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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147/194)

146화

“우린 달라질 수 있나?”

직설적으로 다가온 질문에 샤를리즈의 입술이 살짝 말랐다.

그도 그럴 게 아스킨 쪽에서 이토록 직진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으니까.

물론 최근 들어 변한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망설였다.

망설여? 왜 망설이는데.

기실 영영 불가능할 것 같았던 목표가 두 발 달린 것처럼 마구 움직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붙잡지 못하면 그게 바보가 아니고 뭐겠어.

샤를리즈가 아스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커다란 남자가 흠칫했다.

“달라지길 바란다면 그게 뭐 어렵겠어?”

“…….”

“하지만 너도 나도 달라져야겠지,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야.”

샤를리즈는 아스킨의 손을 잡은 채로 그대로 테라스의 빗장을 열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아닌 척하지만 아스킨과 샤를리즈가 들어간 테라스에 온통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샤를리즈는 이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순순히 제 손에 이끌려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오히려 그가 힘을 줘서 다치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듯한 몸짓이라 생경하기도 했고 말이다.

‘허어, 이런 매너가 갑자기 생기기도 하나?’

솔직히 머쓱해서 든 생각이긴 했다.

“공녀, 움직이는 건 괜찮은데…… 어딜 가는 건지만 물어도 되겠나?”

“밖.”

“밖? 밖 어디? 오래 걸을 건가?”

샤를리즈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꽤 걸을 건데 왜? 이제 와서 나가기 싫어졌어?”

“그런 게 아니다.”

아스킨이 고개를 저었다.

“네 신발, 오래 신기는 어렵지 않나.”

“뭐?”

샤를리즈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금 이 남자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발 걱정을 한다고?

그것도 나랑은 두 번째로 함께하는 연회 자리이면서?

물론 샤를리즈가 오늘 알츠베이트 공작 그 영감의 코를 눌러 버릴 기세로 평소보다 높은 구두를 신었고 아스킨이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역시 사람은 이미지가 무서운 법이었다.

“뭘 하는 거지?”

“기다려 봐, 네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고 있으니까.”

“……어떤 뜻이길 바라는데?”

“내 발을 걱정해 주는 말이었다! 하는 것만 제외하면 뭐든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

그렇게 샤를리즈가 좀처럼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멀리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저, 공녀님…….”

돌아보면 놀랍게도 원작 여주인공인 플로리아였다.

샤를리즈는 놀라긴 했지만 오랜 습관으로 놀란 얼굴을 거의 티 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니?”

“저, 아까는 실례를 범한 것 같아서요. 사실 공녀님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어 왔어요.”

청순한 두 눈에 새벽 별을 콕 박은 듯 은은하게 빛이 났다.

샤를리즈는 순간이지만 이게 초롱초롱한 건지 광기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어째, 방금 그 얼굴…… 폭군 오빠 그놈이랑 둘이 세워 두면 어울릴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제국 최고의 미인이시자, 공녀님이시고, 황족이시면서 좋아하는 색은…….”

샤를리즈는 자신에 대해 마치 사전 조사라도 마친 듯 술술 말하는 플로리아의 말을 잘랐다.

왜인지 뒤로 갈수록 자신의 단골 의상실 이름까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너무 자세한 정보는 됐고,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

샤를리즈는 플로리아에게 미묘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책 속 여주인공을 만나 반갑고 몹시도 예쁜 그녀의 모습에 가지는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호감.

한편으로는 무언가 속에서부터, 아니, 영혼에서부터 느껴지는 껄끄러움.

이렇게 느끼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은 명백히 플로리아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마 이거 막 악녀의 본능 이런 건 아니겠지?’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해 보려 했지만 몸속에서 일어나는 거부 반응을 어떻게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샤를리즈가 자신을 제어하는 사이 플로리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플로리아를 향한 아스킨과 샤를리즈의 냉대에 주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녀님께서는 저렇게 예쁜 아가씨와 무슨 사이이신 걸까요?”

“저도 궁금한데, 저는 왜 저렇게 대하는지가 궁금해요. 공녀님, 예쁜 건 좋아하지 않으셨나?”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허어, 알츠베이트 공녀께서 저 여성을 왜 부러워하겠소?”

애석하게도 여기서 몇몇 이야기들은 샤를리즈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샤를리즈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뭐라 씨부리건 말건. 나는 내 길을 간다.

샤를리즈는 빙글 고개를 돌려 생긋 웃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그럼.”

반가웠단 말은 진심이었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를 찝찝함이 함께여서 그렇지.

샤를리즈가 이 장소를 떠나기 위해 다시금 아스킨의 손을 붙잡고 뒤돌아선 순간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쪽으로 쩍 갈라서는 것이 아닌가.

마치 모세의 기적과도 같은 모습에 샤를리즈의 고운 눈썹이 쑥 올라갔다.

‘뭐야, 샤를리즈가 아무리 악명이 높다지만 이 정도로 나를 기피하듯 갈라선다고?’

그러나 이는 샤를리즈의 착각이었다.

곧 사람들이 갈라진 틈으로 기세등등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폭군이었다.

록시디언의 등장에 샤를리즈의 표정은 삽시간에 똥 씹은 낯짝이 되었다.

‘저놈이 여길 왜 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무려 새로운 로드가 탄생한 날이었다.

하지만 황성으로 불러들여서 축하연을 벌이면 벌였지, 황제가 백작이 벌이는 연회에 그것도 급히 만들어진 당일 연회에 참석하는 건 결코 흔하지 않았다.

현재 록시디언처럼 황권이 큰 황제일수록 더욱더.

연회의 주최자인 차일드 백작이 사색이 된 채로 뛰어나가 황제를 맞이했다.

체통? 챙길 겨를도 없었다. 실로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 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내려다보던 록시디언이 픽 웃었다.

“그 말 진심이야?”

퉁명스러운 록시디언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허리를 바짝 숙인 차일드 백작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짐이 보기엔 이 자리를 만든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

“짐도 없는 자리에서 재밌게 놀려 하고 말이야. 섭섭한데?”

백작의 고개는 숙여져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황제의 무심하고도 퉁명한 어투에 목은 남몰래 새빨개진 지 오래였다.

“……폐하, 제가 감히 고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건 지켜보면 알 일이지.”

록시디언은 차일드 백작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연신 느릿하게 회장을 둘러보기 바빴다.

황성에 비하면 현저히 좁기 때문일까, 그는 이곳에 있을 거라 예상한 인물이 없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알츠베이트 그 너구리가 이곳에 없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대신 록시디언은 오히려 여기 있을 거라 예상 못한 인물을 맞이했다.

샤를리즈를 발견한 록시디언이 그대로 멈칫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록시디언의 표정은 딱 이러했다.

거기다 하필 샤를리즈가 얼른 빠져나가겠답시고 아스킨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던 참이었다.

붉은색 눈이 샤를리즈를 한 번, 그녀의 손을 한 번 훑었다.

샤를리즈는 귀찮아질 것을 예감했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왜냐, 록시디언이 제게로 성큼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샤를리즈가 속으로 짜증 겸 절규를 뱉을 때였다.

록시디언의 걸음이 차차 느려지더니 그대로 멈췄다.

폭군의 시선을 쫓아가면…… 그곳엔 플로리아가 있었다.

샤를리즈가 눈을 깜빡였다.

‘허?’

생각해 보니 저쪽은 남자주인공.

이쪽은 여자주인공이네?

‘뭐야.’

설마, 자신은 지금 또 다르게 시작하는 원작의 시작점에 서 있는 건가?

주책맞게도 심장이 뛰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된 독자 윤지후로서의 감정이었다.

‘하여간 오빠 너도 남자라고 똑같구먼? 예쁘지? 플로리아가 예뻐 죽겠지?’

원작 속에서 록시디언은 플로리아에게 반하지만 처음엔 입덕 부정기를 거친다.

이미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원작과 틀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첫눈에 반하는 건 여전할까?

‘아 씨, 왜 여기 팝콘이 없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던 샤를리즈는 곧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책, 피폐물이었지?

책 속 내용 및 록시디언의 각종 행동들, 거기다 책 속 ‘샤를리즈’의 최후를 떠올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마침 록시디언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기에 결국 두 남매는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곁에 서 있던 아스킨이 정중하게 다가가 예를 올렸다.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

“예는 됐고, 이번에도 새로운 로드를 개척했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아스킨은 고개를 숙인 그대로 보고했다.

“부득이하게도 용병으로 참석한 자리라 황제 폐하께 미리 보고를 드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허, 누굴 좀생이로 아는 거야? 제국을 위해 엄청난 공로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해냈는데 상이라면 모를까 탓할 리가 있겠나.”

그러나 나지막하게 뚝뚝 떨어지는 록시디언의 목소리는 어딘가 긴장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미 폭군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슬슬 자리를 피하고 있었으니까.

“짐이 궁금한 건 말이야, 어째서 파혼했다고 알려진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있는가…… 하는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인데. 그대가 갑작스럽게 용병으로 차출된 것보다 해명이 쉽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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