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뭐?”
샤를리즈가 찻잔을 놓고 턱을 괴었다.
손가락은 똑 떨어진 찻물을 스윽 느릿하게 비볐다. 물줄기가 손가락을 따라 야릇한 곡선을 띠었다.
“약혼 다시 하기로 했잖아?”
샤를리즈는 하루 이틀 머물 것이 아니고 장기 투숙이니 좋은 방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스킨은 그녀의 뻔뻔함에 놀랐다가 이내 작게 웃음 지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었다.
그도 잠시 아스킨의 웃음이 멈췄다.
“아, 혹시 너랑 같은 방 써야 하나?”
“뭐?”
샤를리즈가 찻잔을 놓고 턱을 괴었다.
손가락은 똑 떨어진 찻물을 스윽 느릿하게 비볐다. 물줄기가 손가락을 따라 야릇한 곡선을 띠었다.
“약혼 다시 하기로 했잖아?”
아니, 하나도 야릇하지 않은 행동임에도 샤를리즈가 한 행동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스킨의 눈에는 이렇게 비쳤다.
“……약혼은 결혼을 앞둔 사이를 칭하는 거지, 부부를 칭하는 게 아니다.”
“그건 그렇지.”
샤를리즈가 턱을 괸 그대로 빙긋 웃었다.
“근데 역시 보수적이네.”
“뭐?”
“농담이야. 그냥 한번 놀려 본 거. 네가 워낙 딱딱하게 있길래.”
“…….”
샤를리즈가 가리킨 건 긴장이 돌처럼 내려앉은 아스킨의 어깨였다.
아스킨은 마치 제 속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뭐, 방은 아리아랑 함께 써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고. 그치만 혼자 방 쓰는 건 질려서 같이 써 보고 싶은데…….”
“나랑 방을 같이 쓰자는 건가?”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게다가 아깐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응, 안 했지. 대신에 그런 표정을 했지.”
그간 아리아를 보호하고 있는 동안 거의 한 방을 쓰다시피 해서 그 시간이 좋았고 그립다는 소릴 하려 했는데, 이건 무슨 이야기인지.
“그러고 보니 보통 약혼할 땐 약혼식을 따로 올리지?”
‘샤를리즈’와 아스킨은 별다른 약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그건 사실 아스킨이 포로나 다름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을 살릴 돈을 얻는 대신 자신을 바쳤으니까.
이는 아스킨을 무시하는 처사임에도 알츠베이트 가문에서는 침묵했다.
“우리 다시 만난 김에 식이나 올릴까? 그 영감이 그때야말로 제대로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은데, 어때?”
“…….”
샤를리즈는 그 외에도 재잘재잘 떠들었다.
대개가 약혼식에 관련한 얘기였다.
그러나 아스킨이 동조는커녕 침묵으로 일관하자 곧 흥미를 잃었다.
“1년.”
“……1년?”
“그래. 딱 1년만 나와 약혼해 줘. 아니다…… 한 7개월쯤?”
자신이 ‘샤를리즈’의 몸에서 눈을 뜬 시기를 가늠해 보던 샤를리즈가 기간을 정정했다.
이 기간 동안만 약혼을 유지한다면 자신은 신이 준 과제를 성공하는 셈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나는 모든 걸 처리할 거야.”
“처리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지?”
“알츠베이트 가문이 쫄딱 망했으면 좋겠어.”
“……네 가문 아닌가?”
“난 당장 내일이라도 그 이름을 버릴 수 있을걸?”
“…….”
아스킨이 생각하기에 샤를리즈에게 알츠베이트가 사라져도 황제의 여동생이라는 그녀의 혈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쉬울 건 없을 듯했다.
“너도 알츠베이트가 싫잖아. 그래서 오늘 내 연극에 동참한 거 아니야?”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킨이 오늘 그 연극에서 모른 척 가담한 것은…….
“혹시나 아직도 내가 싫거나 그런 종류의 앙금이 남았다면 말이야, 딱 이 기간만 참고 같이 협력해 달라는 거야.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방은 적당한 걸로 내줄 거지?”
샤를리즈는 턱을 괴었던 손을 풀며 미련 없이 일어났다.
그대로 아스킨을 지나치려는 순간, 조심스럽게 손목이 잡혔다.
“……약혼을 유지하는 거라면, 적합한 약혼자로서 행동해도 상관없나?”
“응?”
“넌 세간에 우리가 열렬히 사랑에 빠져 다시 만나는 것처럼 행동했다.”
“…….”
샤를리즈는 자신을 향한 꼿꼿한 푸른 눈에 잠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맞춰서 행동해도 되냐고 묻는 거다.”
“……그게 어떤 행동인데?”
“……네가, 허락한다면 보여 주고 싶은데.”
샤를리즈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눈을 돌린 순간이었다.
샤를리즈는 마침내 새빨개진 얼굴을 이토록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토록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새빨간 얼굴이었다.
샤를리즈는 당황하고 말았다.
머리로는 더 밀어붙이지는 못할망정 여기서 당황해선 안 된다고 외쳤지만 어디 세상사 생각대로만 되겠는가.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열이 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생경함을 동시에 느꼈다.
‘아, 나 이 느낌 아는데…….’
샤를리즈는 아스킨 레무트라는 남자를 이 세계에서 처음 보았을 때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을 생각해 냈다.
동시에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 아스킨 얘는 왜 남주 후보가 아니냐고.”
여동생에게 헌신적인 인물.
그러나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인물에게 설원 같은 차가움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인물이었다.
소설을 보며 늘 생각했다.
만약 이 남자가 이런 한결 같음을 잃는 순간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결국 지후 또한 소설 속 조연에 해당했던 아스킨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보통 독자라고 할 순 없었다.
샤를리즈는 지후일 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한번 보여 봐.”
기세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역시나 자신을 죽음 목전까지 내몰았던 것은 쉬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이 남자는 전혀 모르는 일이며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겠지만, 죽음 코앞까지 다녀온 입장에서 여전히 불신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우린 앞으로 열심히 연기해야 돼. 내 할아버지가 어디 보통 인물이야?”
그 노회한 공작은 지금쯤 화를 길길이 내고 있겠지만 분노가 가라앉은 뒤엔 이상함을 느끼고 파헤치려 들 것이었다.
“정신 차린 영감을 제대로 속이는 건 쉽지 않을걸. 영감만 속여야 하는 게 아니야. 기왕이면 내 오빠도 속여 주면 좋겠어.”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굳이 목록에 넣을 수 있다면 놓고 싶은 심술이었다.
“그래, 네가 뜻하는 대로 따르겠다.”
“……왜 그렇게 순순한지 궁금한데, 별로 묻고 싶지 않아졌어.”
그러자 눈을 깜빡이던 아스킨이 이내 살짝 웃었다.
늘 차갑던 모습과 모순되게도 퍽 유순한 미소였던지라 샤를리즈는 주춤했다.
아스킨은 그런 샤를리즈의 몸짓을 느끼지 못한 듯 미소 그대로 눈을 살짝 접었다.
“알겠다. 그럼 나는 정해진 역할에 맞춰 잘 행동하면 된다는 거군.”
“뭘 또 확인받듯 말하고 있어. 어차피 넌 네 멋대로 행동할 거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까지 그래 왔잖아?”
하기야 ‘샤를리즈’ 뭐가 이쁘다고 순순하게 굴겠나 싶지만.
새초롬한 샤를리즈의 말에 아스킨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이봐, 너 그거 알아? 사람이 너무 변하면 일찍 죽어.”
“보통 경지에 오른 검사는 평범한 인간에 비해 수명이 긴 편이다. 네 말대로 변해서 수명이 변한다면…… 앞으로 너와 수명이 비슷해질지 모르겠군.”
샤를리즈는 뜻밖의 진지한 대꾸에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표정으로 ‘이건 대체 무슨 X같은 소리지?’ 하는 표정이 스쳤다.
“물론 네가 평균 수명에 가깝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지만.”
“응, 네가 뜻밖에 진지한 또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아. 딱히 즐거운 소식은 아니지만.”
“진지한 또라이?”
샤를리즈는 기가 막혔다. 아니, 코도 막혔다.
그 얼음같이 차갑던 인간이 지금 자신을 보면서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퍽 순진하게 보였으니.
아무래도 제 눈을 찔러다가 정신을 차리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샤를리즈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아스킨이 거리를 좁혔다.
정신 차린 샤를리즈가 흠칫 커다란 그림자에 저도 모르게 놀라자, 다가가는 속도를 늦췄다.
“그보다 아까 한 말에 이어서 말인데…… 역할에 맞는 적합한 행동을 해도 된다고 했다.”
“그래, 그런데?”
“그럼 만약에 너와 내가 입을 맞출 일이 있다면.”
“그럼 하는 거지, 가 아니라…… 뭐?”
“아, 해도 되는 거군.”
뭘 순진하게 깨달은 표정을 짓는 거야, 얘?
샤를리즈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내 주변에 유독 또라이가 많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모든 인간이 또라이라고 믿고 싶진 않았는데.’
샤를리스가 숨을 삼켰다.
알고 보니, 자신의 최애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천지원수였던 이 남자가 사실은 이런 순박한 미친자 같은 면모를 숨기고 있던 걸까?
“도대체 너랑 나랑 입을 부빌 상황이 왜 만들어지는 건데?”
“놀랍군. 내가 떠올린 걸 네가 예상하지 못할 거란 생각하진 않았는데…….”
짧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이 말을 들은 샤를리즈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있다고? 내가?
“네 말대로 나는 너만큼이나 알츠베이트 공작을 알고 있지. 가족의 눈을 숨기기란 쉽지 않을 거다. 내가 아리아의 눈을 쉬이 속일 수 없듯이.”
“딱히 가족이라 생각하진 않고, 너와 아리아의 사이랑 나와 그 영감의 사이를 비교하자면 백만 광년쯤 떨어진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데?”
“알츠베이트 공작 또한 너를 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한 번쯤 증명하란 소리가 나오지 않겠나?”
“증명……?”
아스킨이 신중한 얼굴로 제 입술을 툭 두드렸다.
“게다가 넌 황제 폐하 또한 속이는 대상에 포함하고 싶다고 하였지. 내가 아는 그분이라면 필시 네게 눈앞에서 입을 맞춰 보란 식으로 증명하란 말 또한 하실 분으로 생각되는데.”
“…….”
……이 자식 록시디언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