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샤를리즈는 생각보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폭군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를 두고 그저 충성을 다할 뿐, 자신의 주군을 판단하려 드는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아니긴 한데…….’
듣고 보니 옳은 말이라 도리어 삐딱한 기분이 들었달까.
아스킨은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하려는 듯 조심스러운 몸짓이었으나, 이 덩치가 이리 움직인다고 한들 안전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나는 돌발 상황에 그리 강하지 않아.”
라고 수많은 전쟁터를 거쳐 온 사령관이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조금 당황한 나머지 이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대신 훈련엔 강하지.”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결함을 보이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온 손은 샤를리즈의 연약한 힘에도 금세 뿌리칠 수 있을 것처럼 미약했다.
“그래서…… 네가 알려 준다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스킨의 유려한 얼굴로 얼핏 긴장이 스쳤다.
그는 마치 첫 전장에 나간 것과 같이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연습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뭐야, 이 인간. 왜 이렇게 요망하게 굴어?
샤를리즈는 당황한 동시에 아스킨의 얼굴을 정신없이 살펴보기 바빴다.
혹시 목 뒤에 지퍼가 달린 거 아니야? 내리면 다른 사람이 짠 나타나게?
아니면 마법을 쓴 건 아니고?
그러나 하얀 얼굴에 잔잔하게 퍼지는 열기를 보며 관찰을 멈추고야 말았다.
무뚝뚝한 손을 타고 긴장이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무슨 그런 걸 연습하냐고 해야겠지?’
그래야 하는데.
아스킨의 얼굴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래, 한 번쯤 괜찮지 않나? 연습이래잖아. 쟤가 나보고 책임지라고 한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손목을 타고 흐르는 이 열기는, 아무래도 지금이 야심한 밤이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평소랑 다르게 너무 편한 차림이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 게 틀림없었다.
“……난 서툰 남자랑은 안 해. 너 잘해?”
“…….”
도발적으로 툭 흘러나온 말에 아스킨이 침묵했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가르쳐 주는 건 뭐든 잘해 왔다.”
아스킨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샤를리즈는 자신의 손목에 감긴 커다란 손이 좀 더 뜨거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개를 들면 붉어진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려 줘.”
툭 내뱉은 말에 숨소리가 깃들고, 마침대 숨결이 코 끝에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똑똑똑.
숨막히도록 적막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노크는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샤를리즈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속으로 화들짝 놀라며 아스킨의 손을 쳐냈다.
그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샤를리즈는 뒤로 물러났다.
꽁지 빼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으로.
“공작님, 죄송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밖에서 아스킨의 부관 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수단 삼아 샤를리즈가 입끝을 올렸다.
“연극엔 너도 동참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
새침한 목소리였다.
노크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자 그녀의 웃음이 진해졌다.
“너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네. 어서 가 봐. 방은 적당히 알아서 골라 볼게.”
“…….”
이 말을 끝으로 샤를리즈는 휙 돌아섰다.
그도 그녀도 알지 못했다.
돌아선 샤를리즈의 표정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 * *
밤새 몸을 뒤척인 나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뭐야, 여긴 어디야.’
낯선 공간에 생경함을 느낀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맞다, 나 어제 아스킨 그 인간의 성에 도착했지.
게다가 여기서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아니, 며칠이 될지 한 달이 될지. 혹은 그 이상이 될진 모르겠지만.
“끄응, 온몸이 다 뻐근하네…….”
평소 알츠베이트 저택에서 쓰는 침대가 제국에서 제일 가는 장인의 손에 만들어진 침대여서 이 침대가 불편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본래도 침대를 타지 않는 편에다 피곤했으므로 어디든 잘 잤을 것이다.
그럼에도 잘 자지 못한 건 오로지 정신 문제였다.
‘와…….’
머릿속으로 어젯밤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참지 않고 바로 종을 들어 하녀를 불러 냉수를 가져오게 했다.
곧 하녀가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속을 가라앉혔다.
‘미쳤네. 나 어제 진짜 키스할 뻔한 거야? 걔랑?’
제아무리 작정하고 연극을 하기로 했다지만, 거기까진 오버였다.
생각조차 안 했단 말이다.
그런데 분위기란 게 뭔지.
괜히 옛 어른들이 술과 밤을 조심하라고 한 게 아니었나 보다.
‘놀랍다, 놀라워 밤과 새벽 감성…….’
세수까지 하니 정신이 들었다.
내가 이 레무트 성에 온 건 단순히 도피성으로 온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물론 알츠베이트 그 영감이 당장 길길이 날뛸 걸 대비해서 머물 곳이 필요하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일단 폭군 그놈에게 연락을 한번 해야 하는데…….’
연락하려면 집주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스킨을 다시 보려니 괜히 껄끄러운 마음이 들긴 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리던 하녀 하나가 다가와 하얀색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니?”
“아침 일찍 동이 트기도 전에 공녀님 이름으로 도착한 서신입니다.”
“……내 이름?”
나는 봉투를 건네받는 동시에 흐린 눈을 비볐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설마 알츠베이트 그 영감이 벌써 알았다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봉투를 뒤집었다.
봉투에는 보통 있어야 할 가문의 직인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봉투 가장자리에는 예쁜 꽃이 새겨져 있었다.
장미, 이는 필시 내 사교계 이명을 따온 듯해 보였다.
이런 경우, 개인적인 서신이나 은밀한 서신, 둘 중 하나인데.
어느 쪽이 되든 짐작 가는 것이 없을뿐더러 찝찝함을 자아냈다.
고민 끝에 편지를 열어 보았다.
「친애하는 알츠베이트 공녀님께
제국 최고의 미의 여신께서 이동하신들 향기가 길을 따라 머물러 있더군요.
(중략)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제게 귀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추신. 허하시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공녀님의 답신을 애타게 기다리다 잔디밭에 드러누울지도 모를, 이안 차일드로부터.」
편지를 읽다 말고 피식 웃음이 흘렀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었다.
잔디밭에 드러눕는 건 또 뭐야.
호수 공원에서 봤던 것처럼 진상같이 드러눕겠다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머릿속에는 놈이 정말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드러눕던 꼴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연회에서 그놈을 못 본 것 같은데.’
차일드 백작이 연 연회였다.
게다가 토벌에는 이안 차일드 또한 참여했으니 분명 함께 돌아왔을 텐데.
‘혹시 어디 부상이라도 당했나?’
미운 정도 정이라는 건지. 괜히 웃었던 것이 찝찝해졌다.
사실 편지는 정말 이걸 교본으로 써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유려한 필체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갈하게 잘 쓰는 사람이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 쓴 게 보인다고 할까.
게다가 말투 또한 귀족적이고 우아했다.
‘허어, 내가 본 편지 중에 제일 귀족다운 편지였다.’
느끼할 법한 대사들도 어째 이안 그 인간의 필체와 곁들여지니 명문처럼 보였다.
나는 답변을 할까 고민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렸다.
‘내가 레무트 성에 있단 사실은 어떻게 안 걸까?’
찝찝함과 걱정이 널을 뛰며 오갔다.
곧 천칭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펜 좀 가져다줄래?”
“네, 공녀님.”
내가 봐 온 이안 차일드란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는 그 인간을 봐온 내 눈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 인간도 나와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 아스킨의 독살을 막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 같으니까.
“나 다시 좀 더 누워 있을 테니까, 아무도 들이지 마.”
“예, 공녀님. 명심하겠습니다.”
내 방 침대도 아닌 침대가 낯설 법도 한데, 참 신기하게도 마치 오랫동안 쓰기라도 한 것처럼 편히 누웠다.
‘이대로 내내 잠이나 푹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집을 나온 순간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어차피 그 영감은 빠른 시일 내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스킨과 약혼하는 내내 날 방해하려 들걸.’
그뿐일까, 제 앞길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혈육이고 뭐고 단칼에 치워 버릴 것이다.
옆에서 지켜봐 온 알츠베이트 공작이란 그토록 비열한 인간이었다.
‘플로리아가 등장한 이상 이야기가 더 뒤틀리기 전에 알고 있던 정보를 팍팍 써먹어야 돼.’
내가 그간 삶을 포기하고 부랑자처럼 지낸 것은 아니다.
그 꼴 보기 싫은 폭군 오빠를 왜 그리 자주 만났겠어.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감았다.
“아, 아리아는 지금쯤 일어났으려나? 이럴 땐 아리아랑 쇼핑이나 가고 싶은데.”
그럼 아무 생각 없이 푹 쉴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 성에 있다고 해서 마냥 도망자처럼 갇혀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폭군 오빠랑 연락도 취해야 할 테고 말이지.’
나는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쳤다.
아쉽게도 아리아는 전날 먹은 약 때문인지 아직도 숙면 중이라고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영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인지 새벽에 깨어났다가 겨우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그런 아가씨를 깨울 수는 없으니, 결국 홀로 마차를 타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