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8/194)

147화

록시디언이 웃었다. 그러나 이를 웃음으로 보는 자는 없었다.

샤를리즈는 저놈이 또 왜 시비야,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뭐야, 뭔데? 뭐냐고.’

샤를리즈는 알 수 있었다.

록시디언 눈에서 노란 무언가가 일렁거리는 것을.

‘나 목걸이 사용 안 했는데……?’

저건 분명, 폭주의 징조 혹은 인격이 바뀔 적의 신호였다!

샤를리즈의 등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설마, 이 수없이 만든 사람들 앞에서 그 ‘인격’이 되겠다고?

폭주든 아니든 저 눈은 너무나 위험했다.

샤를리즈는 황급히 자신의 목걸이를 쥐었다.

짐승처럼 일렁이는 눈동자가 마침내 완전히 황금색이 되는 순간, 샤를리즈는 늦지 않게 시동어를 외칠 수 있었다.

“……엄마야!”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바로 곁에 있던 아스킨은 어렵지 않게 들었다.

그는 샤를리즈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지만, 그녀는 시선을 알아차릴 겨를도 없었다.

곧 자신을 향해 씨익 휘어지는 폭군의 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금색으로 물든 눈동자,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 느끼할 정도로 부드러운 눈웃음……!

“사,”

“황제 폐하!”

모든 사람이 일시에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리즈가 한 손은 폭군의 멱살을,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황제의 여동생이라지만 감히 황제의 입을 막다니?

지금같이 황권이 강한 시대에, 황제가 이 제국에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이들일수록 사색이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저 안하무인 악녀인 샤를리즈라도 큰 처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분명 사랑스러운 여동생 어쩌구 하려 했다, 그러려고 했다고!’

정작 샤를리즈는 진짜 엄마를 외치고 싶은 상황이었다.

왜 하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갑자기 폭주하려 든단 말인가.

이렇게 많은 눈앞에서 또 다른 인격을 보이는 건 록시디언 스스로도 바라는 일이 아닐 터였다.

물론 샤를리즈 또한 이 인간이 자신을 낯간지럽게 부르는 꼴따위 죽어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

샤를리즈가 록시디언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금색 눈동자가 슬쩍 움직이더니, 이내 샤를리즈는 손 아래서 입꼬리가 휙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분부대로.”

평소의 짓궂음 대신 나른한 다정함이 깃든 눈이었다.

샤를리즈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건 내 애인, 연인이 해 주면 좋은 거지, 혈육이 이런다?

그날로 유혈 사태 일어나는 거다.

실제로 샤를리즈는 이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상상을 했지만 겨우 상상으로 그칠 수 있었다.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네. 난 우리 사,”

“폐하.”

“오라버니.”

“폐…….”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돼?”

“……오라버니.”

샤를리즈가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사이 주변에서는 숫제 팝콘을 먹여 줘도 그대로 후두둑 떨어트릴 것 같은 놀란 얼굴을 한 채 남매를 보기 바빴다.

특히나 멀리 떨어져 있던 연회의 주인, 차일드 백작은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숨기려 그래, 샤를. 우리가 사이 좋은 게 뭐 대수라고.”

“……아하하.”

그래, 사랑스러운 여동생 어쩌고 보단 이런 애칭이 나았다.

샤를리즈의 손이 록시디언을 놓아주는 사이 록시디언의 눈이 아스킨을 향했다.

묘하게도 인격이 변한 지금에도 아스킨을 바라보는 시선엔 불쾌함이 어려 있었다.

“레무트 공작, 말을 하다 말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전에 왜 너희가 이 자리에 손을 잡고 있냐? 그것도 내 눈앞에서?

하는 질문을 던졌던 록시디언이었다.

“난 왜 우리 샤를이 그대와 손을 잡고 있는지, 아주 많이 궁금한데?”

인격이 바뀌었다고 기억을 잃는 건 아니기에 명확히 똑같은 점을 짚었다.

“세상에, 세상에 들었어요? ‘우리 샤를’이래요!”

“어머나, 두 분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애틋하셨을까요?”

“사실 그동안 사이가 좋으셨는데 불가피하게 숨기셔야 했다거나…….”

“세상에 마상에!”

1차적으로 샤를리즈와 아스킨의 재결합설을 제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충격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의 앞으로 황제와 여동생의 애틋한 남매설이 2차적으로 던져졌다.

그들은 떡밥을 주워 먹는 물고기들처럼 부산하게 움직였다!

정작 당사자인 샤를리즈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바빴다.

‘이 인간이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저 주둥이 잘못 놀리기만 해 봐라.’

언제든 이 정의의 주먹으로 처단해 버릴 테다.

체통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이판사판으로 산 지 오래된 몸, 록시디언이 무언가 이상한 말을 꺼내면 망설임 없이 날릴 생각이었다.

“어째서 손을 잡고 있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공녀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드릴 수 없습니다.”

아스킨의 나직한 대답에 한껏 털을 부풀린 고양이같이 화를 참던 샤를리즈의 눈이 커졌다.

“아직 공녀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을 폐하께 먼저 보고드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가 누구던가.

‘황제라면 하늘처럼 알던, 대단한 충신이자 기사 아니었나?’

심지어 폭군이 대놓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티를 내도, 그런 대우는 받은 적 없다는 듯 늘 정중하고 우직했으며 충심을 다해 모셨다.

‘그런 인간이 황제 앞에서 정중하기는 하나 거절을 내비쳐?’

샤를리즈는 어느새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다시 잡는 손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아스킨을 향했다.

언제나처럼 차가울 거라 생각했던 눈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아니, 분명 자신을 보는 순간 누그러졌다.

조금 머쓱한 듯한 시선이 어쩐지 ‘이 정도면 잘한 건가’ 하고 묻는 듯했다.

샤를리즈는 조금 고양되는 이 기분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쾌감? 쾌감인가?’

그녀는 입술로 피어나려 드는 미소를 참으로 큼큼 헛기침하기 바빴다.

“들었지?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난 간다.”

록시디언이 답이 없었다.

샤를리즈는 이대로 아스킨을 붙들고 나가려다 말고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아, 붉은 눈.’

제 오빠의 눈이 저와 같은 붉은 색이었다.

즉, 원래대로 돌아왔단 소리였다. 샤를리즈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더는 이야기 나누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옮기려 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문제는 이제는 어울리지도 않는 부드러운 미소 대신 살벌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금방이라도 성질을 낼 것 같은 록시디언이 고개를 휙 돌렸다.

샤를리즈가 록시디언의 시선을 좇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플로리아가 있었다.

“……저 여인은 누구지? 내 제국민이 아닌 듯한데.”

얼굴만 보고도 제국민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 싶지만, 확실히 플로리아는 제국에서는 드문 머리색을 가진 데다 외모도 이국적인 미형이었다.

제국에는 샤를리즈처럼 화려한 느낌의 미인들이 많았으니까.

록시디언은 노아를 쳐다보았다.

그간 록시디언의 폭주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노아는 왜인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차일드 백작을 향했다.

어느새 노아 근처까지 온 차일드 백작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예, 폐하. 이번 토벌에서 구출한 이웃 왕국의 포로입니다.”

“……포로? 이름이 무엇이지?”

록시디언의 질문이 길어질 듯하자, 노아가 눈치 빠르게 플로리아를 폭군 앞으로 데려왔다.

샤를리즈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잠시 이곳을 나가는 것을 멈추고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다.

‘이 소설 남주랑 여주랑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전개가 쭉쭉 나가는 거였어?’

역시 원작의 힘인걸까.

샤를리즈는 흥미진진함과 걱정을 동시에 느꼈다.

‘……이걸 말려야 돼, 말아야 돼.’

역시나 이 소설이 피폐물인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위,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 이름은 플로리아입니다.”

“플로리아? 이름과 아주 어울리는군.”

나지막한 폭군의 말에 샤를리즈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뭐냐, 저거. 내 오빠 맞냐? 나한텐 맨날 귀 후비면서 짓궂기 바빴던 그 인간 맞냐고.

마치 전생에서 오빠인 윤지훈이 그럴싸한 대학 선배로 여자 후배랑 있는 모습과 연하의 여친에게 애교 떠는 모습을 봤을 때의 기분이랄까.

샤를리즈는 각오했지만, 역시나 전생이나 여기나 혈육의 연애는 가까이서 보는 게 아니구나.

새삼 깨달았다.

물론 아직 연애라고 하기엔 멀었지만.

“차일드 백작, 이 여인은 추후 왕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인가?”

“예? 아, 예. 아무래도 그리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제국민이 아니기에 적법한 사유가 아니고서야 영지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것이 제국의 법…….”

“저 여인을 특별히 머물 수 있게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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