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 *
한편, 연회장은 기묘한 분위기가 자리했다.
샤를리즈가 아스킨의 손을 잡고 사라진 사이, 폭군은 차일드 백작의 안내에 연단 위 제일 상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 기묘함이 공존했던 연회장은 숨죽인 공기를 벗고 차차 활기를 찾아갔다.
록시디언은 연회장을 나른하게 내려다보면서도 한 번씩 입구를 쳐다보는 일이 잦았다.
샤를리즈가 나간 곳이었다.
“노아.”
“네, 폐하.”
“쫓아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
“……예, 폐하.”
조금 전 차일드 백작의 입을 통해서 오늘 알츠베이트 공작이 어떻게 샤를리즈의 손에 쫓겨났는지 전말을 들었다.
제 여동생다운 모습에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샤를리즈가 분명 오늘 집에 가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았다.
이전에야 밤새 운영하는 가면 무도회 같은 곳을 찾았겠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여동생은 거짓말처럼 유흥을 끊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록시디언은 오래 생각을 잇지 못했다.
“폐하, 제가 특별히 아껴 뒀던 와인입니다.”
“향이 좋군. 풍미 또한 깊은 게 아주 일품인데.”
백작이 공손하게 건넨 와인을 머금은 록시디언이 잔을 휘휘 흔들었다.
잔 속에 남은 와인이 흡사 말라붙은 피처럼 보였다.
록시디언은 제 안에 잠재된 짐승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남은 와인을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백작은 이런 와인을 혼자만 마시고 있었단 건가?”
“하하하……. 폐하의 취향이시라면 제가 얼마든지 진상품으로 올리겠습니다!”
“선물이라, 황제가 되어서 이런 선물을 받아서 쓰겠나. 그것도 백작위의 선물을.”
록시디언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제 차일드에겐 마음껏 받아도 되려나?”
차일드 백작이 속으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사이, 록시디언은 차일드 백작을 사납게 노려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번 토벌에 레무트 공작을 용병으로 쓴 건 아주 재미있었어.”
“……폐하?”
“그래, 백작 생각이었나? 아니면…… 황제를 엿먹이는 방법을 잘 아는 누군가의 귀띔이라도 있었나.”
짐승처럼 번뜩이는 시선에 차일드 백작은 순간 말문을 잃고 말았다.
록시디언은 현재 알츠베이트 공작의 사주를 받아 아스킨 레무트를 끌어들였으냐고 묻고 있었으니까.
“절대 아닙니다. 폐하. 저는 단지 이 토벌이 실패할 시, 혹시라도 제국과 황실에 누가 될까…….”
“조용히 처리했다? 쥐새끼처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실패하면 본인에게 똥물이 튀지 않게 조용히 덮고, 성공하면 혼자 이득을 볼 수 있어서 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짐의 착각인가?”
“아닙니다. 어찌 그렇겠습니까, 저는 제국을 위해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였던 것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늙은 백작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폐하.”
늙었다기엔 아직 파릇한 중년에 가까운 차일드 백작이었다.
록시디언은 흘러나오는 조소를 참지 않았다.
“제국을 위한 길이라…….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군.”
“진심을 알아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그럼 그 로드를 황실로 귀속시켜도 괜찮겠군?”
“…….”
공들여 만든 길을 눈 뜨고 코 베이듯 빼앗기게 생겼다.
이쯤 되자 차일드 백작이 제아무리 협상에 타고난 장사꾼이라 하여도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상대는 제국의 황제였다. 게다가 폭군이라 불리는 자.
차일드 백작은 열성을 다해 흘러나오는 불만을 참아냈다.
“푸하하하하, 농담도 못 하겠군. 아주 얼어붙은 강아지 같았네, 백작.”
“…….”
이것이 록시디언만의 ‘개새끼’를 부드럽게 표현한 말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로드 관심도 없네. 게다가 예로부터 새로운 ‘로드’는 개척한 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단 것이 제국의 불문율이었지.”
록시디언은 과연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백작의 등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번 로드 개척은 그대와 레무트 공작의 공동 작업이니, 권한 또한 공동으로 가지겠군?”
“……그렇습니다, 폐하.”
“짐은 그저 축하해 주러 온 것이니, 그렇게 못 볼 꼴 본 듯한 표정 짓지 말고 마시자고.”
록시디언이 빈 잔을 내밀었다.
근처에 있던 시종이 허둥지둥 잔을 따랐다.
차일드 백작은 록시디언의 알 수 없는 언행에 더욱 당황했지만, 여기서 황제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록시디언의 제안에 따라 잔을 들어 올렸다.
록시디언은 잔을 홀짝이며 조용히 문을 응시했다.
다름 아닌 제 여동생이 나간 문.
한참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그곳으로 누군가 은밀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은밀한 것치고는 꽤 다급한 걸음이었지만 말이다.
‘……이안 차일드였나?’
제 바로 옆에 있는 차일드 백작의 장남이었다.
록시디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도 그럴 게 이안 차일드의 뒤를 쫓아가는 가녀린 실루엣이 또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이안은 정신없이 걸음하고 있었다.
30분 전 그는 아주 잠깐, 아주 잠깐만 참을 수 없어서 연회장을 떠났었다.
샤를리즈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킨 레무트의 파트너로 나타났으니까.
‘두 사람의 사이는 끝난 것이 아니었나?’
더는 보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샤를리즈의 태도만 보아선 그러했다.
어느 순간부터 샤를리즈는 철천지원수를 보듯 아스킨을 보곤 했으니까.
그에 더해 차차 그에게도 무감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안은 거기서 희망을 얻었다.
‘한데, 어째서?’
샤를리즈에게 차마 달려가 묻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의 저 다정한 모습이 분명 연출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평소의 자신처럼 달려가 능글맞게 묻지 못한 것은…….
“하아…….”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공녀님께서는 레무트 공작님과 함께 나가셨습니다.”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연회장으로 돌아온 이안을 기다린 것은 샤를리즈의 부재였다.
그리고 그 소식은 샤를리즈의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던 우직한 기사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이… 제트라 하였던가.
사라진 샤를리즈를 쫓아 정신없이 정원이며 후원을 찾아 헤매던 이안은 마침내 아스킨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그녀를 발견했다.
샤를리즈를 부르려 목소리를 내는 순간이었다.
낯선 인기척이 자신의 뒤에 나타났다.
이안은 제 어깨 위로 올라오던 손을 낚아채 낯선 이의 손목을 그대로 비틀었다.
동시에 가녀린 여성의 비명이 들렸다.
“끕, 이안 도련님…… 흐윽.”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놀랍게도 이안의 뒤에 나타난 사람의 정체는 플로리아였다.
그리고 플로리아를 붙잡는 사이, 이미 마차는 떠나 버린 뒤였다.
이안의 낯으로 낭패감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 손부터, 손목이 떨어질 것 같, 아요.”
동시에 이 가녀린 여자가 짤막한 비명 외에는 숨죽여 고통을 참는 모습을 보았다.
분명 엄청난 고통이 있을 터인데도 참는 모습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이.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목을 놓아준 뒤, 마차가 있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지만 플로리아가 이안을 불러 세웠다.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좋아하시나요?”
“네가 무슨 상관이지?”
플로리아가 정곡을 찔러 화가 났기보다는 마차가 출발해 버린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 이안이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으나, 내 일에 신경 쓸 생각하지 마.”
이 여자는 아버지와 무언가 관계가 있다.
“경고인 건가요?”
평범한 여성은 결코 아까와 같이 팔이 꺾인 상황에서 침착할 수 없다.
“경고? 명령이겠지.”
또한 이리도 살벌히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아는 듯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녀는 연회장 안에서의 조금 주눅이 들어 그 모습마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쉽네요. 도련님께서 공녀님과 같은 여성 분을 대하실 줄 모르시는 것 같아서 도움을 드리고자 했는데…….”
이안은 아직도 제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플로리아의 손을 뿌리친 뒤 그녀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버렸다.
“저분은 아무래도 저랑 같은 분이신 것 같거든요.”
남겨진 플로리아의 눈이 샤를리즈가 떠난 곳을 향했다.
그녀의 청초한 두 눈은 의아하리만큼 호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홍조 가득하게 웃다가 몸을 돌렸다.
* * *
샤를리즈는 레무트 성에 도착한 뒤 기웃거리기 바빴다.
도착하는 즉시 아리아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리아는 오늘 몸이 조금 좋지 않아 약을 먹고 푹 잠들었다고 했다.
아쉽지만 내일이면 볼 수 있을 테니 크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여기 도착해 식사를 하고, 어찌어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벌써 저녁이었다.
그녀는 식사 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녀의 앞에는 이곳의 집주인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샤를리즈는 잠시 생경함을 느끼다가 곧 이 생경함도 즐겨 보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저택에서 영감 속이 뒤집어졌겠군.’
예상되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반응에 흡족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 방을 써?”
“방?”
“응. 내가 본 곳은 드레스룸이지 않아? 내가 지낼 방 말이야.”
샤를리즈는 하루 이틀 머물 것이 아니고 장기 투숙이니 좋은 방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스킨은 그녀의 뻔뻔함에 놀랐다가 이내 작게 웃음 지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었다.
그도 잠시 아스킨의 웃음이 멈췄다.
“아, 혹시 너랑 같은 방 써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