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것 좀 보게.
샤를리즈가 속으로 휙 휘파람을 부는 사이, 모든 사람들이 폭군의 발언에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제국은 모든 이웃 왕국이 거주를 희망하는 땅이었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미색이라고 하나, 한낱 포로에게 거주를 허락한다는 것은 연회에 참석한 노귀족들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일.
당연한 반응이었다.
샤를리즈 홀로 당황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책 속에서도 록시디언은 다른 나라 출신인 플로리아를 제국에 거주하게 했으니까.
시간과 장소만 다를 뿐 상황과 대사는 거의 원작과 흡사했다.
‘중간에 차일드 백작이 끼어 있는 게…… 조금 찝찝하지만 말이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나는 내 제국에 들어온 모든 이들을 환영한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거, 저거 좀 보게. 얼굴부터 달라진 것 좀 봐.’
그녀는 빙의한 후는 물론이요, ‘샤를리즈’의 기억을 다 뒤져 보아도 폭군의 저런 미소를 본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으으, 소름 돋아. 샤를리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샤를리즈는 그대로 아스킨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나 그만 돌아갈래. 가자.”
“그래, 바래다주겠다.”
샤를리즈은 아스킨을 보며 흐응, 하는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미소에 아스킨은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이전처럼 차갑게 내려다보진 않았다.
연회장은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한 데다 황제의 등장까지 겹치며 소란스러웠지만, 공간을 벗어나자 금세 고요한 복도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마차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했더라?”
“이쪽이다.”
두 사람은 테라스에서와 다르게 필요한 말만 주고 받으며 고요하게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샤를리즈는 딱히 어색함을 느끼진 않았다.
아스킨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마차가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알츠베이트 공작가로 돌아갈 건가?”
아스킨은 샤를리즈가 걱정되었다.
이미 앞서 그 알츠베이트 공작을 쫓아낸 꼴을 보지 않았던가.
그로서는 드물게 통쾌했지만 샤를리즈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흐응, 걱정하는 얼굴 같네.”
“제대로 봤다.”
“거기에 대해서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나부터 이야기할게. 아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그래서 테라스에서 나가자고 하기도 했고?”
“그래.”
샤를리즈가 빙긋 웃었다.
조금 쌀쌀한 바람마저 온풍으로 느끼게 만드는 화사한 미소였다.
“너네 집에 고양이 있니?”
“뭐?”
“아, 이렇게 말해선 못 알아듣겠구나.”
샤를리즈가 입술을 살짝 가리더니, 눈을 휘었다.
“나 좀 재워 줘. 너희 집에서.”
아스킨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오’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이건 또 뭐야.
눈앞에서 남자가 제 입술을 황급히 가렸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이미 보고야 말았다.
눈처럼 새하얀 남자의 뺨과 목덜미가 마치 동백꽃 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울긋불긋한 뺨은 솔직히…… 꽤 장엄한 광경이었다.
공짜로 봐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의 절경이라 할지.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빨개져? 응큼하긴.”
“응큼……! 나, 난.”
“살다 살다 네가 말 더듬는 꼴을 다 보는구나? 내일 죽는 날인가.”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무슨 말?”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샤를리즈는 자신의 손목에 힘없이 닿는 아스킨의 손을 보다 픽 웃었다.
“그래. 아픈 여동생을 둔 오빠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네.”
한편으로 샤를리즈는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뭐지.
지금의 심정을 말로 표현하자면 매우매우 공략하기 어려운 남자를 앞두고 온갖 스킬을 갈고 닦았는데, 알고 보니 그 공략 대상의 난이도가 ‘이지 모드’였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랄까.
‘아니, 쟤가 쉽다는 건 아닌데…….’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재워 줄 거야?”
“대체…….”
“아니면 나 오늘 잘 곳 없어.”
“네가 왜 잘 곳이 없나.”
“봤잖아. 아까 그 영감탱 쫓아낸 거.”
“…….”
“내가 지금 상황에서 돌아가면 어떻게 될 것 같니?”
그제야 아스킨의 얼굴이 제 색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샤를리즈는 아주 잠깐이지만 아쉽다고……. 아쉬워? 내가? 뭘?
샤를리즈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아스킨은 납득한 얼굴이었다.
“그래, 이해한 얼굴이네. 아마도 돌아가면 최소한 감금이야.”
“알츠베이트 공작이 너를?”
“글쎄, 네가 과거의 나를 얼마나 악독한 쓰레기로 봤을지 알아.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하지만 말이야, 나 또한 그 영감 앞에서는 너와 처지가 다르지 않았어.”
샤를리즈가 가는 손가락으로 아스킨을 한 번 가리키고 자신을 가르켰다.
“팔아먹을 수 있는 존재. 난 그중에서도 제일 가치 있는 거였겠지.”
“……것이라니, 그건 꼭.”
“물건 같지? 맞아. 네가 느꼈던 기분은 적어도 나도 느꼈단 거야.”
물론 아스킨이 느낀 모멸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샤를리즈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아스킨은 듣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재워 줘. 책임져 줘.”
“책…임이라니…….”
“그럼 남의 혼사를 막아 놓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 했단 말이야? 꺄아, 세상에 파렴치해!”
“이제 보니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군.”
애초에 상의 없이 약혼을 다시 했다고 말해 버린 건 샤를리즈였지만, 그녀는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하게 응수했다.
왜, 뭐. 너도 싫다고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재워 줄 거야 말 거야. 아스킨 레무트 씨, 나 지금 알몸으로 가출한 거나 마찬가지거든? 가지고 있는 거라곤 몸에 걸친 게 다야, 다.”
사실 지금 몸에 걸친 걸로 과장해서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었지만, 역시나 샤를리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뭐야, 이 인간 왜 또 멍한 표정이야?’
“…….”
“공작?”
“……생각해 보니 네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른 건 처음인 것 같아서.”
“그랬니?”
그랬나? 샤를리즈는 이 몸의 기억을 조용히 뒤져 보았다.
그러고는 단 5초 만에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게…….
과거 ‘샤를리즈’는 이 남자를 멍멍이, 예쁜 꽃, 동정 기사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와, 잠깐이지만 모든 걸 이해할 뻔했네.’
솔직히 ‘샤를리즈’는 미워해도 마땅한 악인이긴 했다.
안타까울 만한 구석은 있지만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궁지에 몰렸을 때 선으로 남을지 악으로 변할지는 본인의 선택인 셈이다.
‘그나저나 앞선 호칭은 그렇다 치고 마지막 호칭은 뭐야? 너무하네, 진짜.’
샤를리즈는 얼른 떠오르는 기억들을 잊으려 애썼다.
“앞으로 많이 부르면 되겠네. 어떻게 불러 줄까? 아스킨 레무트 님? 존경하는 아스킨 경? 레무트 공작님?”
“…….”
재미없게.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샤를리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무래도 넌 재워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 찢어지자.”
샤를리즈가 성의 없이 손을 내젓고는 몸을 돌렸다.
돌리기 무섭게 샤를리즈는 아프지 않은 힘에 의해 다시 돌려져야 했다.
그녀가 드물게도 놀라 눈을 끔뻑였다.
“뭐 하는 거야?”
“……적 없어.”
“뭐?”
“……재, 워 주지 않겠다고 한 적 없다고.”
엄……. 그래? 그렇다면 나야 좋은데. 어째서인지 샤를리즈는 눈치를 보게 된 자신의 상황이 이상했지만, 상황이 그러했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어지던 얼굴이 어째서인지 꽤 살벌했으니까.
“만약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디로 가려 했지?”
“글쎄…… 내가 갈 곳 하나 없겠니?”
“넌 친구 없잖아.”
그 말은 사실이지만 세상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샤를리즈의 눈이 여주처럼 샐쭉해졌다.
“시비 걸려면 아주 잘 걸었어. 그래. 나 친구 없다, 됐니? 됐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아리아라는 멋진 친구가 있는데!
원래 싸울 땐 제일 좋은 대답은 한 발짝 늦게 떠오르는 법이었다.
“책임지라고 했지, 나도 이렇게 구차하게 가고 싶진 않아. 네 갈 길이나 가. 아니다, 넌 여기 주인공이기도 하니까 이 자리를 마음껏 누리면 되겠네. 난 간다.”
“샤를리즈.”
그녀가 멈칫했다.
이름 단어 하나가 이토록 간지럽게 들릴 일인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잘못했다.”
“……뭘?”
“친구는 내가 더 없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뭐래는 거야, 이 인간이.
장난하나?
“머물 곳이 없다면 내 저택으로 와 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이 차일드 저택이 아니라.”
아스킨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묘한 박력에 샤를리즈는 망설이는 척하다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아스킨이 거절하더라도 레무트 저택으로 갈 생각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는 데다가 정 안되면 아리아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겠나?
알츠베이트 공작과 마주쳐도 탈이 없을 때까지 있을 곳이 필요했다.
아스킨의 에스코트에 따라 움직이면서 샤를리즈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정히 안 되면 차일드 백작가에 머무는 것도 고려하긴 했는데…… 이걸 입 밖으로 얘기했던가?’
창문으로 둥둥 뜬 달과 별이 흘러갔다.
샤를리즈는 오늘이 꽤 기묘하면서도 새로운 날이라 생각했다.
“…….”
“존경하는 아스킨 레무트 공작님?”
“……그렇게 부르느니 차라리 이름을 부르지 그래.”
“아스킨.”
“…….”
“너 내 이름 한 번 더 불러 볼래?”
“……나중에.”
적어도 자신이 더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