”
샤를리즈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반향은 그녀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화해를 했다고? 오해를 풀어? 이미 레무트 공작이 공녀를 용서했단 말이야?
연인은 무슨 소리야? 두 사람 진짜 사귀었어?!
“결과적으로 순조롭게 이어 가던 약혼을 파혼 지경에 만든 건 다름 아닌 할아버지시네요. 의도하신 건 아니셨겠지만…….”
웃으며 한마디씩 던지던 샤를리즈가 돌연 표정을 바꾸었다.
슬픔에 잠긴 표정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천연덕스러웠다.
그 누구도 샤를리즈의 저 모습이 연기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정착했으면 좋겠다고. 정말…… 사과하는 것도 미안하고 힘들어 가까스로 이 사람에게서 용서를 받은 것이었는데…….”
“샤를리즈, 너……!”
“할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갑작스럽게 이 연극에 초대받은 아스킨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제가 행복했으면 했다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어요?”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 샤를리즈의 모습은 보는 이들 모두로 하여금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게 샤를리즈가 누구던가.
이 세상 독기를 모두 품은 것 같은 여인이었다.
세상 모든 여인이 슬픔에 잠기더라도 홀로 고독할지언정 표독스러운 웃음을 멈추지 않을 듯한 사람.
그런 예상과 편견을 깨고 그 샤를리즈가 눈물짓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 모습이…… 더없이 처연하고 어울렸다.
보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고 해도 좋았다.
“저런…… 그럼,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파혼할 뻔한 건가요?”
“그것도…… 알츠베이트 공작님 때문에?”
몇몇 여인이 샤를리즈를 따라 훌쩍 눈물지었다.
“이상하네요……. 제가 최근에 알츠베이트 공녀님께서 새로 약혼하신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헉, 저도요!”
“공녀님 말씀대로라면, 두 분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일부러 만든 오해로 헤어지고…… 억지로 약혼할 뻔했다는 건가요?”
“세상에!”
이 순간 샤를리즈가 조장한, 세상 처연하게 보이는 모습 덕분에 사람들은 샤를리즈가 억지로 약혼을 하느니 약혼식을 지옥의 파티로 만들어 버릴 인물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말았다.
그만큼 희대의 악녀가 마치 구마라도 당한 듯 글썽거리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사람은 가끔 너무 충격적인 것을 보면 눈앞의 상황을 그대로 믿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 샤를리즈가 울먹이며 하는 말들을.
“저는, 아스킨. 아니 레무트 공작과 행복해지고 싶어요.”
물기 어린 속눈썹이 팔랑팔랑 위아래로 흔들렸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레무트 공작과는 다시 약혼하기로 했어요.”
기어이 샤를리즈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성이 있던 사람마저 샤를리즈가 독하디독한 악녀였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허락해 주실 거죠? 할아버진 늘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으니까.”
이 순간 샤를리즈와 아스킨의 사이를 반대하면 천인공노할 적이 되는 것은 바로 한 사람, 샤를리즈가 줄곧 말을 걸던 상대,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샤를리즈가 속으로 씩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샤를리즈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무엇에 능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저 인간은 인간을 도구처럼 다루는 데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인가.
‘평판.’
사람은 돈을 벌면 명예를 거머쥐고 싶어 하며, 명예를 거머쥐면 선망과 존경마저 쥐려 한다.
허울뿐인 가식이라 해도 말이다.
저 인간은 권력의 중심에 선 채 이제는 모든 귀족의 존경마저 받고 싶어 한다.
그녀가 이를 어찌 모를까.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긋지긋하게 본 인간인데.’
어디 그뿐이랴, 저 인간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었다.
언제까지고 빼앗긴 채로 살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