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알츠베이트 공작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모두에게 존경까지 받고 싶어 했지?
추한 노인네의 과욕이 부른 스스로 만든 함정이기도 했다.
여기서 샤를리즈의 약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던 존경도 잃고 평판도 어그러진다.
평소라면 지금보다는 덜 당황했겠지만, 현재 아스킨은 무려 또 한 번의 ‘로드’를 만들어 내며 곧 다시 국민적 영웅이 될 예정.
차일드 백작과의 계약이 어그러지면서 거국적 토벌에 알츠베이트의 몫은 너무나도 적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평판을 잃고 주춤하는 동안에 아스킨의 명예가 드높아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수락한다면?
이 순간 알츠베이트 공작은 차일드 백작을 찾아 눈을 돌렸다.
가장 비싼 값에 손녀를 팔아넘기려 했던 공작이었다.
차일드라는, 새로운 로드의 수익을 차지할 대어를 이렇게 덫에 걸려 놓칠 수만은 없었다.
“……참으로 실망이구나. 손녀야. 이런 이야기를, 누가 이런 자리에서 하더냐?”
“죄송해요, 할아버지. 감정이 북받쳐서 그만…….”
샤를리즈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영감 당신 엿 먹일 이야기를 여기서 하지, 내가 미쳤다고 네 홈그라운드에서 하겠냐?
‘어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그래도 허락해 주실 거죠?”
빼앗긴 만큼 한방 돌려줄 때까지는 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윽고 샤를리즈는 사람의 분노가 지나치면 빨갛게 익어 터져 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있다.
이는 샤를리즈의 큰 기쁨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구나! 쯧!”
결국 시선의 압박과 존경받는 위치란 제 욕망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 알츠베이트 공작이 그대로 걸음을 물렀다.
망할 영감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출구였다.
이 모습을 본 샤를리즈는 황급히 입술을 가렸다.
저 노회한 공작이 제 분에 못 이겨 이곳을 벗어나는 모습이라니.
‘와, 하마터면 미소를 숨기지 못할 뻔했네.’
샤를리즈는 잽싸게 처연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누군가 손을 치워 보라고 하면, 샤를리즈의 입은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이다.
‘고소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모자라지.’
샤를리즈가 눈을 내리깔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중얼거리는 척만 했을 뿐 목소리는 유난히도 컸다는 거다.
주변에 들릴 만큼.
“……할아버진 아직도 나를 억지로 약혼시키고 싶은 걸까.”
그러자 주변에서 기다렸다는 듯 동요가 파도처럼 일었다.
보이지 않는 파도타기를 바라보는 샤를리즈의 속내는 짜릿한 웃음과 함께였다.
‘좋아, 이제 씨는 마음껏 뿌려 뒀고.’
지금까지 처연하게 아래를 보고만 있던 샤를리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 다시 약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주 잠깐 흠칫하는 아스킨의 손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설마하니 여기서 초를 칠 건 아니지? 이런 마음이 들긴 했다.
한편으로는 이번에 또 초를 치면 이번에야말로 알츠베이트 공작 이름 바로 옆에 아스킨의 이름을 적어 버릴 생각이었다.
‘참고로 적어 두는 곳은 내 안의 척살 대상 목록이다.’
결국 초를 치는 일은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궁금했다.
넌 무슨 생각이길래 동조한 거야?
“안색이 좋지 않군. 잠깐 가서 쉬겠나?”
그녀의 말에 불쾌감은커녕 오히려 손을 뻗는 얼굴이 조심스러웠다.
이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정말 토벌에서 머리를 다쳤나?
아니면 자신처럼 다른 사람이 빙의했는데 샤를리즈에게 착해지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든가.
이 모든 낮은 가능성을 지워 낸다면 뭐, 가서 목숨의 위기라도 맞이했나?
그래서 사람이 변할 정도가 되었다든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그럼 ‘샤를리즈’답지 않은 자신도 죽고, 아스킨도 죽는 건가.
걸어가는 동안에 그간 받아 본 적 없는 동정 가득한 시선과 낭만 가득한 시선이 줄곧 꽂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족이란 소문을 먹고 그 소문에 낭만 한 스푼을 얹으면 더욱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가십을 곱게 포장한 말이라 해도 좋으나, 악소문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남의 연애사였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지 뭐. 샤를리즈는 속으로만 팔짱을 꼈다.
‘떠들썩해지겠군.’
바라던 바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퇴장에 잠시 소란이 있었긴 하나, 차일드 백작이 나서자 금세 진정되었다.
샤를리즈가 말할 땐 무얼 하다가 뒤늦게 나섰는지 모를 일이나, 어쨌거나 백작은 빠르게 연회의 시작을 알렸고, 이내 샤를리즈는 단상에 올라가 좌중을 향해 아스킨이 짧지만 강한 인사를 한마디 남기는 모습을 보았다.
장내는 다시 아스킨을 연호하는 소리와 함께 축제의 장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마음 놓고 파티를 즐긴 적은 없나?’
게다가 샤를리즈로서 이렇게 파티 구석에 앉아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쏟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직 환희에 찬 사람들을 한참 생각 없이 바라볼 때였다.
눈앞으로 와인 잔이 내밀어졌다.
시선을 들면 대체 어느 틈에 온 것인지, 아스킨이 작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야, 뛰어왔니? 분명 3분 전에 네가 저 위에 서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3분 전 아니다. 10분 전이다.”
아.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거지?
샤를리즈는 조금 놀랐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였다.
“괜한 일을 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샤를리즈는 와인을 입에 머금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붉은 두 눈이 스르륵 굴러 자신보다 한참 큰 남자를 향했다.
샤를리즈는 앉은 채로 눈을 깜빡였다.
“뭐? 뭘 말하는 건데?”
“내가 초대하지 않았다면 네가 이런 수모를 겪을 일이 없었을 테니까.”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그랬다면 그 영감 그 표정을 못 봤겠지. 그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하니 절로 서늘한 표정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그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아니, 오히려 통쾌했는데. 그 영감 그런 표정은 나도 처음이라 짜릿했거든.”
샤를리즈는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려 아스킨 앞에 살짝 흔들고서는 단숨에 와인 잔을 비워 버렸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그녀는 입술에 남은 붉은 와인 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체리처럼 새빨간 입술의 색과 손가락에 묻어나온 입술과 비슷한 색에 아스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왜 약속 외의 말을 했는데도 가만히 있었어?”
샤를리즈가 아무리 최근 막 사는 수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지만 아무런 언질 없이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아스킨과 이 자리에 함께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 연회에는 분명 제 외조부인 알츠베이트 공작이 올 거라 생각했다.
아스킨과 입장하는 모습을 보면 눈이 돌아가든 분노하든 둘 중 한가지라도 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렇기에 샤를리즈는 차일드 백작저로 향하는 길에 아스킨에게 언질해 두었다.
‘가서 알츠베이트 공작의 속을 긁을 생각이니 무슨 말을 해도 동의하라’고.
물론 아스킨이 당황하지 않게끔 어떤 말을 할지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안에 약혼을 다시 하기로 했다는 말은 없었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영감탱의 붉으락푸르락한 면상을 볼 수 있었던 건 좋았지만 아스킨이 끝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그녀로서도 의외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 몰라도 자신에게 유해졌지만 그래도 ‘약혼’이라는 말은 그들 사이에 역린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좀 앉아. 목 아프니까.”
샤를리즈가 이렇게 말했지만 아스킨은 어쩐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정신을 멍하니 빼놓은 듯한 모습에 샤를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그녀는 조금 전 알츠베이트 공작을 쫓아냈던 일로 아직도 통쾌하고 기분이 좋은지라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막 돌아온 사람이니 뭐 피곤할 수도 있지.’
제국 최고의 검사가 피로 정도로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소린 못 들어 봤지만 말이다.
샤를리즈가 대답을 포기하는 찰나, 아스킨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싫지 않았다고 한다면.”
“뭐? 조금 더 크게 이야기해 주거나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줘. 네가 너무 커서 잘 안 들려.”
“가만히 있었던 건 거부하고 싶지도 싫지도 않아서 그랬던 거라고 말했다.”
좀 더 크게 말해 달랬더니 이번엔 귀에, 아니 뇌리에 콱 박히는 소리를 했다.
샤를리즈의 눈이 커졌다.
솔직히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샤를리즈는 여러 감상 및 감정이 교차했지만 가장 큰 감상은 이거였다.
‘……왜 떡이 굴러들어 오지?’
이게 웬 떡, 아니. 떡이 거의 목구멍으로 굴러들어 온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이 남자와 1년 동안 약혼을 유지해야 했고, 그래야만 1년간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잃었던 삶과 사랑하는 코인 수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고 죄다 파투가 나서 눈이 돌아 버린 상황 아니었던가?
눈만 돌았나, 다 파괴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
물론 아스킨을 향한 원망이 없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쩐지 말도 안 되게 유해진 이 남자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적응한 게 틀림없었다.
“그럼 넌…… 나랑 다시 약혼하고 싶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