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우린 정확하게 따지면 파혼하지 않았었다.”
“그렇지. 잠정적 파혼이지 완전 쫑난 건 아니단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말이야. 하지만 서류상 절차만 남았던 걸로 아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테고. 그러니 나는 명확한 네 뜻을 묻는 거야. 말장난하려고 이런 거라면 절대 용서 안 해.”
“장난이 아니다. 이런 걸로 장난할 리가……!”
뾰족해졌던 샤를리즈의 눈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녀의 눈이 아스킨을 빤히 바라보다 막 말을 할 무렵, 귓가로 탄성이 들려왔다.
그대로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큰 탄성이었던지라 절로 찰나 간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고는 차일드 백작의 뒤를 따라가는 한 여성을 발견하고는 와인 잔을 손에서 떨어트릴 뻔했다.
‘와, 저 사람 미모 뭐야.’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도 잠시 눈을 빼앗길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자신의 미모에 감탄하다 못해 이제 익숙해진 탓인지 자신만큼이나 예쁜 사람의 등장에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다만,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미모 이상으로 무언가 미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얘기 중에 미안한데, 아스킨.”
“…….”
아스킨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조금 흠칫했다.
조금 전에야 연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부르지 않나?
“저 사람, 아니 저 여성 분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스킨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옮겨 플로리아를 발견하고는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 토벌에서 구출한 인질이다. 차일드 백작의 의뢰이기도 했다. 저 여성을 구해 달라고 하더군. 정체나 직위는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총사령관이었던 너도 정체를 알지 못한다고? 차일드 백작은 설명도 안 했어? 백작이 그런 사람을 너한테 구해 달라고 했다고?”
“그래. 정확히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쪽이다. 내겐 토벌의 성공과 생존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확실히 아스킨이 이번 토벌로 얻은 것을 예상해 보면 그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성향상 자신과 자신의 가문, 무엇보다 아리아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면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샤를리즈는 묘한 기시감에 묻고야 말았다.
“혹시 저 여성 분 이름이 뭔데?”
“이름……? 어째서 궁금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플로리아’다. 성은 없더군. 없는 것인지 알려 주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스킨의 말을 듣는 순간 샤를리즈는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니, 아니. 원작 여주인공이 왜 차일드 가문에 있는 건데? 그것도 하필 이 타이밍에?’
플로리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빙의한 책, 바로 이 세계의 주인공인데!
‘현재 플로리아는 어떤 상황이었지? 아 씨, 곧 원작 내용이 시작할 때긴 한데 아직은 시작하기 전이라고!’
그랬다. 원작 시작이 거의 임박했지만 임박했다는 거지 시작했단 소리가 아니다.
그러니 플로리아가 이런 눈에 띄는 자리에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맹렬히 기억을 뒤졌다.
이 상황에 당황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아스킨과 자신의 문제도 그렇고 자신이 샤를리즈가 되면서 바뀐 것들이 분명히 있기는 할 테니까.
일단 크게는 자신이 원작 악녀처럼 아리아를 괴롭히지도 않았지 않던가.
어쨌거나 저 사람은 원작 여주가 맞았다.
책 속 ‘샤를리즈’가 질투에 눈이 멀어 버리게 만든 여인 말이다.
‘원래 지금 시기엔…… 옆 나라에서 몬스터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도와줄 때 아닌가? 도와주다가 이상한 세력에 습격을 받게 되고……. 그다음에야 제국으로 넘어오게 되는 걸로 아는데? 아!’
샤를리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스킨, 저 여성 분 구할 때 상황 좀 자세히 알려 줘.”
“상황?”
“어. 차일드 백작이 정확히 어떤 의뢰를 한 건데? 앞뒤 상황 자세하게.”
아스킨은 이번에도 의문을 가지면서도 순순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샤를리즈는 이야기를 듣고서 깨달았다.
플로리아가 갇혀 있었다던 곳이 바로 그녀를 습격한 이상한 세력이었을 거다.
그들에 의해 노예 상인에게 팔려 갔다가 제국으로 넘어오게 될 테지만…….
‘아스킨이 이번 토벌을 이끌게 되면서 달라진 거구나.’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내용이라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본래 이 토벌은 실패했을 것이다.
아스킨은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아스킨의 합류로 성공하는 바람에 그 지역에 있던 ‘플로리아’가 구출되어서 제국에 더 빨리 입성하게 되었다. 이거 같은데.
그렇다면.
‘차일드 가문과 플로리아는 무슨 사이지?’
책 속 조연 가문이라면 몰라도, 책 속에 나오지 않던 가문에 플로리아가 나타나 버리니 이것이야말로 참 혼란스러웠다.
이안 차일드의 등장부터가 그러했다.
분명 책 속 중요한 인물이 아닌데, 웬만한 남주진 뺨치게 잘생긴 외모라거나 능력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끄응, 생각할 게 느니까 머리 아프네.’
사실 본래라면 플로리아의 등장은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이 원작 악녀처럼 아리아를 괴롭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앞으로 원작처럼 플로리아를 괴롭힐 것도 아니고.
오히려 소 닭 보듯 서로의 인생을 살면 그만이었다.
아, 물론 앞으로 폭군 그놈이 플로리아에게 첫눈에 반해서 흑화하는 모습은 꽤 볼 만할 것 같지만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현재 알츠베이트 가문을 폭삭 무너트리기 위해 꾸미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플로리아의 등장은 적신호였다.
‘플로리아가 왕국에 있어야 일어나는 사건도 있는데! 그게 일어나야 그 영감을 더 확실히 무너트리는데!!’
그사이 차일드 백작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차일드 백작.”
“허허, 조금 전엔 경황이 없었던 것 같아 다시 인사드립니다. 알츠베이트 공녀님.”
차일드 백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본래 알츠베이트 공작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하하, 아무래도 세상일이란 것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진 않는단 말을 새삼 체감했습니다.”
“…….”
샤를리즈는 대답 대신에 차일드 백작 뒤에 서 있는 플로리아를 보았다.
‘와, 역시 여주인공.’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이 나올 법한 미모였다.
솔직히 말해 자신의 미모가 워낙 뛰어난 탓에 여주인공이 어떤 모습일까 더욱 기대했던 것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 플로리아의 외양은 완벽하게 샤를리즈와 대비를 이루었다.
강아지 같은 선한 인상과 고양이 같이 표독스러운 상의 대비랄까.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뵙습니다. 저는 플로리아라고 합니다.”
사실 샤를리즈의 언질 없이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게 예의에 맞는 일은 아니었지만 샤를리즈는 대충 넘어갔다.
갑작스럽게 마주하긴 했지만 샤를리즈가 플로리아에게 가진 감정은 호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샤를리즈는 이 책을 읽은 독자였고, 주인공, 특히나 여주인공을 좋아해서 재밌게 보기도 했다.
‘오히려 보면서 폭군 그놈이 남주라니 여주가 아까울 지경이었지.’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 피폐한데다 남주란 폭군 놈은 인성 파탄자에 남주의 여동생이랍시고 있는 악녀는 독하기 짝이 없으니, 자신이 보기엔 더 나은 서브 남주들이 많았음에도 여주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재미는 있었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요즘 폭군 그놈이 워낙 원작이랑 다른 이미지가 박혀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샤를리즈는 플로리아의 돌발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차일드 백작은 그렇지 않았는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조금 전엔 경황이 없어 인사에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아 재차 인사드려 봅니다.”
샤를리즈의 눈이 차일드 백작으로 향하자,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장사치의 미소를 지었다.
상대를 안심시키는 웃음이었다.
“세상일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지만 조금 전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지 뭡니까.”
“내 할아버지 욕을 할 거면 시원하게 하고 가. 아니면 어중간한 말은 딱히 듣기 싫은데? 백작 당신도 봤잖아? 거하게 싸운 거.”
“…….”
“여기서 할아버지 편을 들기라도 했다간 내 기분이 참 좋아지겠다, 그치?”
“하하하.”
차일드 백작이 웃었다.
이럴 때 웃을 수 있어야 일류 상인이었다.
본래 샤를리즈의 말투 또한 공녀가 사용하기에는 거만한 말투였지만 그 누구도 쉬이 탓하지 못했고 이는 차일드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일드 백작은 반박하는 대신 화제를 바꿨다.
“이쪽은 이번 토벌에서 레무트 공작님께서 구출해 주신 이웃 왕국의 포로입니다. 어째서인지 왕국의 몹쓸 놈들에게 납치를 당했었다 하더군요.”
차일드 백작은 속으로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명 플로리아를 보고서 값어치를 매기느라 바빴을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