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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153/194)

152화

나는 미리 데리고 나온 레무트 성의 시종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보란 듯이 이것저것 사들였다.

“세상에나 공녀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지금 입으신 것은 이번에 바다 건너 새로 들어온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랍니다!”

“색깔별로 하나씩 담아 줘. 아, 저 모자도.”

“헉, 직접 보지 않으셔도 될까요……?”

“집에 가서 보지.”

나는 미처 잊었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아, 배송은 레무트 성으로 해 둬.”

가게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이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알츠베이트 공녀가 레무스 성에 머문다는 소식이 일시에 퍼질 것이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목적을 달성한 뒤로도 이곳저곳을 드나들며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공녀님.”

상념에서 깨어났을 즈음엔 꽤 많은 시종들이 따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양손엔 더 이상 공간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내 앞에는 익숙한 기사가 서 있었다.

“제트.”

“예, 공녀님.”

“간밤엔 잘 잤니?”

“…….”

제트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우직하게 고개를 조아릴 줄 알았지만, 웬걸 잠시 침묵 끝에 나직이 속삭였다.

“……아뇨,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응?”

“지켜야 할 주인이 곁에 계시지 않는데 편히 잠들 수 있는 호위는 없습니다.”

무뚝뚝한 말에 나는 가만히 기사님을 응시했다.

“내가 인복은 더럽게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

“다른 건 몰라도 호위는 잘 둔 모양이야.”

왜인지 제트의 얼굴이 묘해졌다.

“내가 말한 건 잘 가져왔어? 시킨 일은 제대로 했고?”

어제 아스킨의 성으로 가기 전, 그러니까 연회로 출발하기 전에 나는 충성스러운 호위에게 몇 가지를 은밀하게 시켰다.

“예, 공녀님. 말씀하신 대로 처리한 후, 지시하신 것도 가져왔습니다.”

제트가 내게 통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이것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 고마워. 너는 말한 대로 한동안 계속 알츠베이트에 머물면서 내게 알려 줘.”

“……예, 알겠습니다.”

제트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어 말했다.

“공녀님…… 그럼 저는 언제쯤 다시 공녀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어쩐지 눈앞의 남자가 거대한 경비견으로 느껴졌다.

그것도 주인이 두고 가려니까 티는 내지 않는데 서운해하는 그런 철든 강아지?

‘철든 강아지라니 내가 떠올렸지만 표현 한번 웃기네. 그리고 사실 제트는 경비견보다는 곰 쪽에 가깝지 않나?’

“나 너 버린 거 아닌데.”

“네?”

“너니까 거기 둔 거야. 제트.”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 내 편이라곤 너뿐인데, 믿고 염탐을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사실이었다. ‘샤를리즈’에 빙의한 내게 누가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람은 오직 아리아와 제트 두 사람뿐이었다.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트는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이내 등을 돌려 돌아섰다.

잠시 멈칫하는가 싶다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다.

“감히 청컨대 약조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나는 ‘네가 감히?’ 같은 말을 하는 대신 잠자코 끄덕였다.

“다치지 말아 주십시오.”

“어…….”

“아프지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제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우직한 자세 그대로 등을 돌려 돌아갔다.

분명 뒤로는 시종들이 주르륵 있건만 나는 길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어라, 제트가 웃었던가?’

어쨌거나 제트는 믿음직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내게 속이는 것 따윈 전혀 없을 테니까.

* * *

‘흐음, 이것 참…….’

아스킨의 부관 벤은 토벌에서 돌아온 직후, 눈에 띄게 달라진 자신의 주군 아스킨의 행동에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토벌에서 돌아온 직후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뭔가 이상했던 듯싶었다.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미묘한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아스킨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 온 가신으로선 매우 커다란 변화였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업무는커녕 창문을 보며 멍하니 있는 모습 같은 것이 말이다.

‘……펜을 쥐실 생각을 안 하시는군.’

아스킨은 내내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더라?

그래, 약 2시간 전 레무트 성에서 한 마차가 빠져나갈 때부터였다.

벤은 이미 집사에게 언질을 받았기에 저 마차 안에 고귀한 손님, 알츠베이트 공녀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스킨은 마차에 샤를리즈가 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동시에 마차 지붕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도망?”

“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떠나는 건가?”

“예, 공작님?”

“네게 한 말이 아니다.”

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구는 제 주군이 영 낯설었다.

거기다 아스킨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샤를리즈라는 사실이 몹시도 경악스럽고 놀라웠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조심스럽게 들어온 시종이 벤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저, 공작님. 성 정문에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누구지?”

아스킨은 성의 없이 서류를 만지며 되물었다.

“음, 차일드 가문에서 온 마차인지라 일단 정문 앞에 대기시켰다고 합니다.”

그와 동시에 아스킨이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의 반응 같았지만, 웬걸 푸른 두 눈에서는 서리처럼 차가운 한기가 어려 있었다.

“어…… 제가 내려가서 확인할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벤이 나섰지만 아스킨은 본인이 직접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집무실 안이 지독하게 갑갑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차일드 가문의 마차라는 점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안 차일드.

혹시 그자가 이곳에 온 것이라면.

‘……샤를리즈와 친분이 있었지.’

그 남자를 굳이 자신의 성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스킨은 생전 처음 느끼는 돌풍 같은 감정에 당혹스러웠다.

어렴풋하게 이름을 알리는 이 감정은 그 남자를 싫어하라 종용했다.

게다가 이안 차일드라면 이곳에 샤를리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왔을 가능성이 컸다.

보아하니 타고난 장사꾼 가문답게 정보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스킨이 정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마차를 타고 온 자는 상상도 못 한 인물이었다.

‘저 여인이 왜 여기에.’

놀랍게도 마차 앞에 서 있는 이는 플로리아였다.

그녀는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안내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스킨을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큼은 마치 오래 그를 봐 온 사람처럼 친근한 모습이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를 그런 모습에 아스킨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레무트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차일드 가문의 연회에서 보였던 어리숙하고 어설픈 예법은 마치 연기였다는 듯 플로리아의 자태는 우아했다.

아스킨의 눈썹이 차갑게 솟았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그의 얼굴은 한겨울 찬바람을 맞을 때보다도 더욱 단단한 표정이었다.

“당연히 공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돌아가라.”

“용건은 묻지 않으시나요?”

“시답잖은 용건일 시, 차일드 가문에 죄를 물어도 괜찮다면 얼마든지.”

플로리아는 입술을 살포시 닫고 싱긋 웃었다.

청초한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문전 박대하시는 거군요. 예상은 했지만……. 아, 뒤쪽 정원 관리가 잘 되어 있네요. 혹시 저기 가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플로리아는 아스킨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발길을 옮겼다.

기묘한 태도였다. 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아스킨이 아니라 뭇 남성이었다면 홀린 듯 쫓아갔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으니까.

아스킨의 뒤를 쫓아온 벤이 아스킨의 심기를 읽고 플로리아를 제지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아스킨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전쟁통을 겪으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었다.

개중에는 플로리아와 비슷한 눈빛을 한 인간도 있었다.

‘끈질긴 인간이다.’

아스킨은 본능적으로 플로리아의 본질을 알아보았다.

웃고 있지만 끈기가 대단한 인물이다.

이런 경우엔 차라리 빨리 용건을 해결하는 쪽이 나았다.

어차피 허튼짓을 할 경우 차일드 백작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

아스킨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용건부터 언급해라.”

“각하,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제국에서만 피는 꽃인가요? 너무 아름답네요. 필시 이 정원을 돌본 사람의 정성이 들어간 게 느껴져요.”

“계속 못 들은 척하겠다면 그대로 추방하겠다.”

플로리아는 아스킨의 물음에 대답을 피한 채로 자신의 눈을 현혹시킨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 꽃은 만지면……”

“아악!”

벤이 황급히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플로리아의 고운 손에는 곳곳에 가시가 박힌 뒤였다.

건드릴 시 가시를 드러내는 꽃으로 꽃을 돌보는 아리아 또한 반드시 특수 장갑을 끼고 돌보는 식물이었다.

찰나 순간 손바닥으로 흐른 피가 넘쳐 검붉게 보일 정도로 진했다.

핏방울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스킨이 무심하게 서 있자, 머뭇거리며 다가간 벤이 손수건을 내밀며 아스킨을 눈짓했다.

아스킨의 허락이 떨어지자 손수건을 건넬 수 있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 의도치 않게 흉한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다만, 손수건으로 지혈하는 것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

“한 손으로 꽉 잡고 용건이나 말하도록.”

아스킨은 괜한 실랑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시간 낭비였다. 또한 그의 마음속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의 눈과 귀는 이미 아침에 사라져 버린 샤를리즈의 마차를 쫓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언제 돌아오는 걸까?

아니,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아스킨은 마치 집 지키는 강아지라도 된 양 제 모습이 낯선 동시에 싫지만은 않았다.

‘하아……. 정말 중증이군.’

그사이, 아스킨이 나서지 않자 눈치를 보던 벤이 손수건을 받아 지혈을 도왔다.

“……듣던 대로 냉정하고 칼 같은 분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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